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무엇인가?

고구려 제 19대 공적과 덕이 뛰어난 영락대왕 재위 391~413년

 

 

 

 

 

 

 

 

 

 

 

 

[광개토대왕비의 옛모습과 2008년도 중국에서 새로 단장한 비각의 모습, 사진출처: 일본/대만/한국 구글 이미지 검색]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1-<비문 해석,
출처-나무 위키: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노태돈『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인사)]>:

[<<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17][18]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水神)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말을 타고 순행하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께서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우라."라고 하셨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19] 몸을 돌려서 세자(世子)였던 유류(儒留)를 왕(王)으로 명하고서 "도(道)로써 흥치(興治)하라." 하시니라.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하늘(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
[20]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21]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22]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 ~ 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23]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24]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25]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26],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27]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
[28] 무술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백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했다.

영락 9년
[29]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30]하였다 [31].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었습니다.

노객(奴客)
[32]은 (대왕의) 민(民: 백성된자로써)[33][34][35]으로써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였다.

10년
[36]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 國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수병(戍兵)으로 두셨다.[37]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38]

14년
[39]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40]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
[41]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
[42]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그 출신지(出身地)와 호수(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訾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연호(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43] 원근(遠近)[44]에 사는 구민(舊民)들[45]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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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각주>>]


[17] 북부여에서 출생하셨으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금와가 유화를 만난 곳이 금와가 왕인 동부여의 영역이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으나, 이후 기록에선 북부여로 나오므로 학계에선 북부여가 타당하다 보고있다.

[18]
주몽이 북부여의 해모수 아들이므로 원문의 出自北夫餘를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뜻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럴 때는 동부여에서 왔다는 삼국사기 이야기는 맞게 된다.

[19]
이 설화는 훗날 장수왕 대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그대로 옮겨간 듯한데, 황룡이 기린으로 바뀌는 등 과정을 거쳤다. 부벽루 참조.

[20]
또는 비려(碑麗).

[21]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거란 정벌과 같은 기사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이 기사에서는 왕이 거란까지 친정을 했다고 기록 되어있는데 몇 달후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까지 또? 친정에 나서서 한강 일대의 관미성까지 함락 시켰다고 기록 되어 있어서, 시공간적으로 무리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22]
오늘날 요하의 지류인 내몽골의 시라무렌강.

[23]
391년.

[24]
396년.

[25]
일본 학계에서는 3字 중 마지막 문자를 南으로 파악하고 있다. 남진 하였다라고 풀이한다. 하마다 고사쿠가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 내용이 수록 되어 있다.

[26]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을 함락한 시기는 신묘년 391년의 일이지만, 391년은 전치문이므로 396년에 끼어넣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릉비에 나온 다른 기사의 훈적의 연도 또한 조금씩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27]
백잔의 주인. 곧 백제의 왕을 지칭한 것인데, 비문은 백제를 철저히 하대하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는 고구려가 백제에 의해 왕이 피살되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28]
398년.

[29]
399년.

[30]
아마 삼국사기,일본서기 기준으로 397년,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기준으로 396년에 태자 전지를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받은 것에 대해 서술하는 듯 보인다.

[31]
화통은 양자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는 관계이므로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이다.

[32]
간혹 왜가 '(신라왕 자신을) 노객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는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일공동역사연구위원회는 노객을 신라왕 자신이 광개토왕에게 자칭하는 명칭으로 결론 내렸다. 이것은 한국 사학자 김태식 교수와 일본 교수 하마다 고사쿠 또한 각자 투고한 논문에서도 같은 의견이었다.

[33]
간혹 (고구려 혹은 대왕의) 노객을 왜가 민(民)으로 삼으려고 합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학계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해석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제2차 한일 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논문에서 '(대왕의 혹은 고구려의) 노객(奴客)이란 (그 신분이란, 대왕의) 민(民)이니 왕께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별거 아닌 차이 같지만 신묘년 기사에 나온 신민의 성격과 어느 쪽이 주체인지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

[34]
민(民)으로 삼으려고 하니 귀의한다는 문맥상 말이 되지만, 이미 왜가 노객(신라왕)을 민(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모순된 말이다. 이미 왜의 민(民)이 되었다면 광개토왕한테 사신을 보낼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이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투고한 내용이다.

[35]
앞서 병신년에 아신왕이 대왕의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봐서, 프로파간다 성격이 매우 짙은 릉비의 원문상, 내물왕이 말한 노객 또한 고구려의 노객임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36]
400년.

[37]
이 부분을 '안라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문맥상 (임나가)라인이 맞는 것 같다.

[38]
이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 학자들간에 또 의견 차를 보인다. 한국 학계에서는 僕 勾를 동사로 보고 알현 하다로 의역하여 신라 매금이 직접 조공을 하였다라고 보는데, 일본학계에서는 僕勾로 보고 후에 고구려로 볼모로 보내지는 복호를 음차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의 고구려 종속 수준을 보고 의견차를 보이는 것이다.

[39]
404년

[40]
수군(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41]
407년

[42]
410년

[43]
오직

[44]
멀고 가까운 고구려 지역

[45]
기존 고구려인들


2-<비문 해석-출처: 맥이-농초-박문기-1987년-293~31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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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변정(辨正)

영락 호태왕 비문해(永樂 好太王 碑文解)

옛 시조 추모왕(鄒牟王: 동명성왕)께서 나라를 창업하실새, 그 아버지는 북부여(北夫餘)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으니 왕은 그 어머니가 낳은 알(卵)을 깨고서 태어난 아드님이셨다.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으므로 하늘이 그 뜻을 열어주어 남쪽으로 내려가라 명하셨다. 가는 길은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 요북(遼北)의 서하(西河)?]를 건너야 되었으니 왕은 나루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이 추모왕을 위하여 당장 나무와 갈대로 된 다리를 만들고, 거북이를 띄워 배를 삼게하라"하셨다. 그 말에 따라 갈대로 다리가 엮어지고 거북이 뜨니 연후에 부교(浮橋)를 건너셨다. 그는 이에 비류하[沸流河: 혼하(渾河)]가 흐르는 골짜기 홀본[忽本: 졸본]의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길이 보위를 누리시다가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왕을 맞이하러 왔으므로 인하여 왕께서는 홀본의 동쪽 산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셨도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께서는 도(道)로서 다스림을 이루었고 대주류왕[大朱留王: 대무신왕]은 양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시었도다. 대주류왕으로부터 십칠세손(十七世孫)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바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시다.

평안호태왕은 18세에 즉위하셨으며, 존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하였다. 그의 은혜와 덕택은 황천(皇天)에까지 젖었고 위엄과 무공은 사해(四海)에 빛났다. 그는 명을 어기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제거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그 업에 종사하게 하였으므로 나라는 부강했고 백성은 융성했으며, 해마다 오곡이 풍숙했도다. 아! 그러나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으샤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게 하심이로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乙酉)의 날에 태왕을 산릉(山陵)에 안장하였다. 이에 왕의 능 앞에 비석을 세워 그 생전의 공훈과 업적을 새겨서 길이 후세에 전하노라.

그 사(詞)에 가로대, 영락태왕 5년은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碑麗: 선비족의 별종]가 침략을 그치지 않으므로 또한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실새, 부산[富山: 우모대산(牛毛大山)]의 산기슭을 돌아 산을 등지고, 염수[鹽水: 일명백사하우명무함하원자산서성하읍현동북(一名白沙河又名巫咸河源自山西省夏邑懸東北)]가에서 비려의 큰 부락 육, 칠백(六七百)을 격파하고, 소와 말, 양떼 등의 노획은 이루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은 수레를 돌려 가평도[駕平道: 지금의 요양?]를 거쳐 동으로
성[城: 지금의 면현(綿懸)], 역성[力城: 요동의 속현], 북풍[北豊: 지의의 심양]의 영토와 오부맥[五部貊: 고구려의 다섯 부족]들을 두루 살피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백잔[百殘: 백제를 낮추어 말한 것, 아래도 이와 같다]과 신라는 옛부터 우리의 속국이었던지라 여지껏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구들이 신묘년 이래로부터는 바다를 건너와서 이를 파[破: 동해와 남해연안지방을 약탈하고 조공선을 격침했기 때문?]하였다. 백잔은 신라를 위협하여 항복받고 그들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략 6년 병신년에 영락태왕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이잔국[利殘國: 서해안의 백제 속국]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 맨 먼저 일팔성[壹八城: 이하로는 지명(地名) 미상]을 공격하여 취하고 이어서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궁리성, □□성, 합미성, 모노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이성, □잡미성, 오리성, 구머성, 고막능라성, □□□□성, 혈□성, □□성, □이야라, 성, □□□□□□□쌍성, 불□□이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루매성, 산□성, □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성, 암문지성, 림성, □□□□□□□□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라성, 구천성, □□□□□을 공취한 후 그 수도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래도 적[賊: 백제군사]들은 기세가 꺽이지 않고, 감히 나와서 싸움을 재촉함에 태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阿利水: 재령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이 곤핍하여 남녀 일천명과 세포(細布) 일천필을 바치고 왕께 귀복(歸服)하였다. 그는 스스로 맹세하되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노객[奴客: 미상]이 된다'하였다. 호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과 칠백의 촌(村)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열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영락 8년
무술년에는 정예 부대를 훈련시켜 백신[帛愼: 숙신?]과 토곡[土谷: 미상]의 변경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더니, 인하여 그곳의 막사라성(莫斯羅城)과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和通)하였다. 태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할새, 마침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태왕님께 고하되, 왜인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城池)를 파괴하니 노객[奴客: 사신의 자칭(自稱)]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와 뵙고 명(命)을 청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사신을 위로한 후에 그들의 충순함을 칭찬하고 즉시로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일러주어 보냈다.

영락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적들이 중간에 가득하였는데, 관군이 바야흐로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관군이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르자 이들은 항복하고 복종하여왔다. 안금(임금)의 신라 백성과 수병[
戍兵: 수비하는 병사]들이 신라성을 탈환하였다. 성(城)에도 왜적이 가득했는데---관군에게 크게 무너졌다. 이들 왜적이 지나간 곳은 식량과 중기(重器)의 10분의 9가 다 파괴되거나 타 버렸다---□성 역시 안금의 신라 백성과 수병들에게 입성케 하여 인심을 수습하였으며, 왜적들이 파괴한 성지(城池) 또한 안금의 신라 백성과 수병들에게 다시 수축하게 하였다. 예전에는 신라 안금[安錦: 임금의 낮은 칭호]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서 관군에 의하여 왜적이 크게 무너져 패주하였으므로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영락 14년 갑진년에 왜구는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의 경내를 침입하여 □□□□□석성(石城) 아래로 왜적의 배들이 줄을 이었다. 태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러 나섰다. 평양에 이르자 왜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 태왕의 선봉이 길을 막고 사방에서 시살하매 왜구는 궤패(潰敗)하였으므로 무수한 적을 죽였다.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하여 □□□□□□□□평양[平穰: 미상(未詳)]에서 우리의 군사와 □□과 싸워 적을 섬멸하고, 개갑(鎧鉀) 일만여령(一萬餘領)을 노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우불성(牛
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영락 20년은 경술년이었다. 동부여(東扶餘)는 옛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았으므로 태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대군이 부여성에 도착하자 동부여 전국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을 바쳤다. 태왕의 은적이 동부여 넓은 곳에 내리게 됨에 이에 회군하여 돌아왔다. 또 그곳에서 태왕을 흠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는 미구루압노(味仇婁鴨盧), 타사루압노(椯社婁鴨盧), 숙사사
압노(肅斯舍□□), □□□□노(盧)였다.

무릇 왕은 일생에 예순 네 곳의 성과 천 사백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태왕의 묘를 지키는 사람의 연호[烟戶: 호구(戶口)]는 다음과 같다.

매구여[賣句余: 지명 미상]의 백성에 국연[國烟: 상급 관노(官奴)]이 둘이고 간연[看烟: 하급 관노(官奴)]이 셋이며,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셋, 간연이 다섯이요, 돈성(敦城)에서 온 네 집은 다 간연을 삼고, 우성의 한 집을 간연을 삼으며, 비리성(碑利城)의 두 집은 간연이 되고, 평양성의 백성에 국연이 하나 간연이 열이고, 차련의 두 집은 간연이 되고, 가루(佳婁) 사람은 국연이 하나, 간연이 마흔 셋이고, 양곡의 두 집은 간연이 되고, 양성의 두 집이 간연이 되며, 안실연의 스물 두 집은 간연이 되고, 개곡이 세 집이 간연이 되며, 신성의 세 집이 간연이 되고, 남소성의 한 집은 국연이 된다. 새로 들어온 한예(韓穢)의 사소성에 국연이 하나 간연이 하나이며, 모노성의 두 집은 간연이 되고, 영저한의 한 집이 간연이 되며, 사조성의 한예는 국연이 셋이고 간연이 스물 하나이며 고□성의 한 집은 간연이 되고, 경고성은 국연이 하나 간연이 셋이며 객현안의 한 집은 간연이 되고, 아단성과 잡진성의 두 곳을 합한 열 집은 간연을 삼고, 파노성에 한(韓)의 아홉집이 간연이 되고, 각모노성의 네 집은 간연이 되며, 각노모성의 두 집은 간연이 되고, 모수성의 세집은 간연이 되며, 간상리성은 국연이 둘이고 간연이 셋이며, 미추성은 국연이 한 집 간연이 일곱 집이며, □이성의 세 집은 간연이 되고, 두노성은 국연이 하나 간연이 둘이며, 오리성은 국연이 둘, 간연이 여덟이고, 수추성은 국연이 둘, 간연이 다섯이다. 백찬의 남쪽에 살았던 한(韓)은 국연 하나, 간연 다섯이고, 대산한성 여섯 집은 간연이 되고, 농매성은 국연 하나, 간연 하나, 윤노성은 국연 둘, 도연[都烟: 관노의 우두머리?]이 스물 둘이며, 고(古) 모루성은 국연이 둘, 간연이 여덟이고, 서성(瑞城)은 국연 하나, 간연 여덟, 미성의 여럿 집은 간연이 되고, 취자성의 다섯 집을 간연으로 삼으며, 삼양성의 스물 네 집이 간연이 되고, 산나성의 한 집은 국연이 되며, 나단성의 한 집은 간연이 되고, 비리성(比利城)의 세 집이 간연이 되며, 세성(細城)의 세 집을 간연으로 삼는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 교언(敎言)하시기를「선대(先代)왕께서는 다만 원근의 주민들을 취하여 묘를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셨다. 나는 이러한 구민연호(舊民烟戶)들이 그곳을 떠나 버리고, 남아있는 자들이 적어질까 염려된다. 만약 내가 죽은 후로 나의 묘를 지킬 자는 다만 내가 몸소 약취해온 한예(韓穢)들로 아여금 청소케 하라」하셨다. 교언이 이와 같았으므로 교령(敎令)과 같이 한예(韓穢) 이백 이십 집을 취하였으나 그 법칙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구민 일백 십 집을 취했으니 신구(新舊)의 수묘연호(守墓烟戶)를 합하면 국연 삼십이요, 간연이 삼백으로 도합 삼백 삼십 집이다.

역대의 선왕 이래로 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의 연호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켰었는데,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역대 선왕들의 묘에 모두 비석을 세워 그 연호를 새겨서 착오가 없게 하였다. 또한 법을 제정하여 수묘인을 지금 이후부터 다시는 전매(轉賣)할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자일지라도 역시 마음대로 수묘인을 매수(買受)할 수 없고, 만약에 명령을 어기고 수묘인을 파는 자는 형벌에 처하며 매수한 자는 제정한 법령에 따라 묘를 지키도록 한다.


[<<참조 각주>>]

글자에 붉은색 글씨는, 자획(字劃)이 불문명한 것을 추정하여 표기했음을 뜻한다. 이하(以下) 모두 이와 같다.

[<<
신묘년(辛卯年) 변정(辨正)>>]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에 대해서는 이형구(李亨求)씨의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의 소위(所謂)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훌륭한 성과를 이루고 있다. 이 논문은 '위작왜자고(僞作倭字考)'라는 부제가 달려서, <동방학지(東方學志)>와 <자유지(自由誌)> 등에 이미 소개된 바 있으며 근래의 <광개토대왕비연구자료집(廣開土大王碑硏究資料集)> <김근수(金根洙)편, 한국학연구소(韓國學硏究所) 간(刊)>이라는 책에도 소개되고 있다. (편집자주)

근래에, 호태왕비문에 새겨진 신묘년의 구절이 학계에 심히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왜(倭)가 신묘년 이래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을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 이위신(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라고 했는데, 이렇게 풀이하는 이는 백잔(百殘)밑에 탈락된 □□ 두 글자를 생각하지 않고서 하는 말이다. 또 어떤 학자는,「왜적이 신묘년에 내침(來侵)하였으므로 고구려 군대가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왜이신묘년래 도해파(倭以辛卯年來 渡海破)>>」라고 해석하나 이는 호태왕이 백제를 정벌했던 병신년 전쟁의 명분이 서지 않는다. 농초의 소견으로는 그 당시 3국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백제의 국력을 먼저 파악해야 될 것으로 사료된다.

백제는 말갈족(靺鞨族)과도 분쟁이 자주 있었음을 <삼국사기>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말갈족은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살았던 동이(東夷)의 부족으로서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나 백제와 접경하여 빈번한 충돌이 있었으며, 호태왕이 백제의 58성을 공파(攻破)하기 1년 전인 백제 진사왕(辰斯王) 7년 4월에도 말갈이 백제의 적현성(赤峴城)을 함락시킨 일이 있다.=<<백제진사황하사월운말갈공함북비적현성-<삼국사기>(百濟辰斯王夏四月云靺鞨攻陷北鄙赤峴城-<三國史記>)>>」. 이로써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그 당시 백제의 북쪽 경계는 지금의 함흥만(咸興灣)에서 낭림산(狼林山)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강성했을 때에는 북으로 부여를 침해하였고 서쪽으로는 산동을 위협했으며 해군 백만으로써 남쪽으로 절강(浙江)을 공략하여 고조선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려 했던 사실이 있었다.=<<초 부여거우녹산 위백제소침 부락쇠산 서사근연이불설비[…]-<진기>(初 扶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
近燕而不設備[…]-<記>)>>」. 이렇게 강성했던 백제가, 당시 열국(列國)으로 분열되어 국가의 면모도 갖추지 못했던 왜(倭)에게 격파 당하여 신민이 되었다 함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록 호태왕의 비문에「백잔과 신라가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백잔신라구시속민(百殘新羅舊是屬民)>>」라고 했으나 이는 비문을 지은이가 그 국위를 높이기 위하여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그 당시 동해변의 작은 나라로서, 고구려에 조공했었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 이들은 지금의 성진만이나 함흥만에 조공선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왜구는 이를 약탈하고 조공선을 파괴했을 것이며 심하게는 동남해변을 노략질했을 것이다. 때문에 신라에서는 신묘년부터 고구려에 보내는 조공선이 파해진 것이다. 이렇게 왜구들의 구탈로 말미암아 신라의 국력이 쇠잔해진 틈을 타서 백잔(백제)은 신라를 위협하여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호태왕이 백잔을 정벌한 것이다. 만약 비문의 내용과 같이 백잔과 신라가 똑같은 속민이었다면 어째서 호태왕이 백제를 공략하여 수천 리의 땅을 뺏어가고 신라는 구제하여 주었단 말인가? 하지만 비문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풀이함이 옳을 듯하다.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우리의 속민이었던지라 여지껏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구들이 신묘년 이래로부터는 바다를 건너와서 이를 파하게 하였고 백잔은 신라를 위협하여 항복받아 신민으로 삼았다.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 백잔
협강신라이위신민(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百殘 脅降新羅以爲臣民)>>」


글자에 붉은색 글씨는, 자획(字劃)이 불문명한 것을 추정하여 표기했음을 뜻한다. 이하(以下) 모두 이와 같다.

[<<
아리수(阿利水) 변정(辨正)>>]

병신년에 호태왕이 백제의 58개 성을 공취하고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진격했으므로, 궁지에 몰린 백제의 <진사왕이> 남녀 1천 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호태왕에게 바치고 성하지맹(城下之盟)
을 했다 하였다.

성하지맹은 적국이 성밑까지 처들어와서, 항복하면서 체결하는 맹약(盟約)이니,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講和)이다.

이때의 아리수를 근래 학자들이 대개 지금의 한강(漢江)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또 이 전역에서 백제는 한강 이북의 땅을 모두 고구려에 빼앗긴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는 국토을 자축(自縮)하려는 무리들의 망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왕[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좌장(左將) 진무(眞武)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고구려왕 담덕[談德: 호태왕]이 친히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패수는 본래 열하성에 있었으나 여기서는 대동강인 듯함] 위에 진을 치고 항전했으므로 아군(백제군)은 대패하고 8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추팔월왕명좌장진무등(秋八月王命左將眞武等) 벌고구려려왕담덕친수병칠천진어패수지상거전아군대패사자팔천인(伐高句麗麗王談德親帥兵七千陳於浿水之上拒戰我軍大敗死者八千人)--백제본기(百濟本紀), 아신왕편(阿莘王篇)>>」

하니 이는 진사왕의 뒤를 이은 아신왕이 실지(失地)를 회복하려고 패수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음을 말한 것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新溪郡)이「본래는 백제의 사소올(沙所兀)이었는데 아신왕 때 고구려에 빼앗겼다.=<<본백제사소올아신왕시위고구려소취-신계군연혁(本百濟沙所兀阿莘王時爲高句麗所取-新溪郡沿革)>>」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미루어 살펴본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 아신왕 이후부터 비로소 예성강(禮成江)으로 한정되었던 것이다. 또 <대동지지>에 황해도 재령군(載寧郡)의 연혁(沿革)을 이르기를:

「고구려에서 한홀(漢忽) 또는 내홀(乃忽)로 칭했으며 뒷날 한성(漢城)으로 고쳐 부르다가 […] 고려 고종(高宗) 때 재령현(載寧縣)을 설치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고구려한홀일운내홀후개한성신라경덕왕십육년개중반군령승산궐구가화영령예한주고려태조이십삼년개안주성종십삼년치방어사현종구년폐속안서부예종원년치감무고종승재령현령-재령군연혁(本高句麗漢忽一云乃忽後改漢城新羅景德王十六年改重盤郡領升山闕口嘉禾永寧
漢州高麗太祖二十三年改安州成宗十三年置防禦使顯宗九年廢屬安西府睿宗元年置監務高宗陞載寧縣令-載寧郡沿革>>」

하니 이는 아마도 호태왕이 공취한 후로 칭해졌던 지명인 듯하며, 우리말에 '나(我)'라는 말이 '내'와 같으므로 '아리'는 내홀(乃忽)에서 전음된 말인 듯하다. 때문에 호태왕이 건넜다는 아리수(阿利水)는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대동강 하류와 합류되는 재령강(載寧江)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백제 진사왕] 8년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石峴)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팔년[…]추칠월고구려왕담덕수병사만래공북비함석현등십여성-백제본기(八年[…]秋七月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來攻北陷石峴等十餘城-百濟本紀)>>」하였는데 호태왕의 비문에는 58개 성을 공취한 사실과 성의 이름까지 새겼다. 당시에 58개 성이면 수천리에 달하는 영토인데 그 58개의 성이 과연 어디에 있었다고 해야할 것인가? 이에서 지금 학자들이 그저 막연하게 58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며,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최근에 이병도(李丙) 박사와 같은 이는 고산자(古山子)께서 평생동안 정력을 기울여 이루어놓은 <대동지지>의 역사고증, 지리고증 등을 보잘것없고 고루하다고 평가했으니 그야말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말이라 하겠다.

근래 중국의 학자들인 영희(榮禧) 선생과 문숭일(文崇一) 선생 등은 호태왕비(碑)의 석문(釋文)에 아리수를 아피수(阿被水)라 하였는데 이는 패수(浿水)와 아주 가까운 말이다. 또 <삼국사기>에 백제의 10여 성을 호태왕이 함락시켰다고만 기록된 것은, 김부식(金富軾)이 압록강 이북에 있었던 백제의 40여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이므로, 당시 백제의 40여 성은 요동(遼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임나(任那) 변정(辨正)>>]

호태왕 비문에 있는 「<고구려군이>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른즉 성은 즉시 귀복(歸服)하였다<<래배후급추지임나가라종발성성즉귀복(來背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하는 구절로써 근래의 일본 학자들은 당시에 왜(倭)가 이땅의 남쪽에 임나 일본부를 설치하여 통치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허나 비문의 참뜻은
왜가 관군의 위세에 지탱할 수 없어서 성을 비워주고 물러갔다는 말이지 결코 장기간 통치했다는 뜻이 아니다. 바로 왜가 기해년에 임나가라의 졸발성을 점령했다가 이듬해인 경자년에 고구려 관군에게 쫓겨간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호태왕이 신라를 구원해준 때는 지금으로부터 일천 오백 년 전인 신라 내물 이사금[奈勿 尼師今: 이사금은 당시 임금의 호칭임] 때에 해당되며 왜가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는 그 뒤로 3백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러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인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10년에 비로소 있었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12월에 조에 이르기를: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쳤는데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해가 뜨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렇게 이름한다"하였다.

<<왜국경호일본자언근일소출이위명(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爲名)>>」

이러한 기록만 보아도 임나 일본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땅의 남부에 있었던 가락국(駕洛國)의 신화를 기록하여 본다.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더니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의 9간이 있어 이들 추장이 백성을 거느리니 무릇 1백호에 7만 5천 사람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산과 들에 도읍하여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더니, 후한(後漢) 세조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
禊浴日: 목욕하고 신(神)께 치성드리는 날]에 그곳 북쪽 구지[龜旨: 거북이 봉, 산봉우리의 이름]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2, 3백의 대중이 이곳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는 나는 듯하나 그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만 내러 가로되, "여기에 사람이 있는냐?"하므로 9간 등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여기 있다"하였다. 또 가로되, "여기가 어디인가?"하여, 대답하되 "거북이봉이라"하였다.

이에 또 이르기를: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여 임금이 되라'하였으므로 이곳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위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하고 뛰면서 춤을 추면 이에 대왕을 맞이하여 환희용양(歡喜踊躍)할 것이다."

9간 등이 그 말과 같이 하며 다 기뻐하여 가무(歌舞)하다가 조금 후에 우러러보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닿는지라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폭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 알(卵)이 여섯 개 있는데 해와 같이 둥글었으므로 뭇사람들이 다같이 경희(驚喜)하여 백배(百拜)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싸서 아도(我刀)의 집으로 돌아와 탑(榻)위에 두고 그 무리들이 각각 흩어졌다. 열두시를 지나 이튿날 평명(平明)에 뭇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화(化)하여 동자(童子)가 되었는데 용모가 심히 위대했으므로 상(床)에 앉히고 무리들이 배하(拜賀)하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나날이 자라서 십여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 되는 것은 은(殷)의 천을[天乙: 탕임금]과 같았고 그 얼굴이 용과 같음은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으며 눈썹의 팔채(八彩)는 당고[唐高: 요임금]와 같고 눈에 동자가 둘 씩 있음은 우순(虞舜)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즉위하였으니 처음으로 나타났다 하여 휘호(諱號)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 수릉은 붕한 후의 호이다]이라하였으며, 나라를 대가락(大駕洛)이하 칭하고 또는 가야국(伽耶國)으로도 칭했으니 곧 여섯 가야의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동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은 창해(蒼海),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으로써 경계하고 남(南)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가궁(假宮)을 짓게 하여 입어(入御)하였으나 질박하고 검소하여 모자[茅茨: 띠풀로써 지붕을 인 집]를 자르지 않고
토계[土階: 흙으로된 계단]는 겨우 3척※※이었다. 즉위한 2년 계유 춘정월에 왕이 가라사대, "짐이 서울을 정하고자 한다"하였다.

'모자를 자르지 않는다(茅茨不剪)'함은 띠풀로써 지붕을 이고는 그 끝을 잘라 가지런히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니 전혀 치장을 하지 않는 검소한 모양을 말한 것이다.

※※
토계(土階), 즉 흙으로 된 계단이 겨우 석 자로 높지 않다는 것으로, 위엄을 내세우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게 처신했음을 말한다.

인하여 가궁(假宮)의 남쪽 신답평[新畓坪: 이는 고래(古來)의 폐전(閉田)인데 새로 경작한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요, 답(畓)은 속자(俗字)다]에 행[幸: 임금이 행차함]하여 사방으로 산악을 바라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가라사대, "이 땅이 요엽[蓼葉: 긴 풀잎]과 같이 협소(狹小)하나 산천이 수이(秀異)하여 가히 십륙나한(十六羅漢)의 주지(住地)도 될 만하거늘 하물며 일(一)에서 삼(三)을 이루고 삼(三)에서 칠(七)을 이루는 칠성(七聖)의 주지(住地)가 진실로 이에 적합하니 강토(彊土)를 개척하면 마침내는 진실로 좋을 것인저"하고 주위 일천 오백 보의 나성(羅城)과 궁궐(宮闕), 전당(殿堂)과 여러 청사(廳舍)와 무고[武庫: 혹(或) 무호(武虎)]와 창늠(倉
)의 건축할 장소를 정한 뒤에 환궁하였다. 널리 국내의 장정, 인부와 공장(工匠)들을 동원하여 그달 20일에 금양(金陽)에서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필역(畢役)하였으나,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農閑期)를 기다려 건축하니 그해 10월에 시작하여 갑진 2월에 낙성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신궁(新宮)에 어(御)하사 만기(萬機)를 다스리고 서무에 은근하였다. …건무 24년 무신 7월 27일에 9간 등이 조알(朝謁)할 때 헌언(獻言)하기를,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신(臣)등이 뭇처녀들 중에서 절호(絶好)한 자를 궁중에 뽑아들여 배필을 삼게하소서"하였다. 왕이 가라사대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라 짐의 배필로 후(后)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령이니 경(卿)들은 염려치 말라"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첩은 연하국(輦下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향하여 다가오는 배가 있었다. 유천(留天)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드니 앞을 다투어 배에서 사람들이 내려 달여왔다. 신귀(神鬼)가 이를 바라보고 대궐로 달여와서 아뢰니 왕께서 듣고 기뻐하였다. 이에 9간 등을 보내어 귀빈을 모시는 배와 수레인 난요(蘭橈)와 계즙(桂楫)을 갖추어 맞이하여 모시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려 함에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로 더불어 본래 알지 못하는 터에 어찌 감히 경솔히 따라서 가겠느뇨"하였다.

이 말을 듣고 유천 등이 돌아와 왕후의 그 말을 전달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유사(有司)를 거느리고 궐하(闕下)에서 서남쪽 60보 쯤 되는 산변(山邊)에 만전(
幔殿)을 베풀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진(別浦津) 머리에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령(山靈)께 바쳤다. 그곳(자기나라)에서 시종(侍從)하여 온 잉신[臣: 측근에서 모시는 신하]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요, 그 아내 두 사람이 이름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며, 혹은 노비(奴婢)까지 아울러 20여 명이라 하는데, 싸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綾羅), 의상필단(衣裳疋段), 금은주옥(金銀珠玉), 경구완기(瓊玖玩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왕후가 점점 행재소(行在所) 가까이 오매 왕이 나아가 맞이하여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가니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의 부처(夫妻)를 인도하도록 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각각 한 방 씩 주어 편안히 거처하게 하였으며, 그 이하 노비들은 한방에 5, 6명 씩 두어 난액혜서[蘭液蕙: 향기로운 음식과 좋은 술]을 먹도록 주며, 문인채천[文茵彩薦: 아름다운 이불과 요]으로 자게하고, 의복, 필단, 보화(衣服疋段寶貨)의 종류에 이르러서는 군인들을 많이 모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더불어 함께 침전(寢殿)에 드셨는데 왕후가 왕께 조용히 말하기를, "첩은 본시 아유타국[阿踰國: 인도 중부의 아이오디아]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씨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父王)이 황후(皇后)와 더불어 첩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의 상제(上帝)를 뵈오니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가락국(駕洛國)의 원군(元君)인 수로(首露)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등극(登極)하게 하였으니 신(神)스럽고 성(聖)스러운 이는 오직 그 사람이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매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경(卿)등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하라 하시고는,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오히려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부모를 작별하고 그 곳으로 가라'하셨으므로, 첩은 바다에 배를 타고 멀리가서 증조[蒸棗: 쪄서 말린 신선이 먹는 대추 즉 선과(仙果)]를 구하고 하늘에 가서 반도[蟠桃: 3천 년 만에 한 번씩 열매가 열린다는 선도(仙桃)]를 얻어 진수[螓首: 여인의 아름다운 이마]로 감히 외람되게 용안(龍顔)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께서 가로대:

"짐(朕)이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 먼저 공주가 먼 곳으로부터 올 것을 알고 신하들이 납비(納妃)하라는 청을 듣지 않았더니 지금에 현숙(賢淑)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의 다행이다."

드디어 합환(合歡)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드디어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낼새, 뱃사공 모두 50여 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만성보(萬姓譜)>>에 이르기를: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 하늘에서 금합(金盒) 속에 여섯 개의 알을 내려보낸 기이한 일이 있었고 그 알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수로(首露)라 칭했으며 그 알이 금란(金卵)이었으므로 김(金)씨라 칭하고 국호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다. 왕비 허씨는 남천축국(南天竺國) 왕의 딸이었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오매 맞이하여 황후로 삼아 아들 아홉을 낳았는데 두 아들은 어머니의 성(姓)을 따랐으니, 지금의 김해(金海) 김씨와 김해 허(許)씨는 다 수로왕의 후예이다.

<<신라유리시유합란지이이기수출서물고칭수로금란고칭김씨호대가락수로왕비허씨남천축국왕녀부해이지영립위후생구자이이자종모성금김해지금김해지허개수로왕지예(新羅儒理時有盒卵之異以其首出
物故稱首露金卵故稱金氏號大駕洛首露王妃許氏南天竺國王女浮海而至迎立爲后生九子而二子從母姓今金海之金金海之許皆首露王之裔)>>」  

고구려의 호태왕이 경자년에 신라를 구원한 전역(戰役)을 가락국의 역대로 보면 수로왕의 7대손인 질지왕(
銍知王) 10년에 해당된다. 또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말한다.

「질지왕을 금질왕(金
王)이라고도 하는데 원가[元嘉: 후한 환제(桓帝)의 연호] 28년에 즉위하여, 그 이듬해 세조[世祖: 수로왕]와 허황옥(許黃玉) 왕후를 위하여 처음에 세조와 허황후가 합어(合御)한 곳에 명복(冥福)을 봉자(奉資)하는 절을 세우고 절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으며, 절에 밭(田) 10결(結)을 주어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질지왕은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영명[永明: 남북조시대 제(齊)나라 무제 연호] 10년 임신 10월 4일에 붕(崩)하였다.

<<질지왕일운금지왕원가이십팔년즉위명년위세조허황옥왕후봉자명복어초여세조합어지지창사왈왕후사납전십결충지치사십이년영명십년임신십월사일붕(
銍知王一云金王元嘉二十八年卽位明年爲世祖許黃玉王后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曰王后寺納田十結充之治四十二年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질지왕의 뒤를 이은 겸지왕(鉗知王)은 질지왕의 아들로서 영명(永明) 10년에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정광[正光: 남북조시대 위(魏)의 효명제(孝明帝) 연호] 2년 신축 4월 7일에 붕하였다. 그 아들 구형왕(仇衡王)이 뒤를 이어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보정[保正: 남북조때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연호] 2년 임오 9월에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구형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맞이하여 싸웠으나 신라 군사는 많고 아군은 적었으므로 대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 상손 졸지공(上孫卒支公) 등을 보내어 신라에 항복하니 역년이 490년이었다(혹은 520년으로 전함).

대저 가락국의 신화에 나오는 구지[龜旨: 거북이봉]와 구가(龜歌) 등을 살펴본다면
가야연맹 부족들은 거북이를 위령(威靈)으로 숭상했던 맥족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지금 우리가 옛 비(碑)의 받침돌을 보면 거북이가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 무거운 비석이 세워져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신라에서 가락국을 멸하고 가야연맹 부족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가야에서 숭상했던 거북이 위령을 학대(虐待)한데서 연유된 듯하다. 대개 옛날 토템사회에서는 전승(戰勝)한 나라에서 패전국의 토템물을 학대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혹은 미리 제거(除去)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한 예로는 유계[劉季: 한(漢)나라의 고제(高帝) 유방]가 진(秦) 나라의 위령(威靈)인 백제자[白帝子: 백제(白帝)의 아들이 화(化)하여 된 뱀]라는 큰 뱀을 한칼에 죽이고 천하를 쟁취하려는 큰 뜻을 품은 것과 근래에 일본이 한일합병 후 호랑이가 조선의 위령물이라 하여 일본 전역의 포수(砲手)를 동원하여 호랑이 사냥을 했던 일 등이니, 이는 바로 적국이나 패전국의 백성을 학대하는 것에 비하여 월등한 효력이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패전국의 백성 한 사람을 학살하는 것은 그 한 사람을 죽이는데 불과하지만, 그 민족이 숭상하는 위령물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것은 그 민족 전체의 생명력을 상실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신라에서 가야국을 통합한 후, 가여연맹의 위령을 학대하기 위하여 풍속화된 비석의 받침돌이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거늘 그 당시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던 왜(倭)가 한반도의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200여 년 동안 통치했다는 말은 지나친 광언(狂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타국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歪曲)한 것은 우리가 역사에 밝지 못했던 허물과 큰 세력에 부착하기 좋아했던 일부 곡필문사(曲筆文士)들의 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성보(萬姓譜)>>에 이르기를: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仇衡王)의 아들 무력(武力)이 신라에서 각간(角干) 벼슬을 했고 무력의 아들 서현(舒玄)이 잡간(
干) 벼슬을 했으며 서현의 아들이 김유신(金庚信)인데 신라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이 되어 서발한(舒發翰) 벼슬을 했고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구형왕자무력신라각간무력자서현잡간서현자경신위신라통합삼한공신배서발한향서원(仇衡王子武力新羅角干武力子舒玄
干舒玄子庚信爲新羅統合三韓功臣拜舒發翰享書院)>>」

또, 김해 김씨 세보(世譜)에 대개 김유신을 중시조로 기록하여 김해(金海)의 중간 뿌리가 다 김유신으로 되어 있다. 대저 수로왕의 동생들이 다스렸던 다섯 가야국에서도 김씨의 후예가 번창했을 것이며, 수로왕의 아들인 거등왕(居登王)의 형제가 무릇 아홉 사람있었고 그중에 두 사람이 허씨가 되었다 하나, 일곱 형제의 후예가 5백여년 동안 번창했으면 그 숫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곡필문사들의 부착으로 인하여 이들이 모두 김유신의 후예가 된 듯하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이르기를:

「37대 혜공왕(惠恭王) 때 대력[大曆: 당나라의 대종(代宗) 연호] 14년 기미 4월에 문득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장군의 모습과 같았으며,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자 40여 명이 그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竹現陵: 미추왕의 무덤]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능 속이 진동하며 곡(哭)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말에 이르되, "신(臣)은 평생에 난국(難國)을 구제하고 삼한을 통합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란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臣)의 자손이 죄없이 주살(誅殺) 당했으니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저의 공렬(功烈)을 생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臣)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으려하니 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소서"하였다.

미추왕(未鄒王)이 대답하기를: "나와 공이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떠하겠는가? 공은 다시 그전처럼 노력해주오." 김유신이 세 번이나 청하여도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에 돌아갔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공신(工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어 김공 즉 김유신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김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하였다.

<<삼십칠세혜공왕대대력십사년기미사월홀유선풍종유신공총기중유일인승준마여장군의상역유의갑기복자사십허인수종이래입어죽현릉아이릉중사유진동곡읍성혹여고소지음기언왈신평생유보시구난광합지공금위혼백진호방국양재구환지심잠무투개왕자경술년신지자손무죄피주군신불념아지공렬신욕원이타소불목노근원왕윤지왕답왈유아여공불호차방기여민서하공복노력여전삼청불허풍내환왕문지구내유공신김경신취금공릉사과언위공립공덕보전삼십결우취선사이자명복(三十七世惠恭王代大曆十四年己未四月忽有旋風從庾信公塚起中有一人乘駿馬如將軍儀狀亦有衣甲器伏者四十許人隨從而來入於竹現陵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或如告訴之音其言曰臣平生有輔時救難匡合之功今爲魂魄鎭護邦國攘災救患之心暫無
改往者庚戌年臣之子孫無罪被誅君臣不念我之功烈臣欲遠移他所不復勞勤願王允之王答曰惟我與公不護此邦其如民庶何公復努力如前三請不許風乃還王聞之懼乃遺工臣金敬信就金公陵謝過焉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以資冥福)>>」

인하여 경술년에 김유신의 자손들이 주살(誅殺)당했다는 사실을 상고해 본다면 혜공왕 4년 쯤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이르기를:

「4년 7월에 일길찬[一吉
: 관직의 이름] 대공(大恭)이 그 아우 아찬[阿: 관작 이름] 대련(大廉)과 더불어 모반하여 많은 무리를 모아 왕궁을 33일이나 포위하였다. 왕군은 이를 토평하고 그의 구족(九族)을 주살하였다.

<<사년추칠월일길찬대공여제아찬대렴반집중위왕궁삼십삼일왕군토평지주구족(四年秋七月一吉
大恭與弟阿大廉叛集衆圍王宮三十三日王軍討平之誅九族)>>」

한편, <<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그해 7월 3일에 각간(角干) 대공의 적도(賊徒)가 일어나고 왕도(王都)와 오도(五道) 주군(州郡)의 도합 96각간이 서로 싸워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각간의 집이 멸망하니 그 집과 재산과 보물 비단 등을 왕궁으로 옮겼다.

<<칠월삼일대공각간적기왕도급오도주군병구십육각간상전대란대공각간가망수기가자보백우왕궁(七月三日大恭角干賊起王都及五道州郡幷九十六角干相戰大亂大恭角干家亡輸其家資寶帛于王宮)>>」

하였으니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혜공왕이 9세에 왕위에 오른 4년 후의 일이므로 혜공왕의 나이 겨우 열 두 살 때의 일인지라, 이러한 정변(政變)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며 따라서 역사에 정의(正義)와 불의가 밝혀지지 않은 점도 있었을 것이니, 김유신의 혼령(魂靈)이 미추왕의 혼령에게 호소한 바의, 당시 임금과 신하들이 그의 공렬을 생각해주지 않았다는 말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인해서 고인(古人)들이 이른 바 무인(武人)의 후예가 번창하지 못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겠다. 다만 김유신의 자손이, 9족이 멸한 대곡각간의 집과 밀접한 관계인 듯하나 그가 김유신의 후손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 골품제도(骨品制度)로 미루어보면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로 김해 김씨 세보(世譜)에 김유신이 중시조가 되어 대개의 김해(金海)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은 심히 의심스러운 바이다. 농초가 <신라고지(新羅古誌)>라는 책을 직접 얻어 보지 못하였으나 <만성보(萬姓譜)>에 그 일부 내용들을 인용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거기에 이르기를,

김알지(金
智)는 금관국(金冠國) 수로왕의 후예이며 수로왕은 바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

<<신라고지왈김알지내금관국수로지후수로내소호금천씨지후고성김언-<만성통보>(新羅古誌曰金
智乃金冠國首露之後首露乃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焉-<萬姓通譜>)>>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이 가장 바름을 얻은 것이다.

소호금천씨는 임검론에서 밝힌 바와같이 우리 맥족인 봉씨족(鳳氏族)의 조상이었으며 동이(東夷)의 군장으로서 중국의 곰족들을 서중국으로 몰아냈고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던 신성(神聖)이었으니 철기 제작에 능한 그 후예들이 철이 나는 진한(辰韓)의 남쪽에 흘러들어와 철기문화를 일으켰으므로 거북이를 위령으로 받드는 토착민들이 이들을 왕으로 모신 듯하다.

<<삼국지(
三國志)>> <진한(辰韓)>편에 이른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당하며 누에를 기르고 비단과 면포를 짜 입으며 소와 말을 길들여 타고 수레를 사용할 줄 안다. 혼인에는 예속(禮俗)을 지키고 남녀가 분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써 죽은 이를 보내니 그 뜻은 죽은 자의 혼(魂)으로 하여금 하늘에 올라가라는 뜻이다. 나라에서 철(鐵)이 나는데 한(韓)과 예(濊)와 왜(倭)도 다 여기에서 취하여 간다. 모든 저자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데 모두 철로써 하는 것이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그 철이 이군[二郡: 낙랑, 대방]에도 공급된다.

<<토지비미의종오곡급도효잠상작겸포승가우마가취예속남녀유별이대도우송사기의욕사자비양국출철한예왜개종취지제시고개용철여중국지용철우이공급이군-<삼국지) <동이전>(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
布乘駕牛馬嫁娶禮俗男女有別以大島羽送死其意欲死者飛揚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賈皆用鐵如中國之用鐵又以供給二郡-<三國志) <東夷傳>)>>」

<가락국기>의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을 내려보냈다는 말은 금천씨 후예들이 도래(到來)하였다는 것의 와전(訛傳)인 듯하며 동이의 봉씨족에서 분화한 난생설(卵生說)인 듯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큰 새의 깃털로써 죽은 이를 보낸다(以大鳥羽送死)」는 말을 생각해보면 육가야의 시조들이 봉씨족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던 김해(金海), 창원(昌原) 지방은 수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철기를 제작하는 곳으로 계승되어오고 있다. 김유신의 비(碑)에 그의 세계(世系)를 새겨 말하기를「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少昊)의 자손이다<<김유신비왈헌원지윤소호지윤야(金庾信碑曰軒轅之裔少昊之胤也)>>」했는데 김유신이 봉씨족의 소호금천씨의 자손이라는 말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곰족의 수령이었던 헌원의 후예라는 말은 크나큰 오류(誤謬)를 범한 것이다. 지금의 김씨, 허씨는 중국의 곰족들을 화산(華山)쪽으로 몰아내고 구이족(九夷族)의 실지(失地)를 회복했었던 거룩한 신성(神聖) 금천시의 후예일진대, 어찌 당군(唐軍)을 불러들여 동이인(東夷人)의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고 단황(檀皇)의 유풍(遺風)을 없애 버린 김유신의 후예로 되어있단 말인가? 이같이 근본을 망각한 무필(誣筆)로 말미암아 우리의 대성(大姓)인 김씨들이 선대의 봉씨족과 가야왕족을 생각치 않고 다만 김유신의 후예가 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김유신의 사대정신이 타성(他姓)에까지 이어져온 것이며 중국에서는 이러한 우리를 능멸하여 지껄이기를, '너희가 옛 요동(遼東) 땅을 회복하려고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를 기르지 않나뇨?'하면 우리 조정에서는 변무사(辨誣使)를 보내어 요동은 본래부터 우리 땅이 아니었다고 꾸며대고 충순함을 보이기 위하여 문(文)을 장려하고 무(武)를 천시(賤視)하여 곡필하는 자는 창성하고 활로써 정신과 자세를 바로 잡는 동이의 대무정신(大武精神)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일본은 이렇게 허술한 우리나라를 노략질해 갔고 근래에는 호태왕의 비문까지 왜곡하여 가야국 때 그들이 이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니 곡필문사의 죄가 어찌 가볍다 하겠는가?

※ 참고로 고산자(古山子)의 <대동지지(
大東地志)>에 기록된 다섯 가야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가야국(大加耶國): 시조(始祖)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무릇 16대에 역년이 520년이었다. 신라 진흥황 23년에 이를 멸하고 대가야군(大加耶郡)을 설치했으니 지금의 고령군(高靈郡)이다.

소가야국(小加耶國), 일운, 고자국(一云, 固自國): 신라 지증왕(智證王) 6년에 김이사부(金異斯夫)를 보내 그 땅을 취하니 지금의 고성현(古城縣)이다.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 신라에서 그 땅을 취하여 군(郡)을 삼으니 지금의 함창군(咸昌郡)이다.

아나가야국(阿那加耶國), 일운, 아시량국(一云, 阿梁國): 신라 법흥왕(法興王) 25년에 멸망했으니 지금의 함안군(咸安郡)이다.

벽진가야국(碧珍加耶國), 일운, 성산가야(一云, 星山加耶): 신라에서 취했으니 지금의 성주(星州)다.>>]


3-<2008-7-7-JDM 중국 길림성 집안시 방문 직접 촬영>:
[<<
중국 왕건군(王健群) 탁본(拓本)-1984년


[<<第一面>>]


[<<第二面>>]


[<<第三面>>]


[<<第四面>>]


[<<第一~二面>>]

[<<第三~四面>>]
>>]

4-<2008-7-7-JDM 중국 길림성 집안시 방문 직접 촬영>:
[<<
일본 주내경신(酒景信=さかゎかげのぶ=사카와카게노부) 탁본(拓本)-1883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은 1883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사카와카게노부(さかゎかげのぶ=酒景信) 중위가 탁본하였다.






>>]

5-<>:
[<<>>]

[<<광개토대왕비와 관련된 유튜브 동영상 감상>>]


1,
영상한국사 ㅣ 068 광개토대왕비 1,700자는 무슨 내용을 담았나 / KBS 2019. 7. 19.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m 39cm, 4면에 새겨진 글자 1,700여 자에 달하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 가운데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기록, 마지막 부분은 묘를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비에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쓰여 있다. 여기서 '국강상'은 광개토대왕이 묻힌 언덕 이름을, '광개토경'은 땅을 넓혔다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평안'은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다스렸다는 뜻을 담고 있다.


≫≫
https://youtu.be/Bm96Ixw0hb0

2,
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다. 광개토대왕비 / KBS 2005.7.1 방송

최초 공개: 2020. 12. 16. - 광개토대왕의 유언과 330호의 수묘인

기록에 의하면 당시엔 도굴이 성행해 왕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도록 숨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도 광개토대왕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비석을 세워 자신의 묘를 알리고 지키도록 했다. 광개토대왕이 무덤이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거대한 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비문엔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여 선조왕의 왕릉을 지키기 위함이라 기록하고 있다. 330가구라는 엄청난 규모. 거기다 모두가 요동, 한강지역의 정복지 출신의 새로 편입된 백성들로 구성된 수묘인...그는 왜 왕릉을 지키는 중대한 사업을 정복지역출신의 사람들에게 맡겼을까?

- 고구려군과 로마군의 전력 가상 비교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이 정열적으로 수행했던 숱한 정복전쟁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중국 시라무렌강에서 한반도 남단 종발성에까지 이르는 광개토대왕의 대제국..

끊임없는 영토확장의 뒤에는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당대 최고의 군대가 있었다. 고구려군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가상 전쟁상황실에서 재현해보는 최강군대 로마병사와의 무기류 등의 전력비교 결과는 어떠했을까? 더불어 천하의 중심이라는 신념하에 동서남북 전방으로 뻗어나간 고구려군의 진격루트를 추적해본다.

- 제국 고구려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라!

광개토대왕비에는 국가체제정비와 영토확장이라는 국가적 과제와 다양한 종족과 문화의 통합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던 고구려의 모습이 담겨있다.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직접 통치하기보다 제후국으로 거느렸던 고구려! 또한 그 복속민들을 왕릉 수묘인으로 지정해 점차 고구려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포용력과 자신감!

제국 고구려의 천하관과 국가통합시스템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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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OBM6fghNOU

3,
[KBS 역사저널 그날] 비밀의 문, 광개토대왕릉비ㅣ KBS 210413 방송

2021. 4. 14. [308회 그날 클립영상] 비밀의 문, 광개토대왕릉비

#역사저널그날 308회 "고구려 동아시아의 전설이 되다 - 제1편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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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u08pnybPP0

4,
"이끼와 흙 벗겨보니"...그 돌은 제2의 광개토대왕비였다 / 2021. 3. 15.

1979년 2월24일 충주의 향토 답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이 마을 입구에 서있던 입석을 살피자 이상한 글자들이 보였다. 한반도에서 제2의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충주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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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olJNqNZeHI

5,
광개토대왕비에 나와있는 신묘년 기사에 대한 논란 / 2021. 7. 10.

≫≫
https://youtu.be/AjE2H235JA0

6,
414년, 최대의 석비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역사 차이나는 도올 12회 / 2016. 5. 22.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

여기에 주몽의 건국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역사가 여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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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A5B2Jek5Tg

7,
[광개토대왕 특집2] 동방의 알렉산더? 아니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다. / 2020.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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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THew943LKI

8,
광개토대왕 비문 첫 번째이야기 / 2020. 12. 21.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적힌 지명,인물들의 이름을 분석해 봅니다.

# 김정민박사#광개토대왕비문# 우리역사바로알기#광개토대왕 비문의 실체# 광대토대왕비문의 몽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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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1xW5hEO1mM

9,
이게 교과서? 일본의 한국사 왜곡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 2019. 12. 4.

#어쩌다어른 #설민석 #한국사

▶RE:VIEW 다시보는 tvN 인사이트◀

0:58 →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마저 왜곡한 일본
7:42 → 장수왕의 이름, 괜히 '장수'왕이 아니랍니다
10:32 → 고구려에서 본받았으면 하는 백년지대계


≫≫
https://youtu.be/LY_1ozsl2zc

10, 고구려 최대의 난제! 광개토대왕릉비 해석 정답은 이거다! / 2020. 7. 5.

고구려 최대의 난제! 광개토대왕릉비 해석 정답은 이거다!


≫≫
https://youtu.be/70GfXltsPTM

11, 백두산 약초관찰여행 91부 사진 감상하기

≫≫ http://jdm0777.com/jdm/yakchosanhang-91.htm

12, 백두산 약초관찰여행 92부 사진 감상하기

≫≫ http://jdm0777.com/jdm/yakchosanhang-92.htm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공적과 덕이 뛰어나신 분이시
다.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의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서, 세상에서 모두 위대한 황제라고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하게 하셨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을 타고 나라의 여러 곳을 살피시다 마리산에 이르셨다. 황제께서는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셨는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
다.

광개토대황은 고구려의 19대 태왕이시다. 재위 391~413년이며, 배달, 단군조선 시대의 방대했던 영토와 신교 문화를 부흥시켜 회복한다는, 고구려의 기본 이념인 다물주의를 완성한 위대한 황제이다. 거란, 평량(감숙성), 후연, 백제, 신라, 왜(일본) 등 동북아 국가를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복속시켰다.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일본 전역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신교 문화로 통일한 단군 이래 유일한 대제왕이다.

상기 자료는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좀더 정확한 역사를 공부하고 받아들여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실천하며 미래의 역사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전진함으로 후대에 더욱 발전된 사회가 육성되고 역사 정보를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도록 정보를 공개하여 모두가 평화롭고 안락함 가운데 무병장수하며 진정으로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글/ 약초연구가 & 동아대 & 신라대 대체의학 외래교수 전동명)

문의 및 연락처: 010-2545-0777 ; 051-464-0307

홈주소: http://jdm0777.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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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jdm0777@naver.com


 

 

아래의 내용도 함께 참조해 보시고 지나간 역사를 읽고 묵상함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1. 고조선(古朝鮮) 왕검 조선(王儉 朝鮮) 무엇인가?
  2. 광개토대왕비 무엇인가?
  3. 백학과 동래 온천 무엇인가?
  4. 대한민국 의료역사 무엇인가?
  5. 선 바위에 깔린 중과 처녀 무엇인가?
  6. 해금강(海金剛)의 선남선녀 무엇인가?
  7.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무엇인가?
  8. 동의보감 무엇인가?
  9. 사고전서 무엇인가?
  10. 막걸리 무엇인가?
  11. 수세보원 무엇인가?
  12. 의방류취 무엇인가?
  13. 모반 양반과 사냥꾼 무엇인가?
  14. 조선부(朝鮮賦) 무엇인가?
  15. 백록담 무엇인가?
  16. 오백장군 무엇인가? 
  17. 중국의학대계 무엇인가?
  18. 한국의학대계 무엇인가?
  19. 용머리 바위 무엇인가?
  20. 서복과 불사약 무엇인가?
  21. 삼성혈 무엇인가?
  22. 제주도 식물 무엇인가?
  23. 주천석과 만산장 무엇인가?
  24. 향약구급방 무엇인가?
  25. 강선대(降仙臺) 무엇인가?
  26. 호종단과 차귀섬 무엇인가?
  27. 할으방당과 할망당 무엇인가?
  28. 천하장사 오찰방 무엇인가?
  29. 흥부와 놀부 무엇인가?

 

 

※ 아래에 jdm 필자가 2008년 7월 4일 금요일 ~ 7월 9일 수요일까지 5박 6일 동안 <백두산 생태계 답사-고구려 유적지 답사-압록강 답사>를 찍은 기념 사진도 감상해 보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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