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강(海金剛)의 선남 선녀 무엇인가?

진시황의 명을 받고 선남 선녀를 이끌고 정착한 거제도 해금강

 

 

 

 

 

 

 

 

 

 




 

 

[해금강 바위속의 해동한국(海東漢國)과 서불의 유숙지로 알려진 와현해수욕장 '누우래' 마을,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 진시황의 명을 받고 선남 선녀가 정착하였다는 거제도 해금강 및 서불의 유숙지 와현해수욕장

중국의 도교 신자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시도하면서, 영원한 젊음과 활력을 얻는 데 집착하였는데, 도(道) 곧 자연의 길과 조화되게 살면 여하튼 자연의 비밀에 이르러 신체의 해, 질병, 심지어는 죽음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노자는 그런 것을 중시하지 않았지만, 「도덕경」의 문구는 그런 사상을 암시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제 16장은 이렇게 알려 준다.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영원하다. 몸은 비록 죽더라도, 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장자 역시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였다. 예를 들면, 「장자」의 한 대화편에서 한 신화적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대는 고령인데도 안색이 어린아이와 같구료. 어찌된 일이오?” 나중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는 도를 배웠소.” 또 다른 도교 철학자에 관하여 장자는 이렇게 썼다. “이제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다. 기분 좋게 서늘한 바람을 타고 보름 동안 계속 날아갔다 돌아올 수 있다. 행복을 얻은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은 희귀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도교 신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신체 쇠약과 죽음을 지연시켜 줄 수 있다고 하는 명상, 식사 조절, 호흡 훈련을 시험해 보기 시작하였다. 오래지 않아 구름을 타고 날고, 마음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며, 성스러운 산이나 외딴 섬에서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이슬이나 신비한 과일을 먹고 산다는 신선들에 관한 전설이 돌기 시작하였다. 중국 역사에 따르면 기원전 219년 진(秦) 나라 시황제가 3,000명의 소년 소녀를 일단의 배에 태워 보내서 신선들의 거처인 전설의 봉래 섬을 찾아 불로초를 가져오도록 명했다고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은 비약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전설은 그들이 한국과 일본으로 알려지게 된 섬들에 정착했다고 알려 준다.

중국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에 따르면,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과 더불어 보하이[渤海] 해상에 있었다고 전하며, 세 산을 함께 삼신산(三神山)으로 부르는데, 그곳에 선인(仙人)이 살며 불사(不死)의 영약(靈藥)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 또한 그곳에서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빛깔이 희고, 금, 은으로 지은 궁전이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구름같이 보이며,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물밑에 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배는 바람에 이끌려 도저히 그곳에 다다를 수가 없다고 한다.

남안의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있던 고대국가 제(齊)나라에는 그 삼신산(三神山)을 신앙하여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신앙이 같은 제나라의 사상가 추연(鄒衍)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결부되어 신선사상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고,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서불(徐市)로 하여금 3신산에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을 구해오게 하였다. 한편, 그같은 신선사상을 수반한 봉래산의 호칭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민간신앙과 무속(巫俗) 등에 깊이 침투함으로써 추상 또는 고유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다. 봉래산(
蓬萊山)이 여름의 금강산(金剛山)을 일컫는 호칭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진시황 28년인 기원전 219년에 진시황은 2차로 동쪽의 군현을 순행하였고 태산을 올라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였다. 산기슭의 양보산에서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망제 의식을 지내고 지부산에 올라 비석을 세웠다. 이때부터 불사(不死)에 매달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선약(仙藥)을 구하기 위해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으로 서불과 어린 남녀 아이들 수천 명을 파견하였다.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신선이 되고 싶어한 기록이 매우 많이 보이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예를들어 노생으로 하여금 전설속의 선인인 선문과 고서를 찾도록 시키고, 한종 등에게 불사의 약을 구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진인(眞人)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화가 난 진시황은 분서갱유 때 <서불 등은 엄청난 비용을 쓰고도 약을 구하지 못했다>고 질책을 하였다.

경남 거제시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거제해금강 기암괴석의 거제신선대>가 있다. 아울러 불로불사약을 구하러 온 서불의 흔적이 거제해금강과 와현해수욕장이 그 옛날 서불의 유숙지였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219년에 진시황의 신하인 서불(徐市)이 불로불사약을 구하러 동남동녀 3,000명을 거느리고 남해(南海) 금산(錦山)을 거쳐, 거제 해금강(海金剛)에 이르렀다. 이때 유숙한 곳이 "누우래" 마을이다. "누우래"란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구전되어 왔다. 와현해수욕장 주소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334-1번지에 있다.

서불(徐市)에 관하여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기록되어있고, 그는 이곳에서 제주도 서귀포를 거쳐 일본 복강현팔녀시내( 福岡縣八女市內)로 건너갔다. 지금도 팔녀시(八女市)엔 서불(徐市)의 후손이 살고 있고 팔녀시내정회(八女市內町會)등이 활동하고 있다.

거제도 해금강의 바위에 새겨진 해동한국(
海東漢國)과 동백꽃의 전설에 대해서 박영준의 <한국의 전설> 제 1권 219~223면에서는 진시황의 명을 받고 선남 선녀가 들어와 정착한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금강(海金剛)의 선남 선녀

경상남도(慶尙南道) 거제군(巨濟郡) 해금강(海金剛)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삼백년 전, 중국 천하르 진시황이 다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진시황은 전쟁을 자주했고 그 때마다 항상 승리를 했다. 전생때 포로가 된 군사들은 노예가 되어 혹사당했다. 그들은 진시황을 위해 호화로운 궁전을 짓는 데 사역되었으며 누각과 운하를 파는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시달리면 시달릴 수록 진시황은 영화의 극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진시황의 가슴속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고 허점함이 있었다.

그것은 산해진미로도, 천하 절색으로도 메워지지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공포였다. 진시황은 죽지 않고 오래오래 영화를 누리고 싶은 욕망에 짓눌려서 웬만한 향락으로는 그 괴로움을 잊을 수가 없었으므로 항상 더 짙은 향략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러나 향락에 도취에서 깨어나면 진시황은 더욱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어떻게 죽지 않고 즐거움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 수는 없는가? 신선 동방석이는 삼천 갑자를 살았다는데 나는 왜 안 된단 말인가? 아니, 안 된다면 백 년이라도 좋다. 이대로 백 년만 더 살고 싶다. 이 영화를 두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이냐?>


진시황은 향락의 도취에서 깨어날 때마다 언제나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했다. 그래서 다시 괴로움을 잊기 위해 즐거움을 찾아 탐익하곤 했다.

『여봐라, 풍악을 멈추어라.』

흥겨웁게 계속되는 연회 도중에 진시황은 가끔 발작적으로 소리를 쳐서 연회의 흥을 깨뜨리곤 했다. 그럴 때면 만조 백관들은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런 경우 진시황은 어려운 문제를 꺼내어 아무도 알아 맞히지 못하면 누군가의 목이 달아나게 마련이었다.

취흥이 도도하던 신하들의 얼굴은 금방 창백해지고 긴장했다. 전각안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금시라도 날벼락이 떨이질 듯이 모두들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여봐라!』

언성을 높인 진시황의 호령이 떨어지면

『에이!』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들 중에 짐의 고민을 해결해 줄 자는 없는고?』

신하들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자기 고민에 대해서는 한 마디고 않고 그것을 해결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난문제가 함정처럼 입을 벌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으므로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다들 죽었느냐? 왜 대답이 없느냐?』

『에이---.』

신하들은 넋을 빼앗긴 사람들 같았다. 진시황의 노여움은 더할 뿐이었다.

『아니, 그대들은 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단 말인가? 이 숱한 문무 백관 중에 짐의 고민을 해결해 줄 자가 그래 한 명도 없단 말이냐?』

신하들은 고개를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진시황의 눈꼬리가 치켜 떠졌다.
그 때 병부시랑이 나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신 병부시랑 아뢰옵니다. 신들은 우매하여 폐하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하오니 그 심려를 신들에게 깨우쳐 주시기를 감히 청하옵나이다.』

다른 신하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하오, 병부시랑. 그런데 경은 어떻게 하여 짐의 고충을 덜겠다는 것이오?』

『미거한 목숨을 바쳐 고뇌를 덜어드릴 방책을 강구하겠나이다.』

병부시랑의 등줄기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잘들 들었느냐? 기특하게도 병부시랑이 짐의 고충을 덜어 주겠다니 짐이 그 고충을 털어놓겠다.』

진시황은 전각안을 한 바퀴 휘둘러 보았다.

『짐의 고충은 다른 게 아니노라. 아주 간단한 것이니라. 어찌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니라. 바야흐로 진나라의 권세가 사해를 떨치는데 짐의 명이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한이요. 이 몸의 고충이노라. 병부시랑은 잘 들었는가. 경은 촌각을 지체치 말고 그 방안을 강구해서 대령하렸다.』

병부시랑은 잠시 정신이 아뜩했다. 한 마디의 말이 그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이었다.

『폐하, 전해 내려오는 옛말에 불로초가 있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그것을 먹으면 늙지 않고 병들지 않아 만세를 누릴 수 있다 하옵니다. 그 불로초를 구하여 폐하의 고충을 덜어드릴까 생각하나이다.』

병부시랑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과연 그럴싸하오. 병부시랑의 충성은 가히 짐을 기쁘게 하고도 남음이 있소. 병부시랑은 곧 전국에 방을 붙여 불로초를 구하도록 하오.』

진시황은 당장 희색이 만면하여 잔치의 흥을 돋우었다. 병부시랑은 방을 내 거는 한편, 몸소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불로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허사였다.

진시황의 독촉은 성화같았고, 성질은 날로 포악해 갔다.

『병부시랑, 어떻게 되었느냐? 경은 짐을 속이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냐?』

병부시랑은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전국의 고승과 선인들을 불러서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아 보겠사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고승과 선인이라...... 그것도 그렇구나. 어서 전국의 고승과 선인을 빠짐없이 불러들이도록 하라.』

시각을 다투어 전국의 고승과 선인들은 궁궐로 모여들었다. 진시황은 친히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불로초가 있다는 곳을 물었다.

『그대는 아는가? 불로초가 있는 곳을?』

『폐하, 황공하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 그것은 천리입니다. 어찌 인간으로서 영생불사 하겠사옵니까?』

『너는 도를 닦는 도인이 아닌가? 어찌 영생불사의 도를 모르고서 짐을 속이려 드는가?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

무수한 도인과 고승들이 영생불사이ㅡ 길을 모른다는 이유로 죽어갔다.

죽음이 두려워서 아무렇게나 불로초가 있다는 곳을 댄 사람들도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말한 곳엔 어디에도 불로초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진시황의 머리도 희끗희끗 희어졌으며 얼굴에는 주름살만 늘었다.

진시황은 노쇠해 가는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날을 보냈다.

『폐하, 신 병부시랑 알현하옵니다.』

어느 날, 초조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진시황에게 병부시랑이 알현을 청했다.

『병부시랑, 이제 목숨을 바치겠다는 거냐?』

『황공하옵니다.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안다는 선인을 데리고 왔사옵니다.』

『뭐라구?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안다구? 어서 들라 해라.』

병부시랑은 남루한 차림이 노인을 한 사람 데리고 들어왔다. 진시황의 눈은 당당 노기를 띠며 번들거렸다.

『병부시랑, 경은 짐을 농락하는 건가?』

『폐하, 고정하옵소서.』

병부시랑보다 먼저 선인이 나섰다.

『소인은 삼십 년 동안 영산을 찾아 수도한 몸이옵니다. 산수정기와 지맥에 통달하와 폐하께서 불로초를 구하려 하신다기에 감히 대령하였사옵니다.』

『그대가 불로초를 구해 올 수 있단 말인가?』

『하오나 우리 나라에는 불로초가 없사옵니다. 동방(東方)의 해동국(
海東國) 봉래산(
蓬萊山)에 영기가 서려 그 곳이라면 불로초를 구할 수 있을까 하옵니다.』

『해동국(
海東國) 봉래산(
蓬萊山)이라면?』

『조선(朝鮮)의 금강산(金剛山)을 가리킴이옵니다. 해가 뜨는 곳이오며 만물의 서기가 돋는 곳이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해동국(
海東國) 봉래산(
蓬萊山)의 불로초(不老草)를 구할 수 있단 말이냐?』

진시황은 대뜸 얼굴빛이 밝아지며 물었다.

『폐하, 삼백의 선남 선녀를 가려 백일 동안 목욕 재계하고 공을 드린 다음, 배를 타고 건너가면 불로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병부시랑, 들었는가? 곧 준비하여 빠른 시일내에 떠나도록 하라.』

마침내 백일 기도를 마친 일행은 봉래산을 향해 떠났다. 선인이 거느린 일행이 처름 당도한 곳은 제주도였다. 삼백의 선남 선녀들은 뿔뿔이 흩어져 한라산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불로초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다시 백록담에 뗏목을 띄워 절벽과 물속을 찾았다. 그 곳에도 불로초는 없었다.

선인은 절망에 빠졌다. 영산인 한라산에서도 불로초를 찾을 수 없다면 어디로 가든 헛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인은 일행을 거느리고 다시 배에 올랐다.

그들이 거친 물결과 싸우며 이르른 곳은 남해안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그 곳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선경이 이 세상에 있었다니......。』

선인은 취한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선경에 불로초가 없다면 어디서 불로초를 구할 것이냐. 어서 올라가서 찾아보자.』

그들은 뭍으로 내려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로초를 찾아헤맸으나 어디에도 불로초는 없었다. 불로초를 찾아 헤메는 그들의 눈은 끈 것은 불로초가 아닌, 바위 사이에 샛빨갛게 피어난 동백꽃이었다.

절벽에 피어 있는 동백꽃은 붉게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고 있었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했으니 돌아가 봐야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다. 차라리 이 선경에 나라를 세워 선남 선녀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하리라.>


선인은 마음을 정하고는 절벽에 글자를 새겼다.

『해동한국(
海東漢國)』


한인(漢人)이 해동에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거제도 장승포에서 서남쪽으로 삼 십 리쯤 떨어질 곳에 갈고리 마을이 있다. 그 마을 해금강의 절경에는 보는 이마다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긴 세월 동안 풍상과 파도에 시달리며 장관을 이루고 있는 해금강.

해금강의
중앙 암벽엔 지금도 오랜 세월로 닳아 버린 희미한 네 개의 글자의 흔적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먼 옛날 선인이 암벽에 새겼던
해동한국(海東漢國)이란 네 글자인 것이다.

이런 연고로 남해 사람들에게는 중국인인 선남 선녀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

불로초의 전설에 대해서 박영준의
<한국의 전설> 제 2권 246~248면에서는 진시황제의 총애를 받는 서복이 다녀간 내용과 관련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서복(徐福)과 불사약(不死藥)

제주도(濟州道) 남제주군(南濟州郡) 서귀읍(西歸邑) 서귀리(西歸里) 정방폭포(正房瀑布)

제주도 서귀포 정방 폭포의 바위벽에
<서복과차(徐福過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스스로 황제라 하고 갖은 압정(壓政)을 펴고 수 많은 미희들에게 둘러쌓여 나날을 보냈는데 그도 죽음의 손길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시황의 총신(寵臣) 가운데 서시(徐市=서복)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서시가 넌지시 진언을 하였다.

『황제 폐하, 요즘 폐하의 용안에 웬지 수심이 깃드신 것 같사온데, 어인 연고로 그러하시옵나이까?』

서시가 이렇게 물었으나 진황은

『경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하고, 말했다.

『폐하, 소신의 공연한 근심인 줄 아옵니다, 어인 일인지 폐하의 기력이 전만 못하신 것 같사옵니다. 그리하여 소신이 폐하를 위하여 한 가지 청원을 드려볼까 하옵니다.』

『어디 말해 보라.』

진시황은 자기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이 알기로는 바다 건너 조선국엔 기이한 약초가 난다고 하옵는데, 그 약초는 어떠한 병이라도 물리칠 수가 있으며, 또한 병이 없더라도 그 약을 먹기만 하면 어떠한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그러나.』

『어떠한 병에도 걸리지 않는 약이 있다구?  그런데 어떻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천 년 묵은 고목으로 배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남녀 3000명을 데리고 가야 약초를 캐낼 수가 있다고 하옵니다.』

『흠, 그것이 무엇 어렵겠느냐?  그런데 과연 그 약초를 먹으면 늙지 않고 죽지도 않을까?』

『그렇사옵니다.  삼신산(三神山)에서 나는 불로초(不老草)를 복용하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옵니다.』

『알았노라. 그러면 그대는 곧 출발할 차비를 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서시는 곧 준비에 착수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천 년 묵은 아람들이 고목들을 베어다 석 달 열흘 동안 배를 만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뽑았다.

이윽고 출발 전날 항해의 무사를 비는 큰 제사를 올렸다.  

진시황은 안색이 활짝 펴지고 매우 기뻐했다.

서시는 흐믓해하는 황제를 보고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만약 약초를 구하지 못한다면...... 。>

단순한 체면문제가 이나라 목숨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초를 구해 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폐하, 빠른 시일 안으로 불로초를 구해 오겠사옵니다.』
중국을 떠난 서시는 3000명의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제주도의 조천포에 배를 대었다.

『아, 여기가 조선국의 최남단이며 가장 큰 섬이로다.』

서시는 자못 감개어린 목소리로 일동을 돌아보며 분부했다.

『자, 모두들 배에서 내려서 짝을 지어 불로초를 찾아 내어라!』

3000명의 선남선녀들은 뿔뿔이 헤어져서 불로초를 구하느라고 혈안이 되었다.
이윽고 헤어졌던 남녀들은 각자가 구한 약초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약초는 모두 신선의 열매라고 하는
<암고란(巖高蘭)>이었다. 암고란은 다른 이름으로 <시로미>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이 여러 가지 질병에 특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불로장생의 영약은 아니었다.

서시는 몹시 실망했다. 그러나 어쨌든 좀더 찾아 보아야 할 일이었다.  

『가자, 좀 더 동쪽으로!』

서시는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서귀포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어서 여러 달 동안을 약초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때 우리나라 고유의 산삼이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산삼을 불로초로 오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서복의 전설과 관련하여 이형석(교육학 박사, 한국땅 이름 학회장, 백두문화연구원 대표)의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라는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알려주고 있다.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 땅이름과 문헌, 유적을 중심으로
- 이형석(교육학박사. 한국땅이름학회장, 백두문화연구원 대표)

1. 서 론

이 논문은 제6회 서복문화 동아세아 국제학술대회(2007. 10. 19.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에서 발표한 글을 재수정, 보완, 정리한 것이다.

진시황의 불로초 사자 서복(徐福=徐市)이 2차에 걸쳐 삼신산을 찾은 시기는 우리나라 고조선시기로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삼한(三韓-馬韓, 弁韓, 辰韓) 이전시기이며 아직 부족국가의 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은 무국가의 시기였다. 李弘稙 편저 <국사대사전> 1978. 일중당. p126. 단군조선 건국 년대는 BC 2333(기자조선=한씨조선 BC 1122. 위만조선 BC 194)이며 위만조선의 멸망 시기는 BC 108년이다.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복의 제1차 출발은 B.C. 218년이며 제2차 출발은 B.C. 210년이므로 그 사이는 8년이며 위만조선시대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조선전’에 의하면 BC 2세기 경까지도 한반도 중남부지역은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 기록되었으며,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이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할 때 한강유역을 경계로 남부지역이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때는 청동기시대이며, 이들이 ‘한족’(韓族)으로 불리게 된 것은 초기 철기시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따라서 ‘한’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는 별개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토착화과정은 청동기문화 단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래 삼한의 각 소국들은 ‘부족국가’로 통칭되어 왔는데, 1970년대 이후 고대국가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 ‘읍락국가’(邑落國家), ‘군장사회’(君長社會)와 같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의 설정이 시도되고 있다. 실제로 마한· 진한이 지역별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로 성립된 것은 철기가 보편화된 1세기 이후라고 본다.

경회루는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규모로서, 1412년 건축된 이래 몇 차례의 수리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외국 사신들의 접대 장소 외에 과거시험장, 활 쏘는 장소, 집현관들의 강의 장소 등으로 이용되었다. 경회루는 네모 반듯한 연못에 세 개의 섬을 만들고 다시 그 섬 위에 높이 누(樓)를 올린 독특한 공간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시대의 고유한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저, 사각형 연못 속의 세 개의 섬은 한국의 전통 사상인 삼신사상(三神思想)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삼신사상에서는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등 신선이 살고 있는 세 개의 산을 ‘삼신산’ 백제의 별궁(別宮) 연못인 궁남지(宮南池)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 중에서 최초(무왕 35년-634추정)의 인공조원(造苑)이며 원래 3만평 규모로 1964년에 국가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으나 1965년∼1967년에 약 1만3천 평 규모로 축소 복원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27 백제 본기 무왕조에 의하면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여 주위 물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시켰다.'고 하였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세 개의 섬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정원의 연못 속에 세 개의 섬을 꾸며 불로장수를 희원했다고 하는데 궁남지의 방장선산은 이것을 본뜬 것으로서 이러한 꾸밈새의 정원을 신선정원(神仙庭園)이라고 부른다.

경회루 연못의 세 개의 산은 곧 삼신산을 상징한다. 삼신사상은 일본에도 전해져 연못이나 정원에 세 개의 돌을 세워 놓고 삼신산이라고 하고 있다.

또 경회루는 섬에 세워져 있어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 역시 세 개의 다리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삼신사상에 의한 것인데, 세 명의 신이 경회루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 개의 다리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도 세 개의 출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삼신이 각각 출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正史)는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로 1142-1145년 작품이며 삼신산의 '방장선산(方丈仙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남원 광한루 앞 연못 <(社)西歸浦市徐福文化國際交流協會 第5號 瀛州徐福文化(2006) PP26-28.>에도 삼신산을 만들고 영주각, 방장정, 자라돌 등 유적이 남아있다.

따라서 방사(方士) 방사(方士)-중국 고대에 '방술(方術)'이라는 특수 기술을 부린 사람들.
술사(術士)· 방술사(方術士)·도사(道士)라고도 했다. 구체적으로는 고대 중국에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설을 제창하거나 이를 위해 마술적 기법이나 약방(藥方)을 사용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산동성)과 그 주변에 많았다고 전해진다. 진(秦)나라 시황제는 방사의 권유에 따라 동해(東海)에 있다고 믿어졌던 삼신산(三神山)에서 '불사의 기약(奇藥)'을 찾아오게 한 일이 있고, 한대(漢代)에도 방사의 활동은 성했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 그 수는 수만이 되었다 하며, 궁정에 모인 '해상 연제(燕齊)의 괴우(怪迂)한 방사'들은 갖가지 신비로운 말을 하였고, 또 이소군(李少君)·이소옹(李少翁)·난대(欒大) 등은 수명을 늘이는 술, 귀신을 부리는 술, 연금술 등으로 권력자에게 아첨했다. 궁정뿐만 아니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밑에도 수천 명의 방사가 식객으로 있었다 한다.

서복(徐福=徐市; 서시 또는 서불-한국에서는 '서시'가 가장 일반적인 호칭임)의 구선(求仙-不老草)기록은 우리나라 정사(正史)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고 그 유적은 제주 서귀포나 남해의 서불각자(徐市刻字)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으며 ‘서복문화’는 우리의 전통사상으로 면면히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고(本考)에서는 땅이름을 중심으로 서복관련 유물, 유적과 설화, 문화 등을 그동안 연구자가 조사 연구하고 답사한 결과와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문명, 문화의 성과를 정리, 정립하였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복에 대한 전시관을 건립, 홍보, 관광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제주 서귀포시 서복전시관의 역사적 이해와 서복공원 및 전시관의 발전 계획에 대한 방안과 서복 전시관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수정 및 지역 문화의 마케팅발전 계획에 관련, 한라영주산(漢拏瀛州山)과 정방폭포(正房瀑布), 서복공원발전(徐福公園發展) 프로젝트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제언하고자 한다.

2. 서복전시관 발전방안

(1) 서복전시관 오류수정작업

① 서복(徐福=徐市)의 구선(求仙)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수정.

<제주 서귀포시 서복기념관 앞 뜰의 서복석상- 한라산정상을 향하고 있다>

'서복(徐福)이 영약을 구한다는 구실로 진시황으로 부터 인력과 물자를 지원 받아 잔혹한 진왕조의 통치에 고통을 받고 있던 청소년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동도(東渡)하여 중국 고대 항로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가로 추앙 받고 있다.'

이 기록은 서귀포시 서복전시관에 게시된 안내문의 내용으로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사실왜곡(事實歪曲)이며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주관적인 기록 서복은 신선(神仙)에 관해 연구, 실천하는 방사(方士)로 정치가(政治家)나 의협가(義俠家), 탐험가(探險家)란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대양(大洋)을 횡단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한중일간에 연안(沿岸)을 따라 소심(小心)한 항해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중국의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히는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는 기원전 100년을 전후하여 편찬된 역사서로 무려 1천 200년 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록이 진시황의 불로초 사자 서복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기록으로 서복 구선의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한중일 각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원전에 각주를 달고 편집하고 이를 다시 사리를 따져 주관적으로 재편집한 책들이나 자료들이 봇물 쏟아지듯 출간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전래의 신선사상이 있다’고 믿고 중국인으로부터 문물(文物)을 전수받았다고 하는 거부감이 작용, 민족자존주의사상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서복을 일본문명(日本文明)을 일으킨 ‘문명의 개조’(開祖)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경향이다. 역사의 기록은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과학적이고 실증적,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하고 주관적, 감정적, 맹목적, 미사여구의 표현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서복기념관에서는 기념관을 운영하는 시스템 외에 ‘주제를 연구하는 기능’을 확충, 기록의 오류수정을 비롯, 각종 전시형태의 개선, 체험활동, 홍보활동을 부단하게 펼칠 것을 제언한다.

② 서복의 출항지와 항로표기 수정

중국의 진(秦)나라 때의(BC 221~207) 주요 해상항로로는 서복의 중. 일간의 해상항로를 들 수 있는데, 서복은 산동반도의 낭야, 등주를 따라 노철산 항로를 거쳐서 압록강변에 이르러서, 한반도의 황해 연안을 따라 한반도의 서남단을 돌아서 진한(辰韓)에 이르고, 대마도 항로를 거쳐서 일본의 북구주(北九州)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였다. <中國航海史> 中國 航海學會, 人民交通出版社, 1988, 2, p262

따라서 진시황 때, 중국본토에서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나 일본으로 직접 횡단(黃海橫斷航路)하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서복전시관(이하 전시관으로 표기)에서는 ‘서복의 동도’항로를 마치 황해를 횡단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도록 전등을 이용한 안내도를 활용하고 있다. 즉 중국 영파, 상해등지에서 제주에 이르는 ‘황해사단항로(斜斷航路)’를 활용하고 있다.

# 下記 그림중 <그림4> 제거....

상기 항로도중 제주도항로는 한반도남서부에서 추자도나 여서도를 거쳐 제주도에 이를 수 있고 봉래산인 금강산(金剛山)항로는 부산지역에서 포항, 주왕산지역을 거쳐 북상하였다가 울산지역에서 ‘평원광택’지를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 진한(辰韓=秦韓)국을 건립하고 일부는 일본지역으로 도해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의 글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서불(徐巿)은 동남동녀(청소년) 수천명을 데리고 낭야대를 출발, 발해의 삼신산으로 향한 기록이다.

'시황 28년(219 BC); 시황은 남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라 기쁜 나머지 3개월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서 백성들 3만 호를 낭야대 아래 이주시키고 그들의 부세와 요역을 12년 동안 면제해 주었다. 낭야대를 축하하고 나서 비석을 세웠다. 일이 끝난 후, 제(齊) 땅 사람인 서시(徐市) 등은, 바다 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재계(齋戒)한 후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서불은 동남동녀 수천명을 데리고 신선을 찾으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산동반도의 남쪽, 청도시와 연운항 사이에 위치한 ‘낭야’는 당시에는 진나라의 36군도 중의 하나인 ‘낭야군’이었으며 낭야대는 본래 월나라 구천(句踐)이 건축한 것인데 시황제가 3만 호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확장하였다.

먼저 서복 일행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살펴보면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로초가 자라고 있는 발해(渤海: 산동반도의 북쪽 바다)의 삼신산이다. 서복 일행은 낭야(대)에서 바로 동쪽으로 가지 않고 북쪽인 청도-유산포-적산포-성산두-위해-연태(芝罘)-봉래(蓬萊)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코스는 연안항로로 연태의 '지부'는 '지초-지'(芝)자의 땅이름이 심상치 않다. 중국에서 가장 크고 세계상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연육도인 '지부도'는 그 형태가 <영지(靈芝: 불로초로 불리는 영지버섯을 말함)>와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섬에는 절벽, 기암괴석이 많고 바다가 암석, 초석을 감싼 형태 또한 특이하다. 진시황이 3차례 온 적이 있고 한무제도 친히 온적이 있어 이름을 천하에 전해 졌다. 그리고 서쪽으로 봉래에 이르게 되는데 봉래 앞 바다는 ‘발해’로 수많은 섬들이 줄이어 있어 '과연 신선이 살만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이곳 봉래각(蓬萊閣)에는 누각사원․ 불상이 많고 종루(鐘樓)도 있으며 만리장성의 축소판 같은 성벽을 지나면 계단이 시작되고 대해원(大海原)이 눈앞에 펼쳐진다.

송대의 가우(嘉祐) 연간에 세운 여조전(呂祖殿)․ 삼청전(三淸殿)․ 봉래각․ 천궁(天宮) 등의 6부분으로 이루어진 도관(道觀)이 있으며 동쪽에는 수성(水城)이 있다.

봉래로 부터 요동반도의 남쪽 끝 여순(旅順)의 노철산(老鐵山)까지의 거리는 약 105km이고 섬이 끝나는 북황성도(北隍城島)에서 노철산 까지는, 건너다 보이는 거리인 약40km이다. 그리고 이 해협을 발해해협이라 부르며 뱃길을 노철산수도(水道) 또는 노철산항로라 하여 옛날부터 많은 고대인들이 래왕 하였던 뱃길이다.

중국 발해만 연안에서 압록강하구를 거쳐 연안을 따라 남해안이나 제주, 일본에 이르는 항로는 서복의 동도 이전에도 항해한 흔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다.

예거하면 5천년 전 신석기시대 여수 안도(安島)패총의 옥귀고리는 발해 진황도의 북쪽일대에서 발굴된 홍산문화의 유물로 확인되었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이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1313번지 일대 890평을 발굴 조사한 결과 5천년 전 신석기시대 무덤에서 구덩이 하나에 시신 2구를 하늘을 바라보게 나란히 안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패총에서 인골이 손에 찬 조개팔찌를 비롯해 결상이식(耳飾) 귀고리 등의 장식유물도 거두었는데 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지도(2007. 8)에서 안도패총에 대해 ‘흥륭와문화유적과 관련된 옥 귀고리(기원전 4,000년-기원전 3,000년)’라 표기하였다.

그리고 경남 사천시 늑도동 늑도유적(사적 제450호) 늑도 유적은 경남 남해 창선도와 사천시 삼천포항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 예정부지 내에 유적 일부가 포함돼 부산대와 동아대, 경남고고학연구소 등 3개 발굴기관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조사했으며, 동아대는 그 중 패각층과 주거지가 비교적 밀집된 C지구를 조사했다.

C지구는 기원전 2세기 무렵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조선 유민들이 해로를 통해 이동해 와 생활했던 곳이라는 논문이 발표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바 있다.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은 '석당논총' 제37집에 '사천 늑도유적 C지구 주거지와 출토 토기 분석' 주제의 논문을 통해 '두만강 유역에는 원형주거지, 터널형 온돌, 점토대토기 등을 갖춘 철기문화 집단이 있었으며, 그들은 해로를 통해 늑도에 와 생활한 고조선 유민이다'고 주장했다.

발표자는 고조선 유민들은 늑도에 정착한 후 일본· 낙랑 등과 교류, 그 흔적으로 늑도에 낙랑토기와 일본 야요이토기, 중국 화폐인 반량전과 오수전 등을 남겼다.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무문토기 문화와 온돌을 사용하던 고조선 유민들이 해로를 통해 늑도로 이동했으며 그 배경에는 당시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동쪽 진출이나 한(漢)나라의 영토 확장 등 동북아시아의 정치상황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서복이 출항하였던 지명을 ‘낭사 또는 낭아’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낭야’로 수정하고 기념관 내에서는 통일되게 표기해야 하겠고 서복 선단이 출발한 장소를 표기한 지도에서 산동반도 석도남쪽(유산포?)로 기록되었는데 청도의 남쪽, 교주시 낭야대로 수정되어야 하겠다. 기념관에서는 ‘사마천의 <사기>에 서복이 동도(東渡)한 것은 모두 3회’라고 잘못 기록, 설명하였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서복이 2회, 한종 등이 1회로 기록되었으며 서복의 성명, 방사, 올챙무문자-과두문자, 불로초, 시로미 등 해설자료가 보충되어야 하겠다.

③ 만리장성의 표기 수정 및 보완

기념관의 오류 중 가장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 자극하는 내용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표기 부분이다. 사마천의 <사기>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병도씨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수성(遂城)에 대해 황해도 수안(遂安)에 비정(遂자가 같으므로)하고 싶다. (임의로) 저 산이 갈석산이다’고 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즉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 됐고 장성(萬里長城)이 한반도 황해도까지 내려와 있게 되었다. 이덕일, 김병기지음 <고조선은 대륙이 지배자였다> 2006. 역사의 아침 간. p108.

전시관지도에는 이 설을 인용하였음인지 요녕성 단동지역까지 만리장성이 표기되어 있어 관람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한중 상고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수성현과 갈석산(碣石山) 시황 32년(215 BC), 시황은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燕) 출신 노생(盧生)을 파견하여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라는 신선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또 한종(韓終)ㆍ후공(候公)ㆍ석생(石生)을 파견하여 신선을 찾아 장생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신선을 찾아 장생 불사약을 구하러 나섰던 연 출신 노생이 바다에서 돌아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시황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예언서인 도참(圖讖)을 바쳤다. 그 도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진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은 호(胡)이니라.’ 그래서 시황은 몽염장군으로 하여금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북방 호인(胡人)들을 공격케 하여 하남(河南)지구를 점령하였다.

하남(河南)은 중국 하북성 창려(昌黎)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그 동쪽지역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만리장성의 관문 산해관(山海關)이 있다.

'
일사양용’(一史兩用, 1980년대)- 고구려 도읍이 환인, 집안 때는 중국사로, 평양으로 천도(427)한 이후에는 조선, 한국사로... 그후 동북공정에서는 ‘고구려사=중국사’로 중국측 주장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다.

'반만년(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고 자랑하던 고조선 역사! 그러나 어느 때부터, 누구 때문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고조선 3천년의 역사는 망각, 분실, 폐기하고 2천년도 못되는 우리의 역사로 초라하게 탈바꿈되고 말았다.

간신히 금년(2007) 3월,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고조선’에 대해 ‘건국하였다고 한다’에서 ‘건국하였다’로 바뀌었다. 이는 우리 근본이며 뿌리역사에 있어 대 결단이며 현 정부의 중요한 실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다음 표와 같이 중국의 문헌이나 고조선 역사기록도 바뀌는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중국의 과거와 현대 문헌에 우리나라 역사(고조선) 기록 구분, <명사>(明史) 1368-1840, <세계역사지명사전> 1990.6간, 기록내용

조선은 기자(箕子)에게 봉하여 준 나라이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조선(朝鮮)이라하였다. 일찌기 연(燕)나라사람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무제(漢武帝-世宗)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한말(漢末)에 부여사람 고씨(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高麗(고구려)로 고쳤다.

조선(korea)......기원 4세기 신라, 고구려, 백제 3개 국가가 건립되었다. *고조선 삭제이유 추정-단군조선은 신화라고 반대하고 ‘기자, 위만조선‘은 중국인이 들어와 세운나라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부, 반대)

조선사

* 고조선-부여-고구려....
* (고조선 삭제) 신라, 고구려, 백제...

현재 중국교과서에도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조선반도에 거주했다. 기원 전후에 조선반도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것은 고구려 노예제국가였다. 후에 조선반도 서남부와 동남부에는 또 잇달아 백제, 신라 두 노예제국가가 나타났다’ 송기호지음 <동아시아의 歷史紛爭> 2007. 솔출판사. p35. 정답은 ‘고조선은 중국에 있었다’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선민족이 조선반도에만 거주한 것으로 한정하여 서술하였고 삼국(三國-高句麗, 百濟, 新羅)이전 고조선과 부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문헌을 비롯, 유물, 유적, 지명, 문화 등을 통하여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객관적, 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BC 300년-연(燕)소왕 때 진개를 요동에 보내 장성을 쌓고 만반한(滿潘汗)을 조선과 경계로 삼음. 한반도에 한문자 전래. BC 221년-진왕 정(政), 제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 황제로 칭함. 만리장성 완성. 조선후(朝鮮候) 처음으로 조선왕을 칭함. BC 219년-진시황 통일의 공덕을 각석(刻石) 방사(徐市)로 하여금 입해(入海)하여 신선을 찾게 함(1차 東渡). BC 210년-진시황 순유 중 죽음(2차 東渡)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지음 <한국사연표> 2004. 동방미디어(주). pp16-18 로 진나라와 고조선과는 관련성이 있으며 그 지역이 중국의 요서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개주 고조선고인돌, 중국 최대의 제단형 고인돌>

최근 홍산문화의 발굴성과로 확인된 ‘신비의 국가’가 중국에서는 동호(東胡)나 흉노(匈奴)족이 세운 나라로, 황제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발표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정사로 평가받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에 조선과 도읍지 왕험성(왕검성=험독)이 기록되어 있고 ‘서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이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며 전설이 아니다.

따라서 고조선은 한반도 내에서 설립된 나라가 아니고 중국 요서지역(紅山文化)임을 <사기>나 <한서>지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적석묘, 석곽분, 고인돌, 비파형동검, 명도전, 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등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2) 서복전시관 발전프로젝트를 위한 제언

① 주제의 특성을 살려 전시관 재구성

서복 전시관의 주인은 ‘서복’이며 주제 또한 ‘서복’이다. 입구에서부터 진시황의 병마용을 전시하고 진시황의 마차를 지나치게 부각시킨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국 청도 낭야의 ‘서복전’에는 서복이 중앙에서 주인으로 부각되고 진시황이나 출항모습, 선박(樓船)모습 등은 그림으로 간략히 처리되어 있다.

그리고 서복(徐福=徐市)은 역사적인 인물이며 그의 가계와 출항 후 그의 친족들에게 당부한 자료가 고향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도 이천서씨를 비롯, 대구서씨, 장성서씨가 있는데 고문헌자료나 족보 등을 통해 연구,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시관에 게시함으로써 전설이나 설화 속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곳은 서복이 출항 중국이 아니고 한국이므로 부 주제는 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서복활동이 중심이 되어야 생동감이 있으며 외국인들이 참관하여도 특이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조선시대의 가사 묶음집인 <경세설>(警世說) ‘백발가’(白髮歌)에는 서복의 맹랑한 구약(求藥) 허사를 빗대어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개탄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다. “서복의 동남동녀 돌어온지 뉘 들었노, 불사약 어디 있고 불로초 보았느냐, …가는 청춘 뉘 막으며 오는 백발 뉘 제할까”

<심청전>에도 이러한 대목이 있다. “동남동녀 실었으니 진시황의 불로초 캐러 가는 배인가, 방사 서시(徐巿) 없으니 한무제의 신선 찾는 배인가, 가는 길에 죽자 해도 뱃사람들이 지키고, 살아가자 해도 돌아갈 나라는 멀고 아득하다” 배에 실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심청의 신세를 서복이 당한 비운에 비추어 애통해 하고 있다.

<천하도(天下圖)- 채색필사본, 18세기후반, 51.2*53.4cm. 작자미상)

위의 ‘천하도’(天下圖)는 봉래, 방장, 영주 등 삼신산이 일본의 남서쪽 유구지역에 실제 로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도록 그려진 채색필사본 지도로 18세기후반의 작품이다. 물론 이러한 자료는 잘못된 자료로 후세인들이 서복의 전설을 지도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잘못된 자료를 바르게 설명하는 것도 중요한 교육이다.

또한 서복과 관련된 우리나라 각 지역의 유물, 유적과 지명(地名), 설화나 전설이 남아 전해오고 있는 전승지, 서복관련 문화 등을 지도로 제작하여 게시하는 방법도 있는데 출발지 중국 낭야대에서 제주까지 구선(求仙)항로를 예거하면 다음과 같다.

서복 일행은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신선이 살만한 절경의 섬에 올라 불로초 찾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해안을 따라 압록강하구에 이르고 다시 남하하다가 백령도, 소청도, 대청도를 지나고 덕적도에 잠시 상륙하여 불로초를 찾다가 천신제를 지내고 다시 남하하여 진도 울돌목을 우회하여 ‘서시터’, 고흥의 ‘서시등’, 나로도에 ‘봉래’란 땅이름을 남기고 삼신산이라 불리는 방장산(方丈山-智異山)의 지초봉(芝草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서시천’이름을 남기고 다시 남해의 금산의 기묘한 경치에 감탄하여 상륙, 바위에 글자를 남기고 남쪽의 신비한 바위섬 백도에 올라 전설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덕적도 국수봉(國壽峰)- 산정에 제천단(祭天壇)이 있는데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덕적도 북단 국수봉은 진시황제가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기 위하여 서시로 하여금 동남동녀 500명을 보내어 영약 국로(菊露)를 발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백령도(白翎島) 선대암(仙垈岩)과 대청도(大靑島)-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백령도 두무진(頭武津, 명승 제8호)은 병풍을 두른 듯한 해안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루는데 그중 첫손가락 꼽히는 곳이 선대암으로 ‘신선이 놀았다’는 지명유래가 전해 온다. 이곳은 연안항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예부터 중국 상인들이 내왕한 통로였다. 그리고 이웃한 대청도에는 영약인 상기생(桑寄生)의 산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대청도’나 ‘소청도’라는 이름도 중국 낭야대의 북쪽에 위치한 청도(靑島)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 진도 군내면의 서시터- 1984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 ‘진도군 군내면 나리(羅里)에 서시터’가 기록되어 있다. 진도와 육지 사이의 험로(險路)인 울돌목을 피해서 우회하여 위치한 이 곳은 연안 항로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금골산(金骨山)과 도암산 등 서기 어린 바위산이 있다. 현지 주민들에게 ‘서시터’의 지명유래를 문의하였던 바 그 유래를 알지 못하였다.

▶ 고흥 서시 밋 등과 봉래섬(蓬萊島)- 고흥군 과역면 석봉리에 ‘서시밋등’이 있다. 이 마을에 방선곡(訪仙谷)과 가산(佳山), 상곡(桑谷) 등의 땅이름이 남아 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나로도’(羅老島) 또는 ‘봉래’(蓬萊)라 부르는 섬이 있다. 남해 연안항로 상에 위치한 봉래섬은 진도나 완도에서 섬진강의 입구,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치가 아름다워 봉래라 부른다. 봉래면 백양리에는 약초가 많아 백초(白草)마을이 있으며 ‘나로도’는 ‘나루도’에서 온 말로 옛날 뱃길의 ‘나루’(津)였으나 최근 우주발사선 기지가 세워져 우리나라 ‘우주나루’가 될 전망이다.

▶ 남해 서시과차(徐市過此) 각자(刻字)- 남해군 상주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 예부터 전해지는 화상문자(畵狀文字) ‘서시(巿)과차’는 너무나 유명한 석각(石刻)이다. 서불각자, 남해각자, 상주리석각, 서시과차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석각은 <국어대사전>(일중당 발행)에 ‘경남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의 바위에 새긴 50cm-1m정도의 글자로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때 서불이 이를 새긴 것이라 하는데 중국 학자 중에는 ’서불기배일출‘(徐巿起拜日出)의 6글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정인보는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 문자로 추측하여 ’사냥을하러 이곳에 물을 건너와 기를 꽂다‘로 해독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남해 성주리 석각- 서시과차>

▶ 구례 서시천과 지리산 지초봉(芝草峰)- 서복 일행의 제 1목적지는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인 지리산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리산일대에는 많은 서시(徐福)와 불로초인 지초(芝草)관련 땅이름이 남아 있다. 먼저 지리산 노고단 서쪽 봉우리의 이름이 ‘지초봉’(芝草峰)이며 산밑 마을 이름이 ‘지초마을’이다. 또 구례읍의 동쪽, 섬진강지류의 이름이 ‘서시천’이며 <한국지명총람>에는 '서시천(소아천)…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구례읍 봉남리 앞에서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감, 길이 18.07km'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중국 진시황제가 6국을 통일하고 불로장생하고자 서시(徐福)에게 명하여 동남동녀 5백 명을 삼신산(智異山)에 보내 장생불노초를 구하여 오도록 하였는데 삼신산(智異山)에 가면서 냉천리에 들러 마을의 샘물을 먹어 보니 샘물이 매우 차므로 찬샘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 후부터 냉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고 구례군 홈페이지에 기록되었다.

▶ 남원 광한루의 삼신산(三神山): 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남원 광한루는 삼신산 숭배사상의 전형이다. 광한루의 정문 문루에 들어서면 <청허부(淸虛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여기에서 청허부라 하는 것은 천상의 백옥경(白玉京: 천제:天帝가 사는 곳)을 들어서면 옥황상제가 기거한다는 궁궐이 있어 이에는 <광한청허지부(廣寒淸虛之府)>라고 쓰여 있는데 광한이나 청허부는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골짝 골짝에서 흘러내린 천갈래 만갈래의 맑은 물이 합치고 어울리어 남원의 요천강(蓼川江)이 되었으니 이 물을 끌어 들여 연못에 담아 물 가운데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섬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영주(瀛洲), 봉래(蓬萊), 방장(方丈)산이다. 이 삼신산에는 다리를 놓아 서로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하였고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 세워져 있고 방장섬에는 방장정(方丈亭)이 세워져 있다.

금강산은 여러 이름이 있는데 여름산을 봉래산이라 한다. 물 가운데 삼신산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누각이 있는데 이른바 광한루이다. 그리고 북쪽으로 임실의 사선대(四仙臺)가 위치하고 있으며 섬진강의 하구지역의 남해 금산에는 '서시과차(徐市過次)'란 암각화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 다도해의 절경 백도(白島)- 지리산과 섬진강일대에서 불로초를 찾지 못한 서복 일행은 다음 목적지 영주산으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고의 신비를 지닌 백도(명승 7호)에는 다음과 같은 서복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서불이 안개 짙은 바다에서 헤매고 있은 지 며칠, 향기가 코를 찔러 그 향기를 쫓아갔다. 겨울인데도 기암절벽에 꽃이 피어 있고 그 꽃을 따니 안개가 벗어지면서 이름 모를 새가 서불의 뱃길을 안내하여 진나라(濟州道)까지 인도하였다'고 <한국의 여로>④(1981년)에 기록되어 있다.

서복일행이 배편으로 육지에서 제주에 가려면 백도나 추자도가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의 노철산 항로와 같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여 제주도에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 낭야(臺)에서 제주도까지는 연안항로를 따라 서복의 불로초 뱃길이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 지도를 제작, 게시할 수 있다.

② 주제별 전시관 재조성 구성

우선 장기적인 측면에서 마스터플랜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서복전시관의 주요 주제별로 구분, 제안한다면 첫째 서복관, 둘째 불로체험관, 셋째 국제문화교류관으로 나눌 수 있겠다.

서복관은 현재의 서복전시관을 재구성 전시중심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불로체험관은 건강과 장수와 관련되는 전시,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건강교실로 운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각종 약초와 그 효능, 의약제품, 국내외의 명약, 명품 등 기념품으로 구입할 수도 있는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명소가 될 수 있겠다. 특히 명성 있는 제약회사와 연계하여 불로체험관을 조성하거나 전국민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거쳐 설립할 경우 국민적인 호응과 재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되리라고 본다.

국제문화교류관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 문화를 상호 연구 교류하며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국제간 친선을 도모하면서 분쟁의 소지를 풀어갈 수 있는 장(場)으로 활용한다. 또한 전시관 앞뜰에 위치한 서복석상의 위치나 높이, 방향 등을 재고,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까닭은 한중일 3국간에 서복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며 참배자를 위해 석상 주변을 재정비하여 향을 올리거나 차한잔을 올릴 수 있는 분위기와 시설물을 조성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경우 방향이 한라산(북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그늘진 서복석상을 촬영할 수밖에 없으며 기념관의 한 모퉁이에 방치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제안한다.

3. 한라영주산 및 정방폭포 발전방안

(1) 신산 한라산 영실-불래오름간/ 불로초 체험 리프트설치를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지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제주도와 서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제주(濟州)는 옛날에는 탐라국(耽羅國)이었다. 육지에서 9백70여 리에 위치하며 주위는 4백여 리가 된다. 산꼭대기는 오목하게 생겨 봉우리마다 모두 그러하다. 날씨가 활짝 개었을 때 올라가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하늘가에 산이 보인다. 남방에서 온 중국 상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송강부(松江府)의 금산(金山)이라 한다. 춘분과 추분에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보인다. 산세가 험준한 것이 다른 산과 다르다. 제주는 앞쪽에서 북으로 향해 있고 대정(大靜)과 정의(旌義)는 산 뒤에 있는데 정의는 서쪽이요, 대정은 동쪽이다. 서복(徐福)과 한종(韓終)이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이 꾸며댄 말이긴 하나 그의 말이, “지부산(芝罘山)에 올라가서 신산(神山)을 바라본다.” 하였으니, 지부산은 동해가에 있는 것으로 시황(始黃)이 직접 올라가 본 곳이다. 올라가면 바라보인다는 곳이 아마 이 산을 가리킨 듯하다. 송강의 금산은 서남쪽에 있으니 저쪽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반드시 동북이 될 것이다. 섬 안에 또 영주(嬴州)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상하다.

위와 같이 제주에는 '진시황의 불로초 사자이며 방사인 서복과 한종이 왔다'는 기록과 진시황이 지부산에 올라 바라본 신산(神山)이 제주(漢拏山)이며 섬안에 2개의 영주가 있으니 이상하다고 하였다.

방장산 봉래산 멀리 노닐다가 (方丈蓬萊恣遠遊)

다시 석장 날려 영주에 이르니 (又飛錫杖到瀛洲)

신인이 떠나시니 구름이 선혈을 막고 (神人去國雲對穴)

신선들도 하늘로 올라 누대에 달만 걸렸네 (仙侶昇天月在樓)

시골 조공으론 모두 남쪽서 건너온 말을 칭찬하지만 (鄕貢皆秤南渡馬)

임금님 은혜를 기다리며 북쪽서 오는 배를 본다. (聖恩長望北來舟)

삼산이 모두 왕화로 귀의하였으니 (三山盡是歸王化)

유민들이 바다밖에 있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不放遺民海外浮)

위의 글은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유배생활 하는 신선서인(神仙書人) 추사를 위로하려고 제주에 왔을 때 제주 목사(牧使) 김원진(金元鎭)에게 남긴 시이다. 초의선사는 삼신산(方丈-智異山, 蓬萊-金剛山)을 두루 유람하고 제주(瀛洲)에 와서 존자암(尊者庵)에서 유숙했는데 한라산으로 오르려 했으나 날씨가 궂어서 오르지 못하고 제주 목사 김원진에게 ‘옛부터 이곳은 신선이 사는 영주 땅인데 여기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신선의 후손인 영주인이므로 비록 왕의 비호를 받지만 귀인처럼 여기라’고 하였다.

한라산 하원동(河源洞) 존자암은 서귀포시 하원동 영실(靈室) 서북쪽에 있는 불레오름(佛來山)오름은 한라산 중턱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명 사찰로 알려진 존자암(尊者庵)이 자리하고 있다. 1520년 8월 제주도에 유배 온 충암 김정이 지은 <존자암중수기>에 따르면 “존자암은 삼성(三姓-高, 梁, 夫)이 처음 일어날 때(고조선시대) 창건되었는데 - 4월이 되면 좋은 날을 가려 삼읍(제주, 대정, 정의현)의 수령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정하여 이 암자에서 목욕재계하고 재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국성재이나 지금 이 재를 폐한지 7-8년이 되었다.”고하여 존자암은 이미 오래 전에 창건되었고, 나라의 국운융창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국성재가 봉행되었던 호국도장이었다.

서복 불로초의 현장인 영주산(漢拏山) 영실에서 불레오름 또는 정상까지 리프트시설을 노약자 및 국내외 관광자를 위하여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2) 정방폭포 앞바다에 대형 서복의 불로초 누선(樓船)모형을.

<정방폭포 상단의 아름다운 조망 경관>

서복의 불로초 유적지 정방폭포에는 ‘서불과지’란 글자와 폭포의 자연경관만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 서복의 대형 불로초 누선을 만들어 참관자들이 승선,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명승 유적지를 적극적으로 가꾸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폭포 위쪽에 걸려있는 다리 옆 조형물도 제거하거나 위치를 북쪽으로 바꾸어, 다리에서 정방폭포 낙수(落水)부분의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꼭 필요한 조처라고 판단된다.

4.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문명 성과

(1) 서복이 일본까지 건너가 나라를 세웠겠는가?

동방의 삼신산에서 불로초를 찾지 못한 서복은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의 삼신산에 왔으나 모두 실패하여 귀국하면 진시황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1천여 명의 동남동녀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숨어살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즉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설과 ‘우리나라 남동해안에 상륙하여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일본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에 대하여 살펴보자.

서복에 관한 전설은 일본의 기주(紀州) 구마노(熊野; 지금의 鹿兒島 남쪽 해안지역)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야마모또(山本紀綱)의 <서복동래전설고>(徐福東來傳說考, 1975년,謙光社)와 <일본에 살아 있는 서복의 전설> 등에 기록되었으며 이는 다시 중국으로 전해졌다. 이 문제를 최초로 전하는 책은 오대(五代 907-960)의 승려 의초(義楚)가 편집한 <석씨육첩>(釋氏六帖)이다. 이 책의 제26권 ‘일본국’항목에 ‘왜국(倭國)이라고도 한다. 동해 중에 있다. 진나라 때 서복은 500의 동남(童男)과 500의 동녀(童女)를 이끌고 이 나라로 가 살았다.’고 이야기 한 다음에 주(周-後周)의 현덕(顯德) 5년(서기 958년)에 일본 승려 관보(寬輔)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후지산(富士山)이 봉래산이라’고 한다 하였다.

'동북 천여리에 산이 있다. 후지(富士)라고 한다. 또 봉래산이라고도 한다. 그 산은 험악하고 삼면은 바다인데 우뚝 솟아 있다. 정상에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낮에는 위로부터 온갖 보물이 흘러 내려왔다가 밤에는 도로 돌아간다고 한다. 언제나 음악소리가 들린다. 서복은 여기에 살면서 이를 봉래산이라 하였다 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자손은 모두 성을 진씨(秦氏)라고 한다'

또 북송(北宋) 때의 시인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일본도(日本刀)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는 것은 원래 이런 지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듣건데 그 나라는 큰 섬에 있으며 토양이 기름지고 풍성해 풍속이 아름답다고 한다. 옛날에 서복은 진나라 백성을 이끌고 약을 캐러 왔다가 그대로 머물렀으며 관동(丱童)은 모두 늙어 버렸다고 한다.'

관동은 총각 머리를 튼 동남동녀인데 그들이 모두 노인이 될 때가지 일본에서 살았으며 일본인이 모두 그 자손이라는 것이다. 또 최근 발간된 <불로를 꿈꾼 서복과 시황제>(池上正治 편역)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화가산현의 신궁시에는 서복의 묘가 있다. 산리현 부사길전시에는 서복의 사당이 있다. 경도부 이근정에는 서복이 상륙한 곳과 '포도신사(浦道神社)'가 있다. 서복의 첫 번째 항해는 바다가 거칠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두 번째의 출항한 곳은 해주만 연안의 람산두(嵐山頭) 또는 연운항(連雲港)부근이다. 구체적으로 북코스로 람산두→성산두 서해안→대마도해협→일본 구주, 유명해(有明海)→대우(大隅)반도→본주 기이(紀伊)반도→웅야탄(熊野灘)이며 남코스로는 연운항의 고구산(古胊山)연안에서 출발 황해연안(蘇北)→일본 구주, 유명해→대우반도→구주의 기이반도, 웅야탄이다.>

이 논문의 동도(東渡)분야의 집필자는 놀랍게도 서복 연구가로 유명한 중국측 라기상(羅基湘)교수였다. 위 기록에서 서복은 삼신산이 위치한 우리나라는 그냥 무사 통과하였다.

(2) 서복이 건설한 나라 진한(辰韓=秦韓)

한편,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지은 <성호사설>(星湖僿說) 권 50권 '경사문' 서불(徐巿)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불이 동쪽 바다로 떠나왔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5백 명의 동남동녀가 탄 배가 과연 어느 곳에 닿아서 끝내 돌아가지 않았을까? 오직 우리 태평한 나라는 아주 옛날부터 기자가 ‘난을 피하여’ 와서 살았고 공자도 ‘바다로 떠나 가겠다’한 것은 이 곳에 살려는 것이었으니 본래부터 우리나라는 바다 밖에서 첫째로 치는 낙지(樂地)이다. 저 왜인 같은 것은 한 섬 오랑캐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풍기와 습관이란 족히 말할 것이 없다. 서불이 진(秦)나라를 피해서 바다로 들어왔다면 반드시 이 조선을 버리고 왜국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른바 ‘삼신산에 선약을 구하러 갔다’라는 전설은 다만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데에 불과했던 것이다. 동사(東史-우리 역사)에 상고하니 ‘진한(辰韓)은 진(秦)나라 때, 피난한 자가 와서 살던 나라이다.’하였고 1319년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그들의 언어가 진(秦)나라 사람과 비슷한 까닭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니 이 진(辰)과 진(秦)의 음이 같음은 좌전(左傳-춘추좌씨전) ‘진영’(辰嬴)이란 말에 보아도 증거 할 수 있다. ... 그때 마침 서불이 바다에 떠 나왔고 우리나라에도 과연 진나라로부터 떠돌아온 자가 있었다면 진한(辰韓)이 서불의 나라로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사기> ‘회남왕전’(淮南王傳)에 ‘진황제가 어린 남녀 3천명을 보내고 오곡의 종자와 백공(百工)의 기구도 빠짐없이 대주었는데 서복은 평원과 광택(廣澤)을 얻어 거기에 머물러서 왕 노릇을 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 말을 … 마땅히 상고해 보아야 하겠다.' - 서불조

삼한 중에는 오직 진한 풍속만이 가취(嫁娶)를 꼭 예로써 하고 남녀의 구별이 있어서 길에서 서로 만나면 모두 멈추고 서서 길을 양보하였다. 지금 영남(嶺南)이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부고(府庫)가 된 것이 이런 유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기자(箕子)의 봉강(封疆)이 된 후로 경계가 호맥(胡麥)이 닿게 되었고, 위만(衛滿)이 또 퇴계(椎髻)로 와서 점거하자 옛날 풍속이 다 변경되었던 것인 듯하다. 그리고 천하가 이미 진(秦) 나라에 병합되자 중국 백성이 부역을 피해 삼한으로 투입하여 동남쪽에서 나라를 세웠다. 중국 풍속을 오히려 제대로 지키고 오랑캐에게 변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직 여남 지대였던 까닭에 그렇게 되었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 삼한시종

또 조선 영조 때, 안정복이 기자 때부터 고려말까지 사적을 적은 역사책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진(秦)과 진(辰)의 통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한(辰韓)을 또 진한(秦韓)이라 이른다. <삼국유사>(1206)에서 최치원은 ‘진한(辰韓)은 본래 연인(燕人)이 피난해 온 것이므로 탁수(꟔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ㆍ마을을 사탁(沙꟔)ㆍ점탁(漸꟔) 등으로 불렀다.’하고 ... 상고하건대 ... 진한(辰韓)이 비록 연인(燕人; 북경은 燕都)이나 후에 진(秦)이 통일하였기 때문에 통칭하였고 옛사람들이 진(秦)과 진(辰)은 통용하였다. <춘추좌전>(전한 말 유흠(劉歆 저)의 진영(辰嬴)을 상고하여도 방증이 될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B.C..8-)'동이열전‘과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의하면, ’진한지역에 있는 한 마을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옛날 진(秦)나라로부터 고역을 피해 한(韓)나라에 이주해 왔더니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눠주어 그곳에 정착하였으며 … 당시 까지도 진나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한(秦韓)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말은 마한의 말과 다르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나라 중부이남 지역에 분포한 삼한(三韓) 중의 하나인 진한(辰韓)은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에 지금의 대구․ 경주 지역에 분포한 12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맹주(盟主)인 경주의 사로국(斯盧國)을 위시하여 기저국(己萌國), 불사국(不斯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염해국(騎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우유국(優由國)이 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진한 12개의 소국은 큰 나라는 4,000-5,000가(家), 작은 나라는 600-700가 정도였다'고 한다.

진한의 형성 주체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진한뿐만 아니라 삼한 전체를 포괄한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지> 진한조에 중국 진(秦)나라의 유민들이 노역을 피해 한(韓)나라로 이주해 와서,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 받아 진한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들 소국들은 3세기 후반에 신라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으며, 일부는 가야(伽倻)의 소국(小國)으로 발전한 듯하다.

<사기>에서 서복의 도착지를 ‘평원광택’(平原廣澤) 즉 울주 반구대 부근-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에 도착, 진한의 12개 소국 중 한 나라를 건설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의 <삼국지>에서 ‘진한의 유민들이 노역을 피해서 건국했다’는 기록은 서불의 경우와도 일맥상통하며 반구대에는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고기(고래, 상어 등) 잡이(連弩)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토용’이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진시황의 병마용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서일초(徐逸樵)저 <선사시대적일본>(先史時代的日本)에서 ‘서복 일행이 제일 처음으로 상륙한 곳은 당시 조선반도의 진한(辰韓)이었고 진한에 대해 개발과 건설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그곳을 중계로 하여 일행 중 일부분 혹은 그 후예들은 해류(海流)의 자연적 힘을 빌어 계속하여 동쪽으로 항해하여 일본에 이르렀다.’고 기록한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3) 우리나라 화랑도의 뿌리는 신선사상

신라 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수양단체인 화랑도(花郞徒)는 국선도(國仙妄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ꡑ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ꡐ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ꡑ하고, 이들은 ꡐ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 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ꡑ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그 소기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ꡐ현좌(賢佐: 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ꡑ고 하였다.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들이 화랑도화 하였다는 설(申采浩), ② 조선 고유의 신앙단인 부루교단(敎團)에서 연유하였다는 설(崔南善), ③ 원시 미성년집회에서 연유하였다는 설(李基白) 등이 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화랑도는 진시황의 불로초 사자 서복이 이끈 동남동녀(靑少年)들의 단체 활동이 그 기원이라고 연구를 통하여 확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솔자인 서복은 방사로 신선사상의 지도자요 동남동녀는 낭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 목적을 세속오계로 정하여 국가의 기둥이 될 인재양성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왕(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듯이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하고, …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그 명칭을 고쳐 화랑이라 했다. 비로소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國仙)의 시작이다’(此花郞國仙之始)하였고 최치원은 <삼국사기>에서 ‘우리나라에 오묘한 사상이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사상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들어 있다.’하였다. 즉 신선사상을 좋아하던 진흥왕이 화랑도를 창설하면서 신선도와 풍월도가 우선되어 야 한다고 한 것도 최치원이 말한 선사, 풍류와 관련이 깊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을 비롯,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 안축(安軸)의<관동유기>(關東遊記)에 나오는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마애단서(磨崖丹書)․36봉 비(峰碑), 강릉 한송정(寒松亭)의 사선비(四仙碑),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의 애상비(崖上碑)․ 동봉비(東峰碑) 등은 화랑의 신선 유적을 알려주는 것들이다.

신라 말에 이르러 화랑이란 말은 쓰이지 않고 대신 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만 불렸으며 고려에서도 화랑이란 말은 쓰지 않고 선랑은 팔관회(八關會)의 무동(舞童)으로, 국선은 충렬왕 이후 양반의 군역(軍役)을 지칭하게 되었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일러준 다섯 가지 계율인 화랑오계(花郞五戒)는 원광이 수(隋)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 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 오계(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4) 이주(夷洲) 및 단주(澶洲)-서복의 후예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솟아났다. 맏이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세 신인은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사는데, 하루는 자줏빛 흙으로 봉하여진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돌함과 사자(使者)가 있었다. 돌함을 열어보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인데 우리 임금이 세 딸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신자(神子) 셋이 탄강(誕降)하고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며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여 왔사오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라고 하고 사자는 구름을 타고 떠났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들고, 물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정하였는데, 양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이도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고려사> ‘고기’에 제주의 3성 시조설화에 대하여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오주전’(吳主傳)황룡 2년(203)조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보내 병사 만명을 바다에 띄워 이주(夷洲) 및 단주(澶洲)를 찾도록 하였다. … 서복을 보내 선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후예가 수만호 늘어나고 그곳 사람들은 가끔 회계(會稽)에 와서 교역을 하였다. 회계 동현인(東縣人)들이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단주(澶洲)에 표류하는 경우가 있으나 워낙 먼 곳이라서 이를 수는 없었다. 단 이주에서 많은 수천명을 데리고 돌아 왔다’고 하였으며 <후한서> ‘동이열전’에 ‘회계의 바다 밖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20여 국에 나뉘어져 있다. 서복의 후예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수만호가 되었다.’고 기록, 서복의 후예들이 고향인 중국과 래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삼성혈에서 어느 때 3신인이 솟아났는가? 아니면 어느 때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서복의 동도 이후의 일이라면 서복의 동남동녀 중 제주도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설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동남동녀의 성씨가 기록된 문헌이나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륙의 성씨에서 양, 고, 부씨의 기록은 찾을 수 있다. 즉 고구려 주몽의 성씨가 고(高)씨이며 부여족(百濟系)의 성씨는 부(扶, 夫)씨이다. 이는 <위서>(魏書)에 백제 국왕이 ‘신과 고구려는 부여(夫余)에서 나왔다’고 기록한 사실에도 알 수 있으며 고구려 보장왕 때 안시성(安市城)의 성주(城主) 양만춘(楊(梁)萬春)장군의 성씨가 양(梁, 楊)씨이며 <삼국사기>에 신라 성씨 중에, 양순(良順), 양문(良文) 등 양(良)씨가 있다.

그리고 표선의 민속박물과의 고인돌의 형태는 북방식(卓子式) 고인돌으로 충청, 전라도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다르게 대륙의 요녕지방의 고인돌과 비슷한 편이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의 ‘세민(細民)들은 부엌과 온돌이 없고 땅바닥에서 자고 거처한다’고 기록되었는데 대륙의 추운 지방의 사람들은 부엌이나 방이 추위 때문에 집안에서 기거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삼성혈의 3신인은 서복 일행 중 남은 사람으로 보기 어려우며 대륙계(古朝鮮)의 사람들이 연안항로를 따라 이동,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를 상세하게 적은 당나라 가탐(賈眈, 730-805)이 지은 <도리기>에 따르면, ‘산동반도 등주(蓬萊)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발해만의 노철산 하구를 거쳐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대동강 하구와 초도를 지나 옹진만과 강화도․ 덕적도를 거쳐 남양만에 이른다. 이 해로는 근해 연안 혹은 섬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여, 비록 항해거리가 멀고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 항로를 통한 교역관계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당시 이 항로의 주도권은 북방대륙인(古朝鮮)가 가지고 있었고 이 항로를 따라 제주도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압록강의 ‘뗏목’과 제주의 ‘태우’는 연관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의 초기, 비류와 온조 또한 뱃길로 연안항로를 이용, 경기만에 도착한 사실, 미천왕이 ‘압록강의 소금장수였다’는 사실, 광개토대왕비문에 고구려가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할 때, ‘4만의 수군이 이 항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5) 제2차 서복의 동도유적-제주에서 봉래산까지

① 영일 흥해면의 서시방골과 청송 서시천.

지명(地名)은 그 고장의 역사의 소산이다. 바뀐 지명은 바뀐대로 역사 변천의 일면을 알려 주며 바뀌지 않는 지명은 맨처음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곧 지명은 그 고장 역사 변천을 따라 바뀌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지명 중 서시(俆福)에 관련된 땅이름은 여러 곳에 있는데 서(西)쪽 의미가 내포된 땅이름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땅이름이 있다. 즉 ‘서시’(마을)은 ‘서(西)시암’의 준말로 서시와는 관련이 없는 땅이름이며 진도군의 서시터, 청송과 구례의 서시천, 남해의 서시제, 고흥군의 서시밋등, 영일군의 서시방골, 구례의 서시교 등은 서시와 관련된 지명으로 판단된다.

경남 거제도 갈곶도 해금강과 소매물도 등에서 불로초를 구하지 못한 서복일행은 최종 목적지인 봉래산(金剛山)으로 가기 위해 북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렸을 것이다.

우선 낙동강의 하구를 통과한 뒤, 울산광역시 서생포, 장생포 등을 거쳐 영일군 대보곶을 지나 영일군 흥해면 용한리에 도착, 마장재 옆에 있는 골짜기에 캠프를 쳤을 것이다. 이 곳을 근거로 포항일대를 중심으로 불로초를 찾았을 것이다. 결국 불로초는 찾지 못하고 ‘서시방골’이란 지명만 남기고 다시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렸을 것이다. 다음에 상륙한 곳은 영덕군 강구(江口)로, 아름다운 주왕산일대를 답사하였을 것이다. 주왕산 북쪽에는 신촌 약수가 있는데 이 냇물이름이 ‘서시천’이다. 한수, 한천, 신한천이라 불리는 서시천은 주왕산국립공원 북쪽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반변천으로 흘러드는 내(川)이름이다.

산의 모습이 돌로 병풍을 친 것 같다하여 석병산(石屛山), 신라의 왕족 김주원(金周元)이 머물렀다하여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부르는 주왕산(周王山; 721m)은 산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곳곳에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경상북도의 소금강이라 부른다. 공원 서쪽의 주방천 상류일대 주왕계곡은 이 공원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계곡을 따라 기암, 아들바위, 학소대, 급수대, 망월대 등의 기암괴봉이 늘어서 있다. 특히 입구에서 3km지점의 기암(旗岩)은 정면의 7개 봉우리 가운데 최고봉이며 ‘주왕이 대장기를 세웠다’고하여 유래되었다.

이 산의 대표적인 전설은 '중국 진(晉)나라의 후예 주도가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자칭하고 당(唐)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했다'는 것이다. 주도는 진나라에서 복야상서(僕射常書) 벼슬을 지낸 주의(周顗)의 9대 손으로 태어나 5세 때, 이미 글을 배워 11세 때,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통달했고 천문지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 되자 장사 1백 명을 거느리고 웅이산(熊耳山)에 들어가 1만 여명의 군중을 모으고 남양 땅에 웅거하였다. 주도는 스스로 후주천왕(799년)이라 칭하고 장안(長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곽자의(郭子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요동까지 쫓기었다가 이곳 신라 땅 석병산(周王山)숨어 은거했다는 것이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신라에 주왕(주도)을 잡아달라고 부탁, 신라 장군 마일성(馬一聲)장군의 5형제에게 토벌케 하였다.

마일성을 비롯, 이성 ,삼성, 사성, 오성장군의 군사들이 포위하고 공격하자 주왕의 군사들이 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주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폭포수가 절입구를 막고 있는 주왕굴로 들어가 숨었다. 그러나 주왕도 천명이 다했음인지 세수를 하기 위해 굴입구로 나왔다가 마장군 형제의 화살을 맞고서 운명했다고 한다.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주왕산 국립공원 북쪽 태행산과 대둔산의 북쪽으로 흐르는 내를 ‘서시천’이라 하는데 중국 진시황이 불사약을 찾기 위해 삼신산으로 보낸 ‘서시’(徐市-徐福)와 어떤 관련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 ‘동사(東史)에 상고하니 진한(辰韓)은 진(秦)나라 때 피난한 자가 와서 살던 나라이다.’라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청송도호부 편에 ‘이곳에도 반드시 봉곤(蓬壼; 신선이 산다고 하는 삼신산 중의 하나)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단구(丹丘; 신선이 사는 곳)가 아니더라도 그대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갈 수 있으리라’하였는데 주왕 전설이나 서시천의 지명이 시사한 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② 삼신산 중 최종 목적지- 봉래산 금란굴(金幱窟).

우리는 서복의 불로초 뱃길 따라 중국을 출발, 황해를 건너 방장산인 지리산, 영주산인 한라산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최종 목적지인 봉래산(金剛山)으로 향하면서 서시(徐巿, 徐福)와 관련 있는 땅이름이나 유적을 살펴보았다.

금강산은, 봄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화려하고 산수가 맑기 때문에 금강산, 여름에는 온 산이 녹음이 물들어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기암괴석의 산체가 뼈처럼 드러남으로 개골산(皆骨山), 또 열반(涅槃), 지달이라 부르며 예부터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혔다. 그리고 신라시대 화랑도들의 심신을 수련했던 곳이며 불교도들의 순례지이기도 하였다.

금강산에는 다음과 같은 금란굴에 얽힌 불로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란굴 천정에는 이름 모를 풀이 서너 포기 자라고 있다. 이 풀들은 아무리 가뭄이 들거나 날씨가 추워도 죽지 않고 항상 그런 모습을 유지하며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 이 풀들이 감로수를 받아 마시며 자란다’고 하여 불로초라 이름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천여년 전 대륙에 ‘보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 임금님께는 근심거리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항상 나라를 넘보는 말갈족의 위협이었고 또 하나는 외동딸 공주의 병약함이었다. 더욱이 말갈족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왕은 자신의 외동딸을 말갈족의 추장과 정략 결혼을 시킴으로써 사직을 보존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공주의 병은 더더욱 근심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조선의 금강산 금란굴 안에 신비의 불로초가 자라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왕은 즉시 신하에게 그 사실에 대해 물었으나 신하들은 ‘불로초를 캐기 위해 금란굴 가까이만 가면 풍랑이 몰아쳐서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급박하게되자 왕은 불로초를 캐기 위한 부대를 조직하여 조선의 금강산으로 파견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금강산에 도착한 보로국 사람들은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임무를 떠올리고는 금란굴을 향해 배를 몰았다. 이들은 ‘동남풍이 불 때에만 접근이 가능하다’는 말을 미리 듣고 왔으므로 동남풍이 불 때를 기다려 금란굴 아래에 배를 댔던 것이다.

몇 사람들이 굴 안으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는데 과연 천정에 서너 포기의 불로초가 자라고 있었다. 기쁨에 넘친 이들은 즉시 천정으로 올라가서 불로초를 캐려고 하였다. 바로 그 순간, 굴 안에 난데없는 번개가 치더니 이들을 삽시간에 저승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더욱이 밖에서 배를 대고 기다리던 사람들도 갑자기 불어오는 풍랑에 휩쓸려서 그만 죽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금란굴의 불로초를 캐려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고 불로초는 지금도 금란굴 천정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금강산에는 위와같이 신선이나 불로초에 관한 전설은 수없이 전해오고 있으나 서복에 관한 구체적인 전설이나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불로초가 자란다'는 금란굴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금란굴은 통천군 동쪽 12리에 있다. 안축(安軸)의 서문에 통주 남쪽 교외에 꼭데기 벗어진 봉우리가 둥그스럼한 것이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는데 그 봉우리의 깍아지른 벼랑에 굴이 있으니 넓이가 7, 8척은 되고 깊이 10여 보(步)는 된다. 처다보면 양쪽 벽이 나직하게 합하였고 내려다보면 물깊이를 알 수 없는데 굴이 원래 깊고 물기가 젖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으슥하고 축축하며 바람이 일면 놀란 물결이 흉용(洶湧)하여 갈 수가 없다. 전하여 오는 말이 '이 굴은 원래 관음보살의 진신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므로 사람이 지성으로 귀의하면 보살이 바윗돌에 나타나고 푸른 새가 날아오니 이래서 신령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또 통천군 북쪽 18리에 총석정(叢石亭)이 있는데 수십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 모여 섰는데 모두가 여섯 모이며 형상이 옥을 깎은 것 같은 것이 무릇 네 곳이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의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祥)의 네 신선이 이곳에서 놀며 구경하였기 때문에 이름하여 사선봉(四仙峰)이라 한다.'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고성군 편에 '고성 북쪽 7, 8리에 삼일포(三日浦)가 있는데 ... 물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푸른 돌이 평평하니 '옛날 네 신선(神仙; 花郞四仙)이 여기서 놀며 3일간이나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봉우리의 북쪽 벽에 단서(丹書) 여섯 자가 있으니 영랑도 남석행(令郞徒南石行)이라 하였다....정자를 지으니 곧 사선정이다.'고 기록되었다.

같은 책 회양도호부 편에 ‘금강산의 뛰어남은 홀로 천하에 이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경에 실려 있다. 화엄경에 말하기를 ‘동북방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曇無竭)보살이 1만 2천의 보살들과 더불어 항상 반야심경을 설법하는 곳이다’하였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선의 산이라 지칭하였다’고 불교의 보살과 도교의 신선에 대해 기록하였다.

③ 낭야로 돌아 온 서복, 8년 만에 제2차 동도(東渡) 출발.

서복의 제1차 출발은 B.C. 218년이며 제2차 출발은 B.C. 210년이므로 그 사이는 8년이다. <사기>의 기록과 같이 ‘서불 등이 나간 지 수년이 지났다’고 하였는데 서복은 제주도에서 돌아와 몇 년은 그냥 보내다가 책벌이 두려워 ‘대어의 방해로 선약을 구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시 출발할 것을 간청, 드디어 승낙을 받아 출발하게 되었다.

서불이 진시황과 함께 출발했는지 따로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동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지부에서 대어가 나타나 시황이 직접 사살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서불이 이곳까지 동행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행은 봉래에 이르러 서복은 북쪽으로 묘도 열도를 따라 출발하고 시황은 서쪽으로 평원진에서 병이 나서 사구(沙丘)에서 죽었다. 서복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제1차 항로였던 우리나라의 연안항로를 따라 남하하고 다시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삼신산 중 하나 남은 봉래섬(蓬萊島-金剛山)으로 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복의 선단이 봉래산으로 가는 도중, 역사서의 기록이나 전설, 땅이름(地名) 등 흔적을 남긴 곳을 조서, 확인한 결과를 지도에 표기하고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거제도(巨濟島) 해금강(海金剛): 거제도 으뜸의 명승지 해금강(명승 제2호)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이 바다를 뚫고 솟아올라 신비스러운 섬으로 삼신산(三神山)이라고도 부른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진시황이 보낸 서불이 동정녀 500명과 함께 불로초를 찾으러 오기도 했다고 하며 박영준 편 <한국의 전설>에 ‘선인 일행이 봉래산 가는 도중에 해금강에 올라 불로초를 찾으려다 찾지 못하고 대신 ’해동한국‘(海東漢國)이라 바위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기암절경의 이 섬을 갈도(葛島) 또는 약초가 많아 ’약초섬‘이라 불러오고 있다.

▶ 서시방골: 경북 영일군 흥해면 용암리. 마장재 옆에 있는 골짜기로 포항시 북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서복 선단이 상륙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주민들에게 확인 결과, 지명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다. 서복 선단이 고래가 출몰하는 울산 방어진 앞을 지나고 물결이 험한 포항의 곶(串)을 돌아 이곳 용암리 바닷가에 정박후 휴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 서시천(신한천, 한천, 한수): 주왕산 북쪽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반변천으로 흐르는 내이다. 주왕산 북쪽의 신촌약수는 이 강의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시천의 구체적인 지명유래는 확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왕산에는 중국 진(晉)의 후예 주도(周鍍)가 당(唐)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여 이곳에 들어와 은거했다는 전설이 있다.

▶ 봉래산 금란굴(金幱窟): 금강산의 이름은 봄- 금강산(金剛山), 여름- 봉래산(蓬萊山), 가을- 풍악산(楓嶽山), 겨울- 개골산(皆骨山), 또 열반(涅槃), 지달이라 부르며 예부터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혔다.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들의 심신 수련장이었으며 ‘금란굴에는 불로초가 자라고 있는데 보로국 공주가 병이 들어 신하를 보내어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모두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봉래산은 경북 청송군 안덕면의 사발봉(봉래산, 743m)을 비롯, 부산 영도의 봉래산(394m), 경남 분경군 농암면의 봉래산(789m), 충남 태안군 소원면의 봉래산, 충남 공주군 사곡면과 장안면의 봉래산(448m), 같은 군 반포면의 봉래산(342m), 대전 중구의 봉래산, 강원 영월군 영월읍의 봉래산(800m), 같은 군읍의 봉래산(799m) 등이 있다.

▶ 울릉도 봉래(蓬萊)폭포: 경북 울릉군 울릉읍 저동에서 1.5㎞에 위치한 3단 폭포, 윗폭의 높이 25m 원시림 사이로 떨어지는 장쾌한 폭포이다. 연중 4℃의 바람이 나오는 풍혈(風穴)이 있으며 신선이 살만한 절경의 섬이다.

▶ 울산 반구대((盤龜臺): 경남 울산시 울주구(蔚州區) 언양면(彦陽面) 대곡리(大谷里)에 있는 반구대(국보 제285호)는 선사시대의 암각화로, 태화강 상류 반구대 일대의 인공호(人工湖) 서쪽 기슭에 북쪽 으로 향한 암벽에 새겨졌다. 댐의 축조로 인해 평상시에는 수면 밑에 있다가 물이 마르면 그 모습을 보인다. 그 크기는 가로 약 8m, 세로 약 2m이고, 조각은 암벽 밑에까지 부분적으로 퍼지고 있어 밑에서부터 암각화 상단선 까지의 높이는 3.7m쯤 된다. 반반한 바위면에 고래․개․늑대․호랑이․사슴․멧돼지․곰․토끼․여우․거북․ 물고기․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 등을 쪼아서 표현하였다. 이 암각화의 연대에 관해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 설과 청동기시대의 작품이라는 설 등이 있다. 시기가 차이가 나는 표현양식과 내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암각그림 모두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원하는 그림을 추가하는 등 신앙행위의 장소로서 계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5. 결 론

'나무 보다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서복의 사례가 바로 그렇다고 보며 한라영주산과 정방폭포, 서복공원발전 마스터플렌을 구상할 때도 그런 측면에서 구상하기를 기대해 본다.

먼저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려던 삼신산(三神山)이 중국 발해, 한국(朝鮮), 일본 중 어느 것이 정답인가? 하는 문제를 검증,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발해는 불로초 모티브의 본고장이다. 즉 ‘해시기관’(海市寄觀)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둘째, 한국의 삼신산은 역사기록과 유물, 유적, 문화, 지명이 남아있고 서복이나 그 후손이 세운 나라(辰韓=秦韓)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셋째, 일본은 서복이거나 일부 동낭동녀들이 동도하여 문화를 전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복의 대선단이 2-5년(최대 8년)동안 발해지역만 누비며 불로초를 찾다가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며 제1차 동도에서는 방장, 영주에 왔다가 제주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고 제2차 동도시에는 봉래산까지 갔으나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울산지역(반구대중심)에서 나라를 건국할 기틀을 마련하고 그 일부는 일본으로 동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라영주산 및 정방폭포 발전프로젝트는 먼저 서복기념관의 문제점부터 밝히고 이를 시정하거나 재구성하여야 하겠다. 서복전시관의 주요 주제별로 구분, 제안한다면 첫째 서복관, 둘째 불로체험관, 셋째 국제문화교류관으로 나눌 수 있겠다.

서복관은 현재의 서복전시관을 재구성 전시중심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불로체험관은 건강과 장수와 관련되는 전시,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건강교실로 운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각종 약초와 그 효능, 의약제품, 국내외의 명약, 명품 등 기념품으로 구입할 수도 있는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명소가 될 수 있겠다.

국제문화교류관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 문화를 상호 연구 교류하며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국제간 친선을 도모하면서 분쟁의 소지를 풀어갈 수 있는 장(場)으로 활용한다. 또한 서복석상의 위치나 높이, 방향 등을 재고,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신산(神山) 서복 불로초의 현장인 영주산(漢拏山) 영실에서 불레오름 또는 정상까지 리프트시설을 노약자 및 국내외 관광자를 위하여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정방폭포 앞바다에 대형 서복의 불로초 누선(樓船)모형을 제작, 전시, 참관할 수 있는 안을 제시하였다.

끝으로 기념관을 운영하는 시스템 외에 ‘주제를 연구하는 기능’을 확충, 기록의 오류수정을 비롯, 각종 전시형태의 개선, 체험활동, 홍보활동을 부단하게 펼칠 것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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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의 전설에 대해서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복

서복(徐福)은 문헌상으로 서복 또는 서불(徐巿)의 이름으로 나타난다.('徐巿'는 '서불'이라고 읽는다. 이하 서불) 서불은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서 진나라의 방사(方士)로 일했다. 그의 생애 동안 불로초를 찾아 동해를 두번 가게 된다.

1) 개요: BC 221년(시황 26년)에 6국을 복속하고 중국을 천하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제나라 출신의 서불(徐福)은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야 할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시황 28년) 진시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저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史記의 秦始皇本紀)

그리하여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그의 두번에 걸친 여행이 시작된다. 진황도를 떠난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그는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2) 서귀포 유래: 진시황의 사자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도에 왔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서귀포의 지명은 진시황(秦始皇)의 명령으로 당시 관직에 있던 서복(徐福)이 제주에서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고 ‘서쪽(西向)을 향해 귀로(歸路)에 오른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하며 이곳에서 북을 두드리며 놀면 교룡이 나와 같이 춤을 춘다는 전설이 전하는 등 역사적, 경관적 가치가 있는 명승지로 남아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는 서불이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온다.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대만을 가리키며,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정방폭포의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를 근거로 단주(亶洲)를 제주도라고 주장하고 있다.[1]

3) 서불의 행적: 서불의 상소문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요,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옛 문헌에도 서불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고려 시대 이인로의 《파한집》과 조선 시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수록되어 전해진다.[2]

일본에서도 미야자키 현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서불의 흔적이 남아있다.

4) 서불 관련 유적:

1,
남해 이동면 양아리 금산 금석문
2, 제주도 서귀포시 서복전시관(서복공원)과 정방폭포

5) 한국 문학 속의 서불: 심청가, 선상탄(船上歎), 노계집(蘆溪集) 중 박인로의 가사, 1605년(선조)

6) 관련 서적:

1,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2,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3, 삼국지(三國志) 오서·오주권전(吳書·吳主權傳)
4,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5,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6, 봉선서(封禪書)
7,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이형석(제6회 서복문화 동아세아 국제학술대회, 2007.10.19)

7) 주석:

1. 이형석 (2007년 10월 19일).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제6회 서복문화 동아세아 국제학술대회》. 2008년 4월 21일에 확인.

2. 김강임. "서불과 동남동녀는 어디로 갔을까?", 《오마이뉴스》, 2003년 10월 14일 작성. 2008년 4월 21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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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사람이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며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성경속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처럼 불로초가 거제도의 산에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아직도 무지한 인간들이 자세히 관찰하지 못하고 찾지 못해서 숨어 있는 것일까? 각자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상기 자료는 약초연구가로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각종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우들에게 내고향팔도강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통해서 옛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꿰뚫어보고 팔도강산에 전해 내려오는 각종 전설과 내력을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삶의 통찰력을 갖게 하고 조금이나마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함으로써 진정한 위로와 힘을 솟구치게 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정보의 목적으로 공개하는 것임을 밝혀 둔다.  

(글/ 초연구가 & 동아대 & 신라대 대체의학 외래교수 전동명)

문의 및 연락처: 010-2545-0777 ; 051-464-0307

홈주소: http://jdm0777.com

페이스북 주소: http://www.facebook.com/jdmsanyacho

이메일: jdm0777@naver.com


아래의 경상도 지방에 있었던 역사 및 다양한 설화들도 함께 참조해 보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참조: 아래의 진시황과 관련된 서복의 전설들도 함께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1. 강선대(降仙臺) 무엇인가?
  2. 해금강(海金剛)의 선남선녀 무엇인가?
  3. 서불(徐市)과 불사약(不死藥)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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