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부(朝鮮賦) 무엇인가?

 
기원 1488년 성종 19년에 중국 사신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의 풍습

 

 

 


▶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을 왕래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조선 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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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기원
1488년(성종 19년)에 사신으로 온 동월(董越)은, 조선 사행 경험을 바탕으로 선여정(先旅程) 후회상(後回想)형식으로 4장 25단락으로 이루어진, 장장 464구의 「조선부(朝鮮賦)」를 지었다. 「조선부(朝鮮賦)」를 짓는 데는 거의 1년이 걸렸고 이를 간행하기까지 3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조선부(朝鮮賦)」는 황화집(皇華集)에 소재한 어느 작품보다도 가장 널리 알려져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동월 자신을 지금까지도 기억하도록 만든 빼어난 작품이다.

「조선부(朝鮮賦)」에서 동월은 조선을 기자의 유풍을 간직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문헌의 나라로 그렸으며 또 잡희와 연회 상차림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조선이 사신을 얼마나 대대적으로 환영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대접했는지도 나타내었다. 곧 조선은 명과 매우 친근한 나라이자 문헌지국과 소중화국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다. 또한 「조선부」의 본문과 주는 명조와 다른 조선조의 풍습을 나타내는데 치중하여, 조선이 비록 소중화국이지만 그 나름의 고유한 문화를 지닌 또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임을 드러냈다. 이로써 「조선부」는 단순히 공부자가 가고 싶어 했던 군자의 나라라든가 불로초가 있는 신선의 나라라든가 하는 막연한 이미지에서,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 조선의 참 모습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동월은 1개월여의 짧은 체류 기간을 통해 조선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또 많은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감명과 애정은 조선을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로 이어졌고, 이러한 의지의 결과물이 바로 「조선부」이다. 「조선부」는 조선을 천하에 널리 알리는 역할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동월 이후에 오는 사신들은 제2의 <조선부>를 짓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고 또, 조선의 자연과 문물을 장편시와 연작시로 표현한 사신도 많았으니, 결과적으로 사신들의 창작 의지를 북돋아 조선을 더욱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하겠다.

[<< 조선부(朝鮮賦) 번역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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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저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로,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팔도(八道)가 별처럼 벌여 있는데, 경기(京畿)가 홀로 으뜸이 되고, 충청(忠淸)ㆍ경상(慶尙)ㆍ황해(黃海)ㆍ강원(江原)을 날개로 삼았으며, 동북쪽의 명칭을 영안(永安, 지금의 함경도)이라 한 것은 그 뜻이 경계를 견고히 하려는 데에 있다. 평안(平安)은 땅이 조금 척박하고, 전라(全羅)는 물산이 가장 풍부하였다.

경기ㆍ충청ㆍ경상ㆍ황해ㆍ강원ㆍ영안ㆍ평안ㆍ전라는 모두 도(道)의 이름인데, 평안은 곧 옛날 변한(弁韓)의 땅이고, 경상은 옛날 진한(辰韓)의 땅이며, 전라는 옛날 마한의 땅이다.

그 넓이는 거리가 2천리이고, 길이는 배가 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이고, 남북은 4천리라고〈지서(誌書)〉에 쓰여져 있다.

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顓)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 시(詩)와 서(書)가 있고, 상(庠)과 교(校)가 있다. 선비가 궁하면 향(香)을 피우거나 좀을 물리고, 문장이나 꾸미는 하찮은 일을 하며, 벼슬길이 트이면 붕새를 잡거나 표범을 변하게 한다.

그 나라는 조정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년(酉年)에 행하고,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년(未年)에 행한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기술을 잘 익히며, 관청에서는 옛것을 많이 본뜨고, 봉급으로는 논밭을 주며, 형벌은 궁형(宮刑)은 쓰지 않고, 도적이라야 옥에 가두어 큰 칼을 씌운다. 환관들도 모두 궁형(宮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릴 때에 다쳤거나 질환이 있는 자를 뽑아 썼기 때문에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도적은 가벼이 용서해주지 않았다. 이 일은 3-4명의 통역관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말이 모두 같았다. 무역은 한결같이 곡식이나 베로써 하되, 그 쌓아두는 것에 따라 이익을 남기고, 쓰는 것으로는 금이나 은은 모두 다 금하였으므로, 비록 매우 적은 양이라도 따졌다. 민간에서는 매우 적은 양의 금은이라도 쌓아두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곡식이나 베를 많이 가진 이를 부잣집이라 하였다. 무역 매매는 한결같이 이 곡식과 베로써 하였다. 그 나라에 탐관(貪官)이 적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답의 세(稅)는 결(結)로써 묘(畝)를 대신하였는데, 소로 나흘을 갈 정도라야 4두(斗)의 조세(租稅)를 내었다. 한 마리 소의 힘을 다해서 나흘 동안 가는 땅을 1결이라 한다. 태학(太學)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에는 종류에 따라 인원을 정하는데, 두 개의 재(齋)에 기숙(寄宿)하는 자는 모두 두 때의 녹(祿)을 먹는다. 성균관(成均館)에는 항상 5백명을 양성하는데,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써 뽑은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고, 시부(詩賦)로써 뽑은 자를 진사(進士)라 하며, 또 남(南)ㆍ중(中)ㆍ동(東)ㆍ서(西)의 사학(四學)에서 승보(升補)된 자를 승학(升學)이라 한다. 사학에서 북쪽을 기피하여 감히 이름 짓지 못한 것은 조정을 높여서이다. 생원과 진사는 상재(上齋)에 거처하고, 승학은 하재(下齋)에 거처한다. 생원과 진사로 전시에 합격한 자들만이 식년(式年)에 과거를 보아 비로소 관리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양성된다.

식년은 3년마다 있는데, 33명만 뽑는다. 관리로서 삼품이 아니면 비단으로 몸을 치장하지 못한다. 낮은 관리는 모두 주포(紬布)를 입고 저사(紵絲)는 입지 않는데, 그 짙푸른 색깔의 베옷도 항상 입지 않고 잔치 때라야 입는다. 백성들은 한 전(廛)씩을 받되 벼나 삼은 모든 움을 파고 넣어둔다. 그 간직하는 것도 요(遼) 나라 사람들과 같다. 그 가장 말할 만한 것은 그 나라에 80세가 되는 노인이 있으면 그 남녀들에게 모두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어 은혜를 널리 베푼다. 해마다 늦가을에 왕은 팔십 노인에게 전(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왕비는 팔십 부인에게 궁(宮)에서 잔치를 베풀어준다.

자식에게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어서, 비록 종이라도 그렇게 행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효를 이루게 한다. 그 나라 풍속에 상복을 입는 것은 반드시 3년이고, 또 여묘(廬墓)살이 하는 것을 숭상한다. 종에게는 보통 백일의 상기(喪期)를 허락하고, 3년상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허락한다. 왕도(王都)에는 귀후서(歸厚署)를 설치하고 관곽(棺槨)을 쌓아두었다가 빈궁한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 나라의 관곽은 소나무를 많이 쓴다. 그러나 한 도(道)에서 보면 적당한 재목이 적은 듯 하기 때문에 왕도에 관청을 설치하여 편리를 보아준 것이다.

향음주례(鄕飮酒禮)에는 술잔을 드는 의식을 엄격하게 하고, 제기를 놓는 것은 질서 있게 하여 그 시끄러움을 경계한다. 의식은 중국과 같고 조정이라는 두 글자만을 고쳐서 국가라고 하였다. 혼인에는 중매하는 것을 신중히 하고 재가(再嫁)해서 난 자식은 아무리 학문이 많아도 사류(士流)에 끼이지 못한다. 그 풍속에는 재가를 부끄럽게 여겨 재가해서 낳았거나 행실이 나쁜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사류의 등사판(登仕版)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벌에는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을 가장 중히 여겨, 대대로 양반(兩班)에 속한 사람이 혹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면 모두 예답지 못한 행동이라 한다. 조상 때부터 일찍이 문무(文武)의 벼슬을 겸한 사람을 양반이라 한다. 양반의 자제에게는 다만 글 읽기만 허락하고 기예(技藝)는 익히게 하지 않는다. 혹 소행이 착하지 못하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난한다. 심지어는 집안에 도박 기구의 소장(所藏)도 허락하지 않는다. 바둑판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 자제들에게도 모두 익히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사에 있어서는 모두 가묘(家廟)를 세우는데, 대부(大夫)는 삼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선비와 서민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만을 지낸다. 이것은 모두 기자(箕子)로부터 그 풍습을 전한 것이고, 또 중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본받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관반사(館伴使) 이조 판서(吏曹判書) 허종(許琮)의《구도풍속첩(具到風俗帖)》에 나와 있다.

대개 성곽을 쌓을 때에는 모두 높은 산 앞에 쌓아서 가끔 산봉우리나 산기슭으로 나오더라도 활처럼 굽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큰 것은 날고 나는 듯한 높은 성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높고 높은 표관(豹關)처럼 웅장하다. 대개 의순(義順)에서 선천(宣川)을 지나는 곳에 의순은 객관(客館)의 이름으로 의주 압록강 동쪽에 있으며, 압록강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된다. 선천은 군(郡)의 이름으로 의주 동쪽에 있다. 그 사이에 비록 험준한 용호(龍虎)나 산 이름으로 용천군(龍川郡)의 진산(鎭山)이다.

웅골(熊骨) 산 이름으로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 있지만, 곽산(郭山)이 더욱 높이 하늘에 솟아 있다. 곽산은 군의 이름으로 그 성은 산꼭대기에 있다.《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이름 하였다. 또 신안(新安)에서 객관의 이름으로 정주(定州)에 있는데, 그 앞에는 누각이 있다. 대정(大定)을 지나는 곳에 강 이름으로 박천군(博川郡)에 있다.

바로 옛날 주몽(朱蒙)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래서 또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한다. 그 산으로서 비록 천마(天馬) 산 이름으로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봉두(鳳頭)의 놓은 산이 있지만, 봉두는 곧 가산군(嘉山郡)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으로 가면 오직 가산령(嘉山嶺)이 가장 높다. 그 재에는 효성(曉星)과 망해(望海)란 곳이 있는데, 모두 사절(使節)들이 지나는 곳이다.

안주(安州)가 또 졸졸 흐르는 강물에 의지하고 있다. 안주성에서 살수(薩水)를 내려다보면 위에 백상루(百祥樓)가 있는데, 곧 수(隋) 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이 강을 또 청천강(淸川江)이라고도 하며, 성 안에는 안흥관(安興館)이 있다. 군(郡)으로는 숙천(肅川)이 있고, 읍(邑)으로는 순안(順安)이 있는데, 지세는 모두 들판에 있지 않다. 누(樓)는 숙녕(肅寧) 숙녕관 앞에 누각이 있다 이고, 관(館)은 안정(安定) 관의 이름으로 순안현에 속해 있다. 인데 지대는 조금 널찍하고 조용한 편이다. 오직 저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만은 지대가 가장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그 지세에 따라 이름을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을 임해서 성을 높이 쌓았는데, 얼마를 지내다가 또 가까운 북쪽 산의 험한 곳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또 그것이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겨서, 다시 그 성 북쪽에 한 성을 쌓았는데, 동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이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금수산(錦繡山)이 닿아 있다. 기자 이후로 전승하여 동한(東漢)에 이르러, 준(準)이란 사람이 연(燕) 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마한 땅에 도읍을 옮겼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없어졌다. 이 밖의 여러 고을은 토질이 대부분 마르고 붉으며, 간간이 누런 흙이 있으나 또한 모래와 돌이 섞여 있다. 오직 이 성 가까이에 있는 흙만이 차져서 밭도랑이나 봇도랑의 형상이 남아 있다. 옛 성 안에 기자가 구획한 정전제(井田制)의 형상이 아직 남아 있으니, 곧은 길 같은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벼나 삼이나 콩이나 보리를 심기에 적당하며, 그 풀은 무성하고 그 나무는 키가 크다. 이때에 와서야 중국에서처럼 높은 버드나무가 있게 되었다. 나뭇잎에는 우는 매미가 있고, 풀은 빼어나고 무성하였다. 그리고 금수봉(錦繡峯)은 멀리 우뚝한 용산(龍山)에 접해 있고 용산은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하고, 또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하는데, 금수산 북쪽 20리에 있고,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이 있다. 부벽루(浮碧樓)는 아래로 도도(滔滔)히 흐르는 패수(浿水)를 굽어본다. 대동강이 바로 옛날 패수이다.

옛날의 기린(麒麟)은 아직도 석굴(石窟)에 남아 있고, 기린석은 부벽루 밑에 있는데, 대대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朝天石, 하늘에 조회하는 돌) 위로 나와 승천(昇天)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한다. 타양(駝羊)은 반쯤 산허리에 버려져 있다. 옛날의 돌말과 구리 낙타가 모두 가시덤불 속에 있다. 궁전은 옛터가 남아 있고, 소나무는 위태로운 다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으니, 석양에 지는 해처럼 그대로 머물지 않는 지난 일을 슬퍼한다. 공묘(孔廟)의 뜰에 세워져 있는 형상은 모두 면류관 쓰고 의상을 갖추고 있고, 또한 청금(靑衿, 선비들)도 길가에 성대하게 늘어서 있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건과 띠는 나부끼고 날리며, 가죽으로 만든 신은 밑이 뾰족하면서 판판하다. 문후할 때는 몸을 굽히고 나아갈 때는 종종 걸음으로 걷는다. 생도들은 모두 부드러운 비단 건을 썼고, 푸른 비단 적삼에 하나의 띠를 늘어뜨렸다. 발에는 코가 뾰족하고 밑이 판판한 가죽신을 신었는데, 모두 버선을 신었다.

동쪽에는 기자의 사당이 있어 나무 신주를 예설(禮設)하고, 거기에 쓰기를, “조선 후대 시조”라 하였다. 이는 단군을 높이어 그 나라를 개창(開倉)한 이라 하였으니, 기자가 그 대를 잇고 왕통(王統)을 전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군은 요(堯) 임금 갑진년에 여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뒤에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사당은 기자 사당의 동쪽에 있는데, 나무 신주를 세우고 쓰기를, “조선 시조 단군 신위(神位)”라 하였다.

기자묘는 토산(兔山)에 있으니, 유성(維城)의 서북방이다. 기자묘는 성의 서북쪽 토산에 있는데, 성에서 반 리도 되지 않으며 산세는 매우 높다. 두 개의 석상(石像)이 있어서, 마치 당 나라의 건거(巾裾)와 같은데, 알록달록한 이끼가 끼어 있어, 마치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은 것과 같다. 좌우에는 젖을 먹이면서 꿇어앉은 석양(石羊)이 벌여 있고, 비갈(碑碣)은 머리를 든 귀부(龜趺)에 실려 있다. 둥근 정자를 지어 절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어지럽게 돌을 포개 놓아 뜰의 한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그 근본에 보답하려는 뜻은 융성하지만, 물건을 갖추는 예의로서는 소홀한 것이다.

대동강을 건너면 산이 차츰차츰 높아져서, 생양(生陽) 관의 이름 에 비로소 다다르게 되지만, 길은 더욱 꼬불꼬불하다. 영루(營壘)가 소나무 그늘 사이에 남아 있어서, 마치 겹겹이 있는 옛 무덤과 같다. 서로 전하기를, “당 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의 진터다.” 하는데, 크고 작은 것이 뒤섞여 있어서 전혀 질서가 없는 것이 너무도 기주(冀州)와 유사한 점이 있다.

내가 처음 기주에 갔을 때에 의심하여 어떤 늙은 군인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이것이 당 나라 왕이 고구려를 칠 때의 양식이라고 속인 무더기”라 하였다. 즉 그 밑에는 모두 흙을 쌓고 그 위에는 쌀을 덮어서, 마치 단도제(檀道濟)의 양사창주(量沙唱籌) 따위와 같은 것이다. 생각건대 이곳의 영루도 그런 따위일 것이다. 바다 위에서 파도를 바라보니, 넓은 도량의 크고 넓음을 알겠다. 땅은 황해도에 속했는데, 북쪽은 모두 산이고, 그 남쪽은 바다에 접하였다.

성불(成佛) 고개 이름 의 웅장한 관문에는 버려진 돌들이 층층이 쌓였는데, 북으로는 자비(慈悲) 고개 이름 에 접하고, 남으로는 발해(勃海)에 다다랐다. 앞서 원(元) 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국조(國朝 명(明))에 이르러서는 바깥이 없음을 보였다.

성불재는 북으로는 뒤에 산이 있고, 남으로는 뒤에 바다가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다. 한 관문 어귀에 옛날 쳤던 추성(甃城)의 방석(方石) 두어 무더기가 있었다. 한 역관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 나라 때에는 여기를 그어 경계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그 관문의 어귀이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에서 이미 그 한 도 남짓을 버린 것이 된다. 우리 성조(聖祖, 명태조)는 그것을 모두 경계로 삼았으니, 공손히 예를 행하는 것이 옛날에 비해서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그 고개는 황주에 속해 있다. 연진(延津) 강 이름ㆍ검수(劒水) 관의 이름ㆍ봉산(鳳山) 주(州) 이름ㆍ용천(龍川) 관의 이름 의 환취(環翠)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하며, 환취는 누대 이름으로 봉산주 관내(館內)에 있다. 총수(葱秀)에는 구름이 연해 있다. 산이 벽처럼 서서 물가에 임해 있는데, 높이 솟고 빼어나고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總秀)였는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일찍이 기문을 지은 일이 있다. 보산(寶山)에는 서기(瑞氣)가 날아오르고 금암(金巖)에는 고인 물이 뚫는다. 보산과 금암은 모두 관의 이름으로 평산부(平山府)에 속해 있다. 성거(聖居)ㆍ송악(松嶽)ㆍ천마(天磨)ㆍ박연(朴淵)은 성거ㆍ송악ㆍ천마는 모두 산의 이름이고, 박연은 폭포 이름이다. 송악이 그 진산이다. 성거와 천마는 동북쪽에서 뻗어 나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푸른 하늘에까지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는 마치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다. 그 중의 한 봉우리가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물러앉아 낮은 편이니, 마치 시자(侍者)의 모양과 같은데, 항상 안개와 구름 속에 쌓여서,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내 일찍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개성(開城)으로 돌아와 머무니 유도(留都)가 있는 곳이다. 위봉(威鳳) 문의 남은 터가 있어 북쪽 기슭에 버려져 있고, 위봉은 누대의 이름인데 왕건(王建)이 앞문이다. 반룡[蟠龍: 청룡(靑龍)]의 옛 언덕이 있어 동쪽의 밭두둑 길로 나온다.

동쪽에 능묘(陵墓)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李氏)의 선대 무덤이다. 신물(神物)은 영추(靈湫)에 엎드려 있고 폭포는 긴 내를 걸려 있다. 산꼭대기에 용추 폭포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가 여기에 도읍했을 때 가뭄을 만나 임금이 친히 거기에 가서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떤 도술을 부리는 자가 용을 쳤더니, 용이 물에서 나와 왕을 뵈었다. 왕이 지팡이로 용을 쳐서 비늘 몇 개를 떨어뜨렸는데, 지금도 그 비늘이 국고(國庫)에 수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통역관 이의(李義)는 개성 사람으로 일찍이 내게 이 사실을 말하고, 또 왕에게 아뢰어 그 비늘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려 하였으나, 나는 쓸데없는 일이라 여겨 드디어 그만두게 하였다.

여염집은 만 정(井)이나 되고 곡물은 백 전(廛)이 된다. 관청은 당속(堂屬)의 높낮이를 한정하고 묘학(廟學 개성의 성균관)에는 성현의 엄중한 소상(塑像)을 안치하였다. 지금의 군학(郡學)은 바로 왕건 때의 성균관으로, 성현을 모두 소상(塑像)으로 한 것은 평양과 같다. 그 망루(望樓)는 곧 왕씨 시대의 태평관(太平館)인데, 다른 관보다 유독 빼어나 웅장하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반수(泮水)에서 향기를 피우고 운초(芸草)는 묵은 책 속의 좀을 물리친다.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펄럭이고 달 밝은 밤에 피리 소리 들린다. 그 생산물은 풍성하여 원래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도 밀집(密集)하여 서경(西京)이 견줄 바가 아니니, 이는 왕씨가 여기에서 왕천하한 것이 4백 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요(瑤, 공양왕)가 혼미(昏迷)해서 비로소 나랏일을 이씨에게 임시로 맡기고 명목상 고려가 이곳을 통치한 것은 서너 개의 성(姓)을 바꾸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얻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본조 명 홍무(弘武) 25년에 고려 국왕 왕요(王瑤)가 혼미하여 사람을 많이 죽여서 민심을 잃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문하시랑 이씨인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국사를 임시로 맡기고, 그 나라의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보내와서 명령을 청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의 옛날 이름을 지금의 휘(諱)로 바꾸고, 또 국호(國號)의 개칭을 하니, 상(上, 명제)이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이름 중에는 오직 ‘조선’이 가장 좋고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고 명하여, ‘조선’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뒤에 드디어 지금의 한성부(漢城府)로 천도하였다. 이 때문에 개성을 유도(留都)라 한 것이라? 한다. 임진(臨津)을 건너고 임진은 강 이름으로 장단부(長湍府)에 속해 있다. 파주(坡州)에 멈추어 멀리 한성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운이 높이 오른다.

이에 벽제(碧蹄, 관의 이름)를 지나고 홍제(弘濟, 관의 이름)에 오르면 여기가 왕경(王京)으로 동쪽에 우뚝 솟아 있으니, 높고 높은 삼각산(三角山)으로 자리를 정하였는데,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허리에 있다. 그 산마루를 바라보매 여러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푸르고 푸른 소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북으로는 천길 이나 되는 형세가 연이어 있으니, 어찌 천 명의 군사만을 누를 뿐이랴? 서쪽으로 한 관문을 바라보면 그 길은 한 기마(騎馬)만이 다닐 만하다. 홍제에서 동으로 반리를 못 가서 자연적으로 된 한 관문이 있어서, 북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으로는 남산에 접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기마가 다닐 만하니, 그렇게 험할 수가 없다. 산이 성 밖을 둘러싸매 힘차게 나르는 봉황이 빛을 내뿜는 듯하고, 동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그 형세가 모두 팔짱을 끼고 둘러 있는 듯하다. 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였으매 하얗게 쌓인 눈이 막 개인 듯하다.

삼각산에서 남산까지의 산 빛이 모두 희고 희미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과 같다. 모화관(慕華館)은 서남쪽 산기슭에 세워졌고, 숭례문(崇禮門)은 바로 남쪽에 있다. 모화관은 성에서 8리에 있는데, 가운데는 전(殿)이고, 앞에는 문이다. 모든 명제의 조서가 이르면 왕이 나가 길 왼쪽에서 맞이한다. 숭례는 그 나라의 남문이다. 하나는 주원(周爰)의 황화(皇華)가 쉬는 것이고, 하나는 회동(會同)의 문궤(文軌)를 맞이하는 것이다. 조서가 오면 왕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신하는 예복(禮服)을 차려 입고 고니처럼 반듯이 서서 모신다. 거리는 모두 늙은이 어린이들로 가득 차고, 누대는 모두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여염집들은 모두 반포하여 내려준 예제(禮制)처럼 채색 비단을 벌여 놓고 그림을 걸어 둔다. 음악 소리는 느린 듯하면서 빠르고, 차린 음식은 빛나고도 화려하다.

침단(沈檀)은 새벽해가 연기와 안개를 내뿜는 듯하고, 도리(桃李)는 봄바람에 날리는 비단처럼 아름답다. 계속해 모여드는 거마(車馬) 소리가 울리고 끝없는 어룡(魚龍) 유희가 나온다. 이하는 모두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는 광경을 말한 것이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 해를 싸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고흥문(高興門) 등은 지극히 교묘하다. 원숭이는 아들을 안고 무산협(巫山峽)의 물을 마신다. 사람이 양 어깨에 춤추는 두 명의 동자를 세운다. 곤두박질을 하매 상국사(相國寺)의 곰은 셀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가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려가매 가볍기가 사뿐사뿐 걷는 미녀와 같고, 외나무다리를 밟으매 날뛰는 산귀신인가 놀라며 본다. 사자와 코끼리를 장식하는 데에는 모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씌웠고, 원추새와 난새의 춤을 추는 데에는 들쭉날쭉한 꿩 꼬리를 모았도다.

이는 황해도나 서경(西京 평양)에서 추는 솔무(率舞)를 보아도 모두 이처럼 좋고 아름답지는 못하였다. 평양과 황주에서도 모두 오산붕(鰲山棚)을 만들어 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였지만, 유독 왕경이 가장 훌륭하였다. 태평관(太平館)이 있고, 숭례문 안에 있는 것으로 가운데는 전이고, 앞에는 전문(殿門)이 있으며 뒤에는 누각이 있고 동서에 곁채가 있다. 그 까닭은 그곳에서 천사(天使)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종과 북이 있는 누대가 있어 성 안의 네거리 종로 한복판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또한 길가에 높고 높도다. 잔치하고는 쉬고 즐기며 또 논다. 와탑(臥榻)에는 여덟 폭 병풍을 둘러치고 이 나라 풍속에 그림을 거는 일은 적은데, 모든 공관(公館)에는 네 벽에 모두 병풍을 세웠다. 병풍에는 산ㆍ물ㆍ대ㆍ돌을 그리거나 혹 초서(草書)를 썼는데, 높이는 2ㆍ3척이다. 와탑도 그러하다. 성긴 주렴에는 반쯤 걷힌 향구(香鉤)를 올려 둔다. 닭이 울면 문안 오는 사자(使者)를 기다리고, 날마다 일찍 왕은 그 나라의 재상 한 명과 승지 한 명을 보내어 문안한다. 말을 타고 나가면 길 곁의 망아지가 운다.

집어(緝御)가 있어서 심부름을 해 주고, 종이와 먹이 있어서 글을 주고받는 데에 이바지한다. 이는 임금을 공경함에는 반드시 그 사자에게까지 미치므로 예의상 우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중화와 같아서 모두 단청을 칠하고 이 나라에는 은주(銀硃)가 없기 때문에 단청으로 대신한다. 오동나무 기름도 없다. 기와를 얹는다. 문무(門廡)와 편전(便殿)에는 모두 기와를 쓰는데, 중화의 관공서의 덮개와 같다. 문은 세 겹으로 하여 배라(杯螺)의 번쩍이는 빛을 죽이고 대궐의 앞문은 광화, 둘째 문은 홍례, 셋째 문은 근정(勤政)으로, 쇠못과 고리만을 썼다. 전(殿) 중앙에는 푸른 유리가 있다. 오직 정전(正殿)만을 근정이라 하고 푸른 유리를 쓰고, 다른 곳에는 쓰지 않는다.

당사(堂戺)는 일곱 계단의 차등이 엄격하고 계단은 모두 거칠게 간 석추(石甃)로써 하였는데, 형세가 매우 높고 위에는 자리로 덮었다. 비단 창은 여덟 창문의 영롱함에 맞추었다. 전의 동서의 벽에는 모두 요격자(腰膈子)를 설치해 놓고 조서를 받을 때에는 다 갈구리로 건다. 혹은 높은 산으로 한계지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기도 한다. 근정전과 인정전에는 모두 각각 문을 만들어 들어가니, 모두 산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대개 모두 편편한 곳을 가려서 터를 잡지 않는 것은 오직 그 기세가 웅장하게 보이고자 해서이다. 조서가 전(殿)의 뜰에 이르면 임금은 몸을 굽히고, 세자(世子)와 배신(陪臣)들은 좌우에서 부축하고, 헌가(軒架 경쇠를 다는 시렁)를 섬돌 위에 설치하고, 장막을 정우(庭宇)에 둘러친다. 전의 앞과 섬돌 위에는 모두 흰 베로 만든 장막을 둘러치니,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의장(儀仗)은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음악을 연주해서 축어(祝圉)로 마친다. 소호(召虎)가 절하는 것과 숭산(嵩山)에서 외친 세 번의 만세 소리와 같고, 봉의춤과 사자춤으로 양반을 거느린다. 비록 음성은 알 수 없으나 그 예의는 또한 취할 것이 있다. 예는 한결같이 중화를 따르는데, 좋은 향을 세 번 피우고 머리를 세 번 두드리며, 만세를 부를 때에는 시위(侍衛)들이 모두 팔짱 끼고 응한다. 궐정(闕庭)의 설치물도 거두고 하사품도 내려지면 동서로 갈라서서 손과 주인을 나눈다. 조서를 펴기를 마친 뒤에 인례(引禮)가 천사(天使)를 인도하여 중간에서 내려와 장막이 있는 동쪽으로 간다. 왕이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려 천사를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동으로 전에 오르고, 왕을 인도하여 역시 중간 계단에서 서쪽으로 전에 오르게 한다. 천사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왕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에 앉는데, 왕의 자리는 부사(副使)의 자리와 마주 대하되 조금 아래로 반 자리에 앉는다. 서로 절하고 예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통역을 빌어 말을 전한다. 즉 명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소국(小國)으로서 마땅한데, 베풀어 주시는 큰 은혜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물방울과 먼지를 다 없애더라도 보답할 수 없으니, 비록 죽은들 어떻게 보답하리까? 오직 날마다 하늘이 보호하신 주 나라 시를 노래하고,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듯한 황제의 도움을 빌 뿐입니다.

비로소《시경》의 습상(隰桑) 편의 희견(喜見)을 읊고,《춘추》의 예서(禮序)를 강합니다. 생각하건대, 여러 나라가 모두 천자의 사자를 앞세우는데, 더구나 맑은 빛이 날로 과인에게 가까움이겠습니까? 근정전에 차례로 앉은 뒤에 인삼탕 한 잔씩을 다 마시고, 왕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 통역 장유성(張有誠)과 이승지(李承旨)를 돌아보고, 말을 전하기를, “소국의 신하로서 명 나라 조정을 높여 섬기는 것이 예의에 마땅하온데, 칙서(勅書)를 내려 이처럼 나를 격려하시니, 큰 은혜를 갚기 어렵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명 나라는 조선이 본래부터 충성과 공경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 은전(恩典)이 다른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연이어 말하기를,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말을 마친 뒤에 우리 두 사람을 보내어 홍례문으로 나가 가마에 타기를 기다려 물러갔다. 우리 두 사람은 태평관으로 돌아와 여러 배신들을 차례로 다 만났다.

왕이 따라와 잔치를 베풀려고 관문 밖에서 기다리며 동쪽을 향해 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집사(執事)가 나에게 알리자, 우리 둘이 나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면서 들어가, 뜰에 이르러 서로 읍하고 차례로 앉아 술잔을 들어 주고받았다. 술잔을 마시려 하자, 임금이 턱으로 두 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시경》에, ‘습지에 뽕나무가 아름다우니 그 잎이 무성하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그 즐거움이 어떠한고.’라고 하였소이다. 나는 두 분 대인(大人)을 뵈오매 마음속의 기쁨이 끝이 없소.”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도 그의 어짊을 칭찬하고 또 지나온 길에서 후히 대접받은 것을 사례하였다. 장차 자리에 나아가려 할 때 다시 왕과 예로 사양하자, 왕이 이내 말하기를, “《춘추》의 예에 천자의 사자가 비록 미천하나 제후(諸侯)의 윗자리에 앉는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두 분의 대인은 바로 어떤 지위입니까? 모두 천자의 가까운 신하로서, “오늘 멀리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지 않겠소?” 하고, 다시 빙그레 웃으면서 두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가까운 신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그는 바로 황제 앞에서 직접 거행하는 사람이다.” 하였다.

우리도 웃으면서 통역에게 답하기를, “본래부터 왕이 글을 읽고 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뵈오매 과연 그렇습니다.” 하니, 왕이 또 공손히 팔짱을 끼고 “황공. 황공.”이라고 잇달아 말하였다. 문무(門廡)와 전정(殿庭)에는 모두 자리를 깔고, 손과 주인이 자리를 나누면 겹으로 더 깐다. 저 자리는, 등급을 밝히기 위해서 용이 나란히 누워 있지만 비늘은 없고, 이 자리는, 무늬를 짜는데 봉황이 쌍으로 날면서 날개를 편다. 집사는 자리 세 벌을 말아 가지고 따라다니다가, 서로 절할 때에 각각 펴서 놓는다. 음식 그릇은 금ㆍ은ㆍ동ㆍ자(瓷)를 섞어 쓰고, 식품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골고루 많다. 주인이 손에게 잔을 드릴 때에는 한결같이 중화의 예를 따르므로, 손이 주인에게 잔을 드릴 때에도 중국 연회(燕會)의 의식을 따른다. 밀이(密餌)를 벌여 놓을 때에는 그 수가 다섯 겹이고, 상에 차린 음식의 높이를 재면 크기가 한 자 둘레이다. 그릇마다 모두 은과 구리로 둘레를 만들어 푸른 구슬이 이어진 줄을 붙였고, 그 위에는 모두 비단을 잘라 꽃과 잎을 만들고 아롱진 봉황의 깃으로 춤추게 한다.

그 줄은 다섯 겹인데 모두 과실을 쓰지 않고, 꿀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모나고 둥글게 만들어 떡과 유전(油煎)을 높게 낮게 맞추어, 영롱하게 첩첩이 쌓아 올리니 높이와 크기가 한 자쯤 된다. 다시 흰 은이나 흰 구리로 8모가 난 둘레를 두르고 푸른 구슬로 그물을 만들어 그 위를 덮는다. 그리고 푸른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들고 또 붉은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드는데, 꽃잎마다에는 흰 구리를 작은 못으로 엮으니 중국의 진주화(珍珠花)의 모양 같다. 그 꼭대기에 동선(銅線)으로 다섯 빛깔의 채색실을 얹어 나는 봉이나 공작이나 혹은 나는 신선을 만들었는데, 꼬리는 치켜올리고 날개는 펴져 있으며 손님을 향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절조(折俎)를 보낼 때에 제거한다. 두변(豆籩)은 보기에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앞의 것은 크고 뒤의 것은 작은 것으로 차례를 삼고, 진열(陳列)하는 것은 향배(向背)를 적당히 하기 위하여 겉은 높고 안은 낮은 것으로 차별을 삼는다.

그 상은 일(一) 자 모양으로 가로 진열하니 상마다 모두 그렇다. 쌀가루를 섞어 끓인 국과 안주를 섞고 이것 또한 중화의 쌀떡과 여뀌꽃 따위를 만든다. 장조림과 젓갈을 섞으며, 술은 멥쌀로 빚는데, 수수는 쓰지 않는다. 비록 청주종사(靑州從事)로도 거의 그 우열을 다툴 수 없고, 빛과 향기가 잔에 넘치면 평원독우(平原督郵)도 감히 멀리서 그 울타리나마 바라볼 수 없다. 술맛이 뛰어나니 산동(山東)의 추로백(秋露白)도 빛깔과 향기가 같다. 일자로 벌여 놓고 중간에는 비단으로 덮는다. 이(二) 자로 가로 벌여 놓은 상에서 복판의 한 상에만 붉은 비단으로 덮고, 그 위에 기름종이를 깔고서 거기에 그릇을 벌여 놓는다. 좌우의 세 자리에는 모두 희뢰(餼牢)를 진열하고, 가까이 한 의자에 앉는데 착석하기를 기다려서야, 왕이 직접 들고 온다. 처음 자리에 들어 설 때에, 갖다 놓은 의자가 상에서 세 자쯤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몰랐더니, 왕이 직접 그 한 의자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은 자신이 공경하는 뜻을 펴려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상에 가득한 희생을 자를 때에는 신하가 반드시 친히 잡는다.

희생에는 소ㆍ양ㆍ돼지ㆍ거위의 네 종류가 있는데 모두 익힌 것이다. 최후의 한 상에는 큰 만두를 놓고 그 위에는 은으로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 한 대신이 칼을 잡고 그 희생을 자른 뒤에는 큰 만두 껍질을 가르는데, 그 속에는 만두가 호두처럼 큰 것이 들었는데, 맛이 그럴 듯하다. 특별히 죽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희생은 모두 그 심장을 올리고, 살지고 맛난 것을 취하여 세 개의 창자에 창자기름을 채웠다. 양 등살 위에 세 개의 양 창자를 꿰고, 그 속에는 구운 고기와 여러 가지 과실을 넣는다. 속헌(續獻)하는 데에는 동성(同姓)으로서 군(君)에 봉해진 이가 먼저 한다. 동종(同宗)의 현자는 모두 군에 봉해지는데, 모두 왕신(王臣)이라 일컫는다.

여러 신하들 중에서 무공(武功)이 있는 이도 군에 봉하고, 문직(文職)으로서 공이 있는 이를 봉하는 것도 그와 같다. 다음에는 정부의 육조(六曹)에까지 미친다. 잔을 드릴 때에는 왕이 반드시 그 자리에 나와 드리는 사람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언제나 따른다. 탕(湯)을 한 번 올릴 때에는 반드시 다섯 사발로 한다. 왕이 직접 드리지 않는다. 오직 이것만은 중국과 다르다. 아무리 그릇을 포개더라도 그 높이는 한 자를 넘지 않는다. 그 밥상이 매우 작은데 굽고 지진 음식이 너무 많으므로 여러 개를 포개게 된다. 그 상에 다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을 걷어 깔아 놓은 자리에 둔다. 안주와 탕을 두 번 올릴 때, 상 위에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그것을 걷어 자리 사이의 맨땅에 놓는다. 이것은 그 나라 풍속이다.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채소를 올리는데 시종관들이 모두 안팎에 반듯이 서서 모신다. 집사(執事)들은 모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다. 내시와 통역관들은 그 주위에 엎드리고 있다. 내시들은 모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검은 각띠를 띠고 엎드려서 왕이 앉은 의자의 발을 받들고 있으며, 통사와 승지는 좌우에 엎드려서 그 분부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뒤에도 통사가 엎드려 있고, 내시만이 없다. 대개 세 번의 잔치는 태평관에서 하는데, 그 예는 모두 같고 의식을 감한 것이 없다. 한 번의 잔치는 인정전(仁政殿)에서 하는데, 정성이 더욱 지극하고 힘이 더욱 드는 것이다. 태평관에서의 처음 잔치는 말에서 내리는 잔치이고, 두 번째 잔치는 정연(正燕)이며, 세 번째 잔치는 말에 오르는 잔치이고, 인정전의 잔치는 사연(私燕)이라 한다. 처음에는 이 예가 마땅치 못한 것 같기에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는데, 이르러서야 태평관과 모화관의 제도가 모두 전(殿)으로 그것은 오로지 천조(天詔)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일이 없을 때에는 왕이 거기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매양 거기 와서 잔치를 베풀 때에는 왕이 반드시 먼저 관문 밖의 작은 전에서 기다리고서 들어온다. 비로소 고칠 필요가 없는 줄을 알았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동쪽에서 돌아오려고 수레를 빨리 재촉할 때에, 왕이 먼저 모화관에 나와 잔치를 베풀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 말이 더욱 친절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예는 더욱 성의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천작(天爵)을 닦는다는 말에 감사하기 그지없고, 좋은 말을 두 번이나 하는데 감사하였다. 귀중한《맹자(孟子)》의 천작(天爵)이란 말을 외우기까지 하면서 우리들을 다 능하다고 하였으며, 또 안자(晏子)의 증언(贈言)을 인용하여 스스로 그 재주의 미치치 못 함을 한하였다. 대개 그 뜻은 장차 우리들에게 시구(詩句)를 주려 한 것이었는데, 아깝게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왕은 우리 두 사람이 여러 번 선사품을 물리치자 통역을 통해 뜻을 말하기를. “우리 선대로부터 천사(天使)가 멀리서 오면 언제나 약소한 물품으로나마 뜻을 표하였는데, 지금 두 분 대인이 그처럼 하는 것을 보니, 나는 황공하여 더 할 말이 없소. 다만 내가 듣건대, 옛날 사람의 말에, ‘인자(仁者)는 작별할 적에 말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금(金)을 준다.’고 하였소. 나는 지금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한갓 약소한 물품만을 드리니 마음속으로 매우 황공하오. 나는 마침 또, ‘옛날 사람은 천작을 닦으면 인작이 따른다.’는 맹자 말씀이 생각나오. 지금 두 분 대인은 진실로 천작을 닦은 분이니, 이번에 돌아가면 특별한 은혜를 입을 것이오. 이것이 곧 내가 말을 주는 것이오.”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왕이 우리를 덕으로 사랑하는 데에 감사한다.”라고 답하였다. 우리가 술을 다 마시지 않자 통역을 시켜 “이 한 잔을 다 드시오. 내일이면 천연(天淵)의 거리가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통역은 그 천연을 ‘천원(天遠)’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우리가 그 말을 알기 때문에 해석해 주니, 왕은 웃고 문을 나와 전송하면서 또 술을 내어 권하고 다시 ‘원별천리(遠別千里)’라고 말하였다. 통역은 또 ‘원별’을 ‘영결(永訣)’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이는 장유성(張有誠)이 중국어는 잘하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이 승지는 글은 읽었지만 중국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양 그 말을 전할 때에 땀을 빼면서도 여전히 통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우스웠다.

이날 밤에는 벽제관에서 자면서, 허 이조(許吏曹)의 왕이 시 짓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산천과 길은 한 달 동안이나 지났으나, 풍물(風物)과 인정(人情)은 5일 만에 안 것이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기억이 난다. 국학(國學) 성균관(成均館)은 뒤에는 산 앞에는 물이 있는데, 앞뒤에는 전당(殿堂)이고 좌우에는 뜰이 있다. 성전(聖殿)은 앞에 있고 명륜당(明倫堂)은 뒤에 있으며, 사학(四學)은 동서로 갈라져 있다. 관원으로는 대소사성(大小司成)이 있고 생도들은 상ㆍ하의 기재(寄齋)에 산다. 생원과 진사가 있는 곳을 상재(上齋)라 하고, 승학(升學)들이 있는 곳을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 동안 경전에 밝은이로 뽑힌 사람이고, 진사는 시부(詩賦)로 뽑힌 사람이며, 승학은 민간의 뛰어난 사람들이니 기재(寄齋)라고도 한다.

서경(西京)에서도 견줄 수 없고, 개성에서도 짝할 수 없는 것은 제사에 소상(塑像)을 두어서 더럽히거나 어지럽히지 않으며, 생도는 공부함으로써 친구가 된다. 기내(畿內)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가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떠 있는 것 같다. 나루로는 양화도(楊花渡)가 있어서 물산이 번성한데 팔도(八道)에서 운반된 곡식이 모여, 일국의 금령(襟領)이 된다. 가장 높은 정자에서 긴 물가를 굽어보면 백제의 옛 경계에 닿아 있다. 나는 일찍이 여기서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서 하루 동안 논 적이 있는데 저들도 그 즐거운 일과 완상하는 마음이 백년 만에 있는 다행이라고 스스로 경하하였다. 트인 골목과 통한 거리는 쪽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깎아지른 듯한 처마에 우뚝히 빛나는 집이다. 집집마다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으로 들창을 내어 더위를 피한다. 그 밖은 모두 관청에서 나누어 받으므로, 빈부에 따라 그 제도가 다르지 않고, 그 안은 자기들 마음대로 지을 수가 있다. 그 곧은 거리 양쪽에는 모두 관청으로서 동와(瓦)를 얹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니, 밖에서 보면 누가 가난하고 부자인 지 분별할 수가 없고, 안으로 들어가 그 방과 집을 보아야 비로소 같지 않다. 관청도 제도는 다르지 않다. 모두 당침(堂寢)이 있는데 모두 모서리를 꾸미고, 누각은 난간을 날개처럼 내고 들보에는 동자기둥을 댔다.

관사(館舍)와 전사(傳舍)의 벽 사이에는 다 수묵(水墨)의 변변찮은 그림을 바르고, 문과 들창이 합한 곳에는 모두 혼돈(混沌)이 처음으로 나누어지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것은 꼭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본 것을 근거로 하여 곧장 쓴 것이다. 가난한 집의 벽은 대로 얽되 새끼를 꼬아서 튼튼하게 하고, 그 위에는 띠 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구멍이 있는 곳에는 진흙덩이로 막았다. 그 벽은 잡목 따위를 가져다 바로 세우고 엮지 않고 다만 새끼로 얽는다. 새끼로 얽은 곳은 마치 그물눈과 같은데, 그 한 눈금마다 진흙덩이 한 개씩으로 틀어막았다. 서울의 작은 골목은 이와 같고, 길에서 본 것으로는 모두 완전히 진흙을 발랐다. 어떤 집은 가시나무 가지가 도리어 처마 끝에까지 나왔고, 어떤 집은 겨우 동그란 소반만하다. 이것을 봉황새에 비하면, 비록 천 길을 날지는 못하지만, 뱁새에게 비하면 한 나뭇가지에 편안함을 의탁할 만한 것과 같다.
부잣집은 그 기와가 모두 동()으로서 무서(廡序)가 동서로 뻗은 것은 그 마룻대가 도리어 남북으로 솟아 있고, 모두 흙으로 벽을 바른 집으로 당침(堂寢)이 앞뒤에 있는 것은 그 등마루가 도리어 중간보다 낮다. 당침은 모두 한 칸인데 무서가 도리어 세 칸이다. 문은 모두 동서(東序)의 마룻대를 돌아 있기 때문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되 바로 걸어가야 당침으로 갈 수 있다. 그 문은 모두 남향이지만 가운데에서는 열리지 않고, 모두 동무(東廡)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쪽을 향해 열리는 것은 그 터가 매우 높아서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로 향한 것도 그와 같다. 지대는 모두 낮고 습한 것을 두려워해서 널빤지를 깔아서 습기를 막았으니, 만일 책상다리하고 앉으려면 모두 띠풀을 깔아야 한다. 그 풍속이 모두 땅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사람들은 네모진 하나의 방석을 만들거나, 베나 비단으로 하나의 큰 베개를 만드는데, 그 속에 풀을 채워 앉는 사람의 안석으로 쓴다. 관부에서는 만화좌(滿花座)로 방석을 만드는데, 그 제도 역시 네모로 만들고 녹색 모시로 초침(草枕)을 만들어 다닐 때에는 사람이 그것을 지고 따른다. 알 수 없는 일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채소밭에는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에는 오직 소나 말 외에는 쓰는 것이 없고, 말을 부리는 사람은 많고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

목축에는 전혀 양을 볼 수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산이나 바다에 그물이나 통발을 쓰고, 나물을 먹으려면 강이나 바다에 나가 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오면서 본 것이 이러하였다. 촌 늙은이 중에는 한 번도 돼지고기 맛을 모르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 관청에서라야 양이나 돼지를 두었다가 향음례(鄕飮禮) 때에 더러 쓰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귀한 사람이라야 교외 언덕에 묘자리를 잡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오면서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성가퀴처럼 벌여 있는 것이 모두 무덤이었다. 귀한 사람은 지형을 선택하고 또 화표(華表)와 석양(石羊) 따위도 있다. 그러나 비를 세운 것은 볼 수 없었다. 이것들은 모두 특별한 지방의 이상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나, 굳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논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총환(總環)을 드러내어 귀천을 분별한다. 그 나라에서는 머리를 싸매는 망건(網巾)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었고, 환(環 관자(貫子))으로 등급을 정하였으니, 1품은 옥이고 2품은 금이며, 3품 이하는 은이고, 서인(庶人)은 뼈ㆍ각(角)ㆍ동(銅)ㆍ방(蚌) 따위로 만들었다. 아기의 어릴 때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보존하여 먼저와 뒤의 구별이 없어서, 어떤 아이는 어릴 때에 머리카락이 벌써 어깨에 드리우며, 어떤 아이는 6ㆍ7세가 되면 뿔 모양으로 쌍 상투를 묶는다. 헤아려 보건대 태아 적 머리카락을 보존하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갓을 쓰기 전인 것이다.

백성들은 초모(草帽)를 쓰는데 턱에는 구슬을 드리우고, 정수리는 둥글거나 혹은 모나며 색깔은 모두 검다. 천한 사람은 네 잎의 푸른 적삼을 입고, 정수리에는 새 깃을 꽂는다. 보통 사람은 여러 겹의 삼베옷을 입고 걸을 때에는 긴 옷자락을 끈다. 시끄러움을 싫어할 때는 길에서 하루를 묵고, 충돌하는 것을 말리려면 뜰 끝에서 지팡이를 끈다. 천한 사람의 네 잎 적삼은 오직 평안도와 황해도의 두 도만이 이렇게 하였고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

지팡이를 끄는 사람이란 모두 키 큰 사람을 뽑는 것이니, 큰 모자를 쓰고 누런 베옷을 입고, 둥근 깃에는 노끈을 달고 다만 정수리에 새 깃을 꽂지 않았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흙 속을 다니더라도 상관이 없고, 버선은 바지에 한데 묶으므로 물을 건너더라도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옷은 모두 흰색인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도 성글며, 등에 짐을 지고서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거북이가 볕을 쬐는 것 같고, 그 풍속에 남자들은 모두 등에 짐을 졌다. 어른의 명이 있으면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오리가 뒤뚱뒤뚱 걷는 것과 같다. 그 풍속에 사람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어른이 부르면 구부리고 달려가서 대답한다.

가마를 멜 때에는 반드시 24명이 한 가마를 메는데, 가다가는 30리도 못 가서 또 백 사람이나 바꾼다. 이는 무거운 것은 모두 어깨로만 질 수 없으므로, 이렇게 모두 손으로 붙잡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가마 한 채에 앞뒤에 전부 24명을 쓰고, 또 곁에서 붙드는 사람이 있다. 그 가마는 중국의 교의와 같은데, 네 발이 짧고 좌우에 두 개의 긴 가마채를 끼운 것도 중국의 제도와 같다. 자리 밑에는 나무 하나를 가로질러 그 양쪽 끝이 나왔는데 길이는 6ㆍ7척이고, 앞뒤에 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렀는데, 길이는 자리 밑의 가로지른 나무와 같다. 들려고 할 때에는 붉은 베로 가로지른 나무 양쪽 끝에 붙들어 매고, 사람은 다만 그 베를 어깨에 걸고 손으로 들고 간다. 또 가마 중간에는 뒤에서 앞까지 긴 베 두 폭을 바로 대어서 사람의 두 어깨에 나누어 걸어서, 마치 말 멍에에 가로지른 나무 모양과 같은데, 이것은 한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나머지는 10여 명을 시켜 앞에서 끌게 한다.

여자들의 귀밑털은 귀를 덮어 귀고리가 보이지 않고, 머리에는 흰 권(圈)을 써서 바로 눈썹을 내리누른다. 개성부에서 왕경으로 오는 길가에서 이런 것을 보았다. 부유하고 귀한 여자는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유하고 귀한 집 부인들은 머리에 한 광(匡)을 썼는데 큰 모자와 같다. 앞 채양에 검은 비단을 드리워 얼굴을 가렸다. 비록 얼굴을 가렸지만 이것도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보았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흰 치마가 장딴지를 가리지 못한다. 지위가 있고 존귀하여야 가마를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없으면 아무리 부자라도 말 타는 것만을 허락한다. 이 두 글귀는 허 이조(許吏曹)가 써 준《풍속첩[風俗帖]》에 나온다.

버선과 신은 베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발을 묶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신은 보통 사람은 소 가죽이고, 귀한 사람은 사슴 가죽이며, 버선은 비단이 많다. 3ㆍ4명의 통사의 말이 모두 같았다. 옷은 베나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매는 넓으나 길지는 않다. 윗옷은 모두 무릎 밑에까지 내려가고 아랫도리 옷은 모두 마루에까지 닿는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볼 때에는 꿇어앉는 것을 예의로 삼고, 천한 사람이 일이 있을 때에는 머리로 이는 것이 보통이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도 손으로 붙들지 않고, 열한 말의 쌀을 지고도 그 걸음은 빠르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을 간단히 말한 것이고, 보지 못한 것은 자세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른바 냇가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驛)에서 심부름하는 자는 모두 과부라는 것은, 처음 전해 들을 때에는 매우 놀라웠지만, 지금은 이미 고친 것을 알았으니, 어찌 이 또한 성스런 황제의 거룩한 교화에 젖은 것으로 넓은 한수(漢水)를 뗏목으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는 모두 전하기를, ‘그 풍속에 과부들이 관역(館驛)에서 일을 한다 ’하였다. 나는 그들의 추잡함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와서 보매, 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그 고을 아전들이고, 부인은 역 밖의 별실(別室)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서로 전하기를 ‘이 풍속은 경태(景泰) 연간에 그 국왕이 즉위한 이후에 변하였다. ’하니, 요동(遼東)의 부총병(副摠兵) 한빈이 한 말이다. 냇가에서 남녀가 같이 목욕한다는 사실은 옛날 기록에 나오는데, 지금은 변하였다. 새로는 꿩ㆍ비둘기ㆍ참새ㆍ메추라기가 많고, 짐승으로는 고라니ㆍ사슴ㆍ노루ㆍ포(麅)가 많다.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나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해산물(海産物)로는 곤포ㆍ김ㆍ굴ㆍ조개이고, 곤포는 종려나무 잎과 같은데 녹색이다. 김은 자채(紫菜)와 같은데 크다. 생선으로는 금문(錦紋)ㆍ이항(飴項)ㆍ중순(重唇)ㆍ팔초(八稍)이다. 금문은 붕어와 비슷한데 몸이 둥글고, 이항은 피라미와 같은데 홀쭉한 것 밖에 볼 수 없다. 왕이 사람을 시켜 음식상을 차려 보내어, 중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것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중순은 중국의 눈이 붉은 고기와 같은데, 입술은 말코 같고 살은 매우 맛나며, 그 새끼는 조기 새끼 같은데 잘고도 많다. 팔초는 곧 절강(浙江)의 망조(望潮)인데 맛은 그다지 좋지 못하고 길이는 4ㆍ5척이 된다. 잉어와 즉어(鯽魚)는 내와 못 어디서나 모두 잡을 수 있다. 청천(淸川)ㆍ대정(大定)ㆍ임진(臨津)ㆍ한강의 여러 물에 다 있고, 즉어는 길이가 한자쯤 되는 것도 있다. 황새는 정원(庭院)에도 그 보금자리가 많이 보인다. 대합조개 같은 결명(決明)은 그 맛이 해산물에서 제일 맛나고, 석결명(石決明)은 약에 넣는 것이다. 그 살이 밖으로는 껍질에 붙고 속은 돌에 붙었는데, 복어라고도 한다. 껍질은 바닷가의 구멍이나 바다 복판에 있다. 주먹 같은 자궐(紫蕨)은 그 맛이 산채(山菜) 중에서 제일 낫다. 고사리에는 푸른빛과 자줏빛 두 가지가 있는데, 중국에서 나는 것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은 잘 캘 줄을 모른다. 대개 그것을 캘 때에는 반드시 송곳으로 땅을 파서 흙을 제거하고서 그 뿌리 밑동을 잘라야 한다.

내가 허 이조에게 그 캐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시내나 육지에서 나는 기이한 물건에 있어서는 난초 향기를 피우는 것은 필관(筆管)ㆍ산장(酸漿)과, 필관은 싹을 먹는데 맛이 부드럽고 달다. 그 잎은 알 수 없는데 혹은 황정(黃精) 싹이라 한다. 산장의 잎은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 자근(紫芹)과 백고(白蒿)가 있다. 왕도와 개성 사람들 집의 작은 못에는 다 미나리를 심는다. 수료(水蓼)의 싹ㆍ당귀(當歸)의 싹ㆍ송부(松膚)의 떡ㆍ산삼(山蔘)의 떡은 소나무의 겉껍질은 벗겨내고, 그 희고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 멥쌀을 섞어 찧어서 떡을 만든다.

산삼이란 약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는 손가락만 한데 형상은 무와 같다. 요동사람들은 그것을 산무라 하고, 거기에 멥쌀을 섞어 찧고 구워서 떡을 만든다. 또 3월 3일에 그 보드라운 쑥잎을 뜯어 멥쌀가루를 섞어 쪄서 떡을 만드니 그것을 쑥떡이라 한다. 그 멥쌀은 빛이 희고 맛이 향기롭다. 모두 상에 차릴 만하여 모두 술안주에 쓴다. 과실로는 배ㆍ밤ㆍ대추ㆍ감ㆍ개암ㆍ송화(松花)ㆍ살구ㆍ복숭아ㆍ감자ㆍ귤ㆍ매실ㆍ오얏ㆍ석류ㆍ포도이고, 배ㆍ대추ㆍ개암이 가장 많아서 어디에나 있고, 감자와 귤은 전라도에서 난다.

가죽으로는 범ㆍ표범ㆍ고라니ㆍ사슴ㆍ여우ㆍ담비ㆍ들고양이ㆍ돈피이니, 토인들은 담비를 돈피라 하고, 들고양이의 가죽은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가지고 무늬 자리ㆍ겹갖옷ㆍ화살통ㆍ활집들을 만든다. 꽃으로는 장미ㆍ철쭉ㆍ작약ㆍ모란ㆍ차꽃ㆍ정향(丁香)ㆍ작미(雀眉)ㆍ산반(山礬)이 있다. 2월이 한창인데 앵두꽃은 다 지고, 늦봄이 다 가지 않았는데도 오얏꽃이 모두 시들었다. 내가 3월 8일 그 나라에서 떠날 때에 당리화(棠梨花)가 거의 떨어졌는데, 또 며칠을 걸어 압록강을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막 피는 것을 보았다. 이는 그 나라가 동남쪽에 가까울수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풀은 대부분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나무는 대부분 동글고 고불고불하다. 산에 모래와 돌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은 단단하기가 잣나무와 같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등불 기름을 만들려 하나 송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소나무의 결이 가장 단단하고 누른 빛이 잣나무와 같으나 기름이 적다. 어디를 가나 있다. 그 향기로운 꽃은 한번 봄이 지나면 모두 따고, 맺은 열매는 2년 만에라야 먹는다. 소나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껍질이 그다지 거칠지 않고 가지와 잎은 위로 치솟았으며, 맺은 열매는 2년 만이라야 딸 수가 있다. 경기도에 가서야 있었다. 작은 것은 시내의 다리를 만들고, 큰 것은 묘당(廟堂)의 기둥이 된다. 대개 가는 길에 물이 있는 곳이 있으면 모두 소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그 가지를 잘라서는 난간을 만들며 잎을 가지고서는 좌우의 흙을 막는다. 보산관(寶山館)에 가까운 한 시내는 저탄(猪灘)이라 하는데, 넓이가 20여 길이나 되며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들보나 마룻대를 만들려면 곧은 것을 얻기가 어렵고, 만일 다락 기둥으로 쓰려면 아래 위의 두 동강으로 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 종류가 같지 않으므로 그것을 씀에는 각각 알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금(金)에 있어서는 그 캐는 곳을 자세히는 모르나 가장 많은 것은 구리이다. 땅에서 캐는 구리가 가장 단단하고 또 빛이 붉다. 밥그릇과 수저는 다 이것으로 만드니, 즉 중국에서 이르는 고려동(高麗銅)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빛깔에 있어서는 각각 그 쓰이는 바를 따르는데, 금하는 것은 붉은 빛이다. 왕이 입는 옷이 모두 붉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맛에 있어서는 초와 장이 많이 쓰이고, 다섯 가지 소리에 있어서는 음운(音韻)을 잘 알지 못한다. 그 나라의 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글을 읽으면 평성(平聲)이 거성(去聲)과 같으니 이를테면 성(星)을 성(聖)이라 하고, 연(煙)을 연(燕)이라 하는 따위와 같다. 일상어는 여진(女眞)과 비슷한 것이 많다. 심지어 한 글자를 서너 자로 부르는 것은 8로써 위(爲)ㆍ야(也)ㆍ득(得)ㆍ리(理)ㆍ불(不)로 부르는 따위와 같고, 한 글자를 두 자로 만들어 부르는 것은 더욱 많으니, 부(父)를 아필(阿必)이라 하고, 모(母)를 액파(額婆)라 하는 따위와 같다. 《지(志)》에 실린 것은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이고, 《일통지(一統志)》에, 생산되는 것에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은 그 대롱은 작기가 화살 같고, 수염 길이는 한 치 남짓하며 붓 끝이 자루에 들어 둥글다고 하였다.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누런 쥐의 털로 만든 것이고 이리 꼬리가 아니었다. 무인(武人)이 숭상하는 것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활이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베는 삼으로 짜는데 모시로 이름 지은 것은 잘못 전해들은 데서 나왔고, 종이는 닥나무로 만드는데 누에고치로 만든다고 하니, 인식하는 것은 도련(搗鍊)한 것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모두 전하기를, “그 나라에서 나는 종이는 고치로 만든다.” 하였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드는데, 그 만든 솜씨가 교묘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찍이 불에다 시험해 보고 그런 줄을 알았다. 베의 정(精)하고 세밀하기가 고운 명주와 같고, 종이의 귀한 것은 통처럼 말 수 있는데, 기름을 먹이면 비도 막을 수 있고, 그 두꺼운 종이는 어떤 것은 네 폭으로 한 장을 만들고, 어떤 것은 여덟 폭으로 한 장을 만드는데, 통틀어서 유석(油席)이라 한다. 자기네들도 중하게 안다. 폭을 잇대면 바람도 막을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모두 흰 베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육지로 다닐 때에는 말에 싣고 따른다. 그리고 이른바 남자의 머리에 쓰는 건은, 당 나라 제도와 같은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고, 아주 작은 과하마(果下馬)도 키가 3척 되는 것이 없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남자의 건은 당나라의 것과 같다.” 하였다.

지금 남자들은 모두 대모(大帽)를 쓰고, 오직 왕도에서 왕의 가마를 메는 자들만은 육각(六角)으로 된 흰 비단 건을 쓴다. 육각에는 다 흰 솜공을 붙였고, 자색 비단으로 깃이 둥근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뾰족한 코의 가죽신을 신었으니, 마치 당 나라 말을 탄 해관(奚官)을 그려 놓은 것과 같다. 생각건대, 그 때의 옷은 모두 그와 같았기 때문에 당 나라와 같다고 말한 것인 듯하다. 또 《일통지》에, “백제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써 과실나무 밑에서도 탈 수 있다.” 하였다.

지금 백제의 국경은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니, 왕경에서 2ㆍ30리 밖에 안 된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벌써부터 나지 않는다.”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 실은 말이 비록 석 자 이상이긴 하지만 중국 말에 비하면 조금 작다. 아마 그 종류일 것이지만 우선 기록하고 다음 날을 기다린다. 오직 오엽(五葉)의 인삼과 만화석(滿花席)이 있어서 오엽의 인삼이란 즉 《본초(本草)》에서 말한 인삼이다. 만화석의 풀빛은 누르고 또 부드러워 아무리 접어도 꺾어지지 않으니, 소주(蘇州)의 것에 비하면 훨씬 좋다.

해마다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고 때때로 상국(上國)에게도 공물로 바친다. 1백 20년 이래로 중국에서 내려주신 물품의 자주하고 많은 것이 비록 성명(聖明)의 주신 바에서 나왔지만, 또 그 공물의 끊이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아, 육의(六義) 중에 부(賦)처럼 오직 바로 진술함을 취한 것이나 겨우 달포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그 진상을 다 알았겠는가? 하물며 내가 말선(襪綫)의 얕은 재주로 창해(滄海)의 가는 비늘과 다르지 않음에랴? 그러나 이제 붓끝의 조화(造化)를 잘 부려 육합(六合)의 동춘(同春)을 그려 보노니, 감히 보고 들은 것을 많이 속이지 않았다면 거의 자순(諮詢)에 부끄럽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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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고하건대 동월의 주석에,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있고, 회시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년에 있다.”고 한 것이나 “개성 동쪽에 능묘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의 선영이다.” 한 따위는 모두 진실이 아닌데, 아마 통역(通譯)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인 듯하다. [출처: 다음 블로그 이택용의 이야기]

이택용 선생님은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신데 직접 번역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의역이 아닌 직역을 많이 하십니다. 다만 위의 번역문 가운데 감자가 전라도에서 난다는 부분과 선비가 2대만 제사를 지낸다는 부분은 번역을 잘못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선비가 아니라 민간에서 2대만 제사를 지낸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나중에 조선부에 대해서 또 다른 번역문을 원문과 함께 다루겠습니다.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압록강과 상돈으로 나오고 백두산의 천지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이 나와 있습니다. 건주 여진은 누르하치가 다스리던 부족으로 나중에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와 일전을 벌여서 요동을 차지한 다음에 청나라로 명칭을 변경하고 나중에 명나라 전지역을 차지한 부족입니다. 흔히 건주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부릅니다. 여진족이 분열되어 있을때 건주, 해서, 야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장 세력이 강한 부족이 건주 여진이고 야인은 그야말로 문맹 상태의 여진 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서 여진은 두 부족 가운데 중간정도의 문명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여진에서 신라때의 명칭인 해서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소 특이합니다. 해서는 신라의 강릉을 포함한 명주 지역을 일컫던 명칭인 하슬라, 하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신라가 해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관련해서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가 해서지역을 다스렸다는 문헌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만주원류고에서는 지금의 길림성 지역에 실제로 신라가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길림성과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가 모두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해서 여진은 길림성에 있던 신라와 관련해서 생긴 명칭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명나라와의 국경선이 서쪽으로 압록강이고 동쪽으로 상돈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백두산정계비에서 조선과 청이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기록을 통해서 본다면 상돈은 토문강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문강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는 지금의 두만강을 말하고 한국에서는 송화강의 한 지류를 말한다고 해서 간도라는 영토 분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조선부에서 서술한 상돈이 반드시 토문강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간의 영토 분쟁은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말기에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보해서 고려는 요동 정벌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해서 조선과 명나라와의 국경선은 압록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철령은 요동성에도 있고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에도 있습니다. 명나라에서 요구한 철령은 분명히 조선의 철령까지 명나라땅으로 편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고려가 국운을 걸고 요동 정벌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위화도 회군 이후에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도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 정해진 것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는 철령이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동에 있는 철령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조선의 철령을 편입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고려는 요동이 고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국운을 걸고 요동을 명나라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요동 정벌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겨서 북원으로 도망갔을때 요동을 관할하던 한족 관리가 예로부터 고려의 땅인 요동을 갖고 고려에 귀부하겠다고 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원나라와의 외교 관계때문에 귀부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동의 한족 관리가 요동을 갖고 명나라에 귀부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고려에서는 요동을 놓고서 명나라와의 전쟁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도 요동에 대해서 본래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 추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한 최부 선생도 고향인 나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였고 북경을 거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표해록을 남겼는데 요동과 관련해서 반은 한족이 살고 있고 반은 조선족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남겼습니다. 조선인이 요동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본다면 이전부터 요동은 조선의 땅이었는데 명나라에 빼앗겨서 한인들도 조선인과 같이 살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조선부에서 동쪽으로 상돈으로 국경을 접했다고 나오는데 상돈은 토문강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에 있던 조선땅을 포기했기 때문에 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병자호란때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을 함에 따라 조선도 분명히 청나라에 영토를 할양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삼전도 굴욕 당시에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한 것이 생각보다 가혹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에 대한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청나라에 대해서 군신관계를 정립하고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을 청나라에 보내는 정도밖에 없습니다. 세자와 왕자, 삼학사 등과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청나라의 심양에 인질로 보내진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포로들은 청나라가 조선과의 전쟁에서 사로잡았다고 본다면 조선이 왕실을 보존하고 명나라와의 관계 청산을 한 정도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다소 맞질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조선과 청나라와의 동쪽 국경선이 그 이전에는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가 있었는데 이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청나라가 두만강으로 조선과 국경을 정하면서 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나라가 할양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청나라는 명나라 본토를 차지하면서 만주족 발상지인 만주 지역을 봉금해서 못 들어오게 하고 만주족이 중국 본토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조선의 백성들이 봉금 지역으로 이주해서 개척을 함에 따라 조선도 그 이전의 조선땅인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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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화보 월간중국 ・ 2020. 11. 10. 9:00>: <<명나라 사신 동월과 그가 남긴 <조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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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 중 <조선부> 제요 부분]

중국과 조선반도(한반도)의 교류 역사 속에서 중국에는 조선왕조를 잘 아는 관리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웃 국가인 조선왕조를 중국에 소개해 양국 백성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켰다. 명나라 때의 동월(董越)은 바로 그중 한 사람이었다.

동월(1430-1502)은 자는 상구(尚矩), 강서 녕도(지금의 장시(江西)성 간저우(赣州)시 닝두(寧都)현) 출신으로 1469년 진사에 합격해 한림원 편수(編修)에 임명됐다. 1484년 태자(이후 명 효종)의 시강관에 임명돼 태자의 신임을 받았다. 1487년 명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효종이 즉위하자 동월은 경연 강관에 발탁돼 ‘황제의 스승’이 됐다. 1488년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正使) 신분으로 사절단을 인솔해 조선을 방문했다.

동월은 유가의 도덕 규범을 중시해 사절단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조선에 도착한 사절단은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조선 관리와 우호적으로 교류했고 조선 국왕과 관료가 보내온 귀중한 선물을 일체 받지 않았다. 이는 조선 조정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동월 일행은 조선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황제의 스승’이라는 동월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사림 유생들이 그를 우러러봤다. 동월이 성균관을 방문했을 때 ‘황제의 스승’을 직접 보고 싶어하는 유생이 너무 많아 거리가 꽉 차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동월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조선 벗들에게 시를 지어 주고 조선의 산천과 누각에 기념사를 남겼다. 연산군 즉위 후 동월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동월이 쓴 총수산비(蔥秀山碑)를 총수산(황해도 평산로 소재)에 세우도록 명령했다. 유감스럽게도 석비는 임진왜란의 전화를 피하지 못했다. 선조 시기 누각과 담이 전부 소실됐고 석비도 파괴됐다.

동월은 조선에서 한 달 정도 머문 뒤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 조선행을 통해 동월은 조선의 풍물, 문화, 백성에 흥미와 호감이 생겼고 자신의 특기인 시문을 통해 <조선부(朝鮮賦)>를 썼다. <조선부>는 전편이 총 1만여 자로 조선의 역사와 지리 교통, 산천 자연, 민속 풍물 등을 서술하고 조선 왕궁과 관청, 민간 주택의 형태와 특징 및 양국의 외교 예의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때문에 <조선부>는 문학, 역사, 문화 등 여러 가치를 가져 후세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부>가 완성되고 얼마 뒤 명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신 노공필이 이를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와 성종에게 바쳤다. <조선부>를 다 읽은 성종은 즉시 인쇄해 널리 보급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 즉위 시기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과 국정을 논의할 때 동월의 <조선부> 구절을 인용해 정견의 근거로 삼은 관리도 있었다. 영조 때에는 우참찬 이덕수가 <조선부>의 구절을 인용해 자신의 정치 주장을 펼쳤다. 이로써 <조선부>가 조선 왕조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조선부>는 명성이 높았다. 청나라 때에는 조정이 편찬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됐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에도 전해졌다. 1764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조엄은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부> 판간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역사의 긴 강을 지나는 동안 비록 석비와 각판은 사라졌지만 깊은 차원의 문화적 함의는 파괴되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조선부>는 계속 전해져 중한 양국 인민의 공통된 기억이 됐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인민화보사 한국어 월간지 <중국> 2020년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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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 황제 때 기록한 사고전서(四庫全書), 사부(史部), 지리류(地理類), 외기속(外記屬), 조선부(朝鮮賦) 원문: 1-17면, CD-ROM 판 화면은 22면]


<<제 1 면>>



<<제 2 면>>



<<제 3 면>>




<<제 4 면>>



<<제 5 면>>



<<제 6 면>>




<<제 7 면>>



<<제 8 면>>



<<제 9 면>>



<<제 10 면>>



<<제 11 면>>



<<제 12 면>>



<<제 13 면>>



<<제 14 면>>



<<제 15 면>>



<<제 16 면>>



<<제 17 면>>



<<제 18 면>>



<<제 19 면>>



<<제 20 면>>



<<제 21 면>>




<<제 22 면>>



※ 위의 <조선부(朝鮮賦)> 기록은 이 글을 쓰고 있는 JDM 필자가 기원 1781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四庫全書)> 총 3,458종 7만 9,582권을 <한국토종야생산야초연구소>에 소유하고 있는 <CD-ROM판 사고전서 153장> 가운데서
사부(史部), 지리류(地理類), 외기속(外記屬), 조선부(朝鮮賦) 원문 1-17쪽을 중국어 XP가 깔린 노트북에서 실행한 다음 화면 캡처 방식으로 복사하여 그림 파일로 변환시킨 다음 2021년 1월 27일에 이곳에 원본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한문에 능통한 분들은 원문을 통해서 직접 읽고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기 자료는 대한민국의 고대 역사의 진실을 밝히며 한민족의 문화를 발굴하여 전세계에 널리 선양하고 지나간 고대 우리나라의 줄기찬 역사를 되살려 앞으로 더욱더 발전하는 훌륭한 민족국가로서 재탄생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고조선 시대에 홍익인간의 이념은 민족과 국가주의를 뛰어넘어 빈부 격차가 없고 제한과 차별이 없는 전세게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미래의 세계적 평화의 상징이다. 지나간 역사를 철저하게 고증하고 확인하여 앞으로 닥칠 미래는 행복이 넘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유태인들의 경전인 바이블의 내용과 일맥 상통한다. 과거를 돌이켜 보고 더나은 미래를 개척하는데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사 자료 모음/ 약초연구가 & 동아대 & 신라대 대체의학 외래교수 전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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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도 함께 참조해 보시고 지나간 역사를 읽고 묵상함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1. 고조선(古朝鮮) 왕검 조선(王儉 朝鮮) 무엇인가?
  2. 광개토대왕비 무엇인가?
  3. 백학과 동래 온천 무엇인가?
  4. 대한민국 의료역사 무엇인가?
  5. 선 바위에 깔린 중과 처녀 무엇인가?
  6. 해금강(海金剛)의 선남선녀 무엇인가?
  7.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무엇인가?
  8. 동의보감 무엇인가?
  9. 사고전서 무엇인가?
  10. 막걸리 무엇인가?
  11. 수세보원 무엇인가?
  12. 의방류취 무엇인가?
  13. 모반 양반과 사냥꾼 무엇인가?
  14. 조선부(朝鮮賦) 무엇인가?
  15. 백록담 무엇인가?
  16. 오백장군 무엇인가? 
  17. 중국의학대계 무엇인가?
  18. 한국의학대계 무엇인가?
  19. 용머리 바위 무엇인가?
  20. 서복과 불사약 무엇인가?
  21. 삼성혈 무엇인가?
  22. 제주도 식물 무엇인가?
  23. 주천석과 만산장 무엇인가?
  24. 향약구급방 무엇인가?
  25. 강선대(降仙臺) 무엇인가?
  26. 호종단과 차귀섬 무엇인가?
  27. 할으방당과 할망당 무엇인가?
  28. 천하장사 오찰방 무엇인가?
  29. 흥부와 놀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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