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역사 무엇인가?

고조선부터 ~ 대한민국까지 의료 연표

 

 

 

 

 

고조선

기원전
<황제내경 소문 이법방의론편(黃帝內經 素問 異法方宜論篇)>에 "동쪽 지역은 천지가 시작하는 곳으로 물고기와 소금의 땅으로 바닷가 물곁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물고기를 먹고 짠 것을 좋아하고 한자리에 편안히 살았으며 물고기는 사람의 속을 덥게 하고 소금은 피를 억제한다. 그러므로 그 곳 사람들의 빛깔은 검고 주리가 허술하여 그 병은 옹양(癰瘍)으로 된다. 그 치료에는 폄석(砭石돌침폄.돌석: 돌침)이 좋다. 그러므로 폄석은 동방으로부터 온 것이다."

기원전
<산해경(山海經)>에 "고씨지산 기상다옥 기하다잠석:高氏之山 其上多玉 其下多箴石: 고씨(高氏)의 산에는 옥이 많고 그 곳에는 돌침이 많다."

삼국시대

기원전 14년(백제 온조왕 34년): 봄부터 여름까지 가물어 기아와 질역(疾疫)이 함께 발생하다.

? 고구려: 겨울철에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에 돼지 기름을 발랐다.

기원 22년 신라 남해왕 5년: 대역(大疫)으로 사람이 많이 죽다. 왕이 친히 질병으로 신음하는 백성을 위문하다.

기원 28년 신라 유리왕 5년: 질병에 걸린 노인, 과부, 홀아비 등 자활 능력이 없는 자를 급양하다.

기원 120년 신라 기마왕 9년 3월: 서울에 큰 질병이 돌다.

기원 149년 신라 일성왕 16년 11월: 서울에 대역(大疫)이 들다.

기원 172년 신라 아달라왕 19년 3월: 서울에 대역(大疫)이 들다.

기원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 16년 7월: 병든 노인, 과부, 홀아비, 가난뱅이 등 자존 능력이 없는 자를 널리 구휼하다.

기원 203년 신라 나해왕 8년 10월: 복숭아, 오얏꽃이 피고 백성이 크게 질병이 들다.

기원 229년 백제 구수왕 16년 10월: 큰 질병이 유행하다.

기원 256년 고구려 중천왕 9년 10월: 눈이 내리지 않고, 대역(大疫)이 들다.

기원 312년 백제 비류왕 9년 2월: 질병에 걸린 자, 과부, 홀아비에게 곡식 3석(石)을 지급하다.

기원 377년 고구려 소수림왕 7년 10월: 눈이 내리지 않고 벼락이 치고, 질병으로 고생하다.

기원 380년 백제 근구수왕 6년: 큰 질병이 돌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나 깊이 5장(丈), 넓이 3장(丈)이나 파였다가 3일만에 합쳐지다.

기원 389년 신라 내물왕 34년: 서울에 대역(大疫)이 들다.

기원 414년 신라 실성왕 13년: 일본 공윤왕이 질병으로 양의(良醫)를 구하므로 파진찬 김기무(金紀武)를 보내 치료케 하다.

기원 459년 백제 개로왕 5년 및 고구려 장수왕 47년: 일본이 백제에 양의(良醫)를 구하므로 고구려의 덕래를 보내다. 그는 일본 난파(難波)에 거주하면서 대대손손 의업을 개업하여서 난파약사(難波藥師)라는 칭호를 얻다.

기원 471년 신라 자비왕 14년 10월: 큰 질병이 돌다.

기원 483년 신라 소지왕 5년 11월: 우뢰, 서울에 대역(大疫)이 들다.

기원 499년 백제 동성왕 21년 10월: 큰 질병이 유행하다.

기원 502년 백제 무령왕 2년: 봄에 기근(굶주림)과 질병이 돌다.

기원 506년 백제 무령왕 6년: 봄에 대역(大疫)이 들다.

기원 553년 백제 성왕 31년: 일본이 사자(使者)를 보내 의박사(醫博士)와 약물(藥物) 등을 청하매, 이듬해 의박사(醫博士) 1명과 채약사(採藥師) 2명을 보내다.

기원 562년 고구려 평원왕 3년: 오(吳)나라 지총(知聰)이 의약서, 명당동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다.

기원 638년 신라 선덕왕 5년: 왕의 질병에 의사(醫師)와 기도가 효험이 없으므로,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여 치유하다.

기원 647년 신라 선덕왕 14년: 선덕여왕의 질병에 밀본법사가 독경(讀經)으로 완치시키다.

통일신라시대

기원 697년 효소왕 6년: 백성이 많이 굶어 죽어, 매 사람마다 하루에 밤 1되를 지급하다.

기원 704년 성덕왕 3년: 여름이 가물고 질병이 심하다.

기원 747년 경덕왕 6년: 겨울에 눈이 없고, 백성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허덕이므로 사자(使者)를 10도(道)에 보내 위무하다.

기원 755년 경덕왕 14년: 질병에 걸린 노인과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자를 위문하고 양곡을 지급하다.

기원 841년 문성왕 3년: 봄에 서울에 질역(疾疫)이 돌다.

기원 849년 문성왕 11년: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국사가 상주 설악산 장백사에 선석(禪錫)을 자리잡으니 병자(病者)가 구름같이 모여들다.

기원 870년 경문왕 10년: 겨울에 눈이 없고 질병(疾病)이 심하다.

기원 873년 경문왕 13년: 봄에 백성이 굶주리고 질병이 심하다.

고려시대

기원 985년 광종 10년: 한림학사 쌍기(雙冀)의 건의로 과거제를 설치하고 제조, 명경의 2업과 의(醫), 복(卜) 등 잡과를 시험보다.

기원 991년 성종 11년 2월: 각도에 안무사를 보내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다.

기원 991년 성종 11년 7월: 고아로 질병에 걸린 자를 관에서 조세를 지급하고 또한 질병으로 농업을 잃은 자에게 조세를 감면하다.

기원 1007년 목종 11년 7월: 남녀 80세 이상, 질병으로 버림받은 자 635명을 격구장에 모아 술, 음식, 차, 면포 등을 지급하다.

기원 1009년 현종 1년 4월: 병든 노인을 구료하다.

기원 1009년 현종 1년 7월: 왕이 격구장에 행차하여 남녀 80이상 노인과 독한 병에 걸린 자 735명을 모아 술과 음식, 면포, 차, 약을 지급하다.

기원 1011년 현종 3년 8월: 노인과 외로운 자, 독한 병에 걸린 자들을 모아 관인(殿)에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018년 현종 1년 4월:
황색 안개(오늘날 황사)가 사방을 막은 지 4일간이며, 서울에 질병에 걸린 자가 많았다.

기원 1020년 현종 12년: 80세 이상 고령자 및 심하게 병든 자는 시정(侍丁) 1명, 90세 이상은 2명, 100세 이상은 5명을 급여한다. 지방 관리 중 부모가 질병에 걸리면 왕복 일정을 제외한 20일간의 휴가를 주며, 문무(文武) 관원 중 부모의 나이 70이상 자는 지방 근무를 면하고, 그 부모가 병들면 200일 휴가를 지급하다.

기원 1021년 현종 13년: 서울 거주 남녀 90세 이상 자에게 술, 음식, 약, 차, 면포 등을 지급하다.

기원 1029년 현종 21년: 왕이 해주(海州) 행차 도중에 노인과 심한 병(病)이 든 자에게 술과 음식 등을 지급하다.

기원 1030년 현종 22년: 서울에 질병으로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다. 부모가 서울 혹은 지방에 거주하면서 병들면 해당 관원의 휴가시에 말을 지급하다.

기원 1031년 현종 23년: 효자, 효손, 의부(義夫), 절부(節婦), 노인, 독한 병에 걸린 자에게 물품을 지급하다.

기원 1046년 문종 1년: 80세 이상 관리 및 백성과 효자, 효손, 의부(義夫), 절부(節婦), 의지할 곳 없는자, 질병으로 버려진 자들을 격구장에 불러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049년 문종 4년 3월: 남녀 노인 및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 효손,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든 자들을 격구장에 불러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051년 문종 6년: 80세 이상 승려와 일반인 남녀 1,343명, 심한 병에 걸린 승려와 일반인 남녀 653명, 효자, 효손, 절개지킨 부인 등 14명을 모아 격구장에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057년 문종 12년: 80세 이상 남녀 및 효도한 자손, 의로운 형제,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자, 질병에 걸린 자를 모아 격구자에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086년 선종 4년: 격구장에서 독한 병에 걸린자, 병들어 버림받은 자에게 향연을 베풀다.

기원 1088년 선종 6년: 병든 부모를 온천에 목욕시키고자 하는 자는 노정(路程)의 원근을 계산하여 휴가를 주다.

기원 1095년 숙종 1년: 신풍루에서 민간인 80세 이상 및 독한 병에 걸려 버림받은 자,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손, 홀아비, 홀어미, 고아, 자식 없는 자에게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00년 숙종 5년 2월: 홀아비, 과부, 병든 노인, 효손에게 물품을 수여하다.

기원 1100년 숙종 5년 6월: 5온신(瘟神)을 5부(部)에 제사하여 온역(瘟疫: 봄 전염병)을 빌다.

기원 1102년 숙종 7년 7월: 서경(西京), 유수 등에게 민간의 질병과 고통을 조사케 하다.

기원 1106년 예종 2년 3월: 동서제위도감(東西濟危都監)에게 가난한 자와 병자(病者)를 구제케 하다.

기원 1106년 예종 2년 9월: 80세 이상 남녀,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 순손(順孫: 효손), 홀아비, 홀어미, 고아, 자식 없는 자, 심한 병에 걸려 버림 받은 자를 대궐에 불러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12년 예종 8년: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다.

기원 1113년 예종 9년: 80세 이상 및 효손, 의부(義夫), 절부(節婦), 외로운 자, 병든 자를 위해 궁정에서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16년 예종 12년: 서경(西京) 등지의 80세 이상된 자, 효자, 효손, 의부(義夫), 절부(節婦),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들어 버려진 자들을 위해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20년 예종 16년: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아 곡식이 흉작이고, 질병이 크게 흥해 왕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반고경(般苦經)을 3일간 외워 질병 퇴치를 빌다.

기원 1122년 인종 1년: 80세 이상 남녀 및 의부(義夫), 절부(節婦), 병걸려 버림받은 자를 대궐에 불러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23년 인종 2년: 노인, 심한 병이 들어 버림받은 자를 위해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24년 인종 3년: 노인 및 심한 병에 걸려 버림받은 자 등을 위해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28년 인종 7년: 노인, 심한 병들어 버림받은 자,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 효손, 의지할 곳 없는 자를 위해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29년 인종 8년: 왕이 서경(西京) 행차 중 통과하는 주현(州縣)의 노인, 효자, 효손, 의부, 절부, 외로운 자, 병들어 버림받은 자에게 술과 음식을 지급하여 위로하다.

기원 1130년 인종 9년: 서경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 노인, 효자, 효손, 의부, 절부, 외롭게 된 자, 독한 병에 걸려 버림받은 자에게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31년 인종 10년: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제위보(濟危寶)를 수리하여 백성의 질병을 널리 구제하다.

기원 1133년 인종 12년: 80세 이상 노인, 효자, 효손, 의부, 절부, 과부, 홀아비, 고아, 자식이 없어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들어 버려진 자들을 위해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38년 인종 17년: 80세 이상 및 독한 병에 걸려 버림받은 자는 비록 살인(殺人)을 하더라도 곤장을 치지 않고 섬에 귀양을 보내도록 하다.

기원 1144년 인종 23년: 60세 이상 남녀 노인, 효자, 효손, 의부, 절부, 의지할곳 없는 자, 병들어 버려진 자를 위해 향연을 베풀다.

기원 1147년 의종 2년: 의지할 곳 없는자, 병들어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 위로하다.

기원 1156년 의종 11년: 내각별실(內閣別室)에 백성들의 질병을 널리 치료코자 좋은 약을 비치하고 이름을 선구보(善救寶)라 하다.

기원 1162년 의종 17년 3월: 가물고 황폐하며, 질병이 서울과 지방에 두루 퍼지다.

기원 1166년 의종 21년: 김영석이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저술하다.

기원 1167년 의종 22년: 80세 이상의 노인, 병들어 버림받은 자, 의지할 곳 없는 자, 효자, 효손, 의로운 형제, 농사짓는 자에게 물품을 지급하다.

기원 1173년 명종 4년: 1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개천과 우물이 모두 마르고 벼와 보리가 말라죽고 질병(疾病) 또한 흥하여 굶어 죽은자와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다.

기원 1178년 명종 9년: 서경(西京) 유수관에 약점(藥店)을 두다.

기원 1181년 명종 12년: 안찰사를 각지에 보내 백성의 병고(病苦)를 묻다.

기원 1185년 명종 16년 3월: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샘물과 우물이 고갈되고, 벼 보리가 말라죽다.  질병(疾病)이 함께 흥하여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고 병(病)들어 죽다.

기원 1187년 명종 18년: 서울에 큰 질병이 돌아, 5부(部)로 하여금 기도케 하다.

기원 1197년 신종 1년: 80세 이상 노인, 질병에 걸려 버림받은 승려와 일반인, 의지할 곳 없는 자, 의부, 절부, 효자, 효손의 집 대문에 기(旗)를 달게 하다.

기원 1208년 희종 5년: 의지할 곳 없는 자, 독한 병에 걸려 버림받은 자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지급하다. (조(租) 일석(一石)과 과일, 술)

기원 1216년 고종 4년: 각 도 찰방사로 하여금 백성의 병고(病苦)를 위문하다.

기원 1226년 고종 14년: 최종준이
『어의촬요방(御醫撮要方)』2권을 편찬하다.

기원 1231년 고종 19년: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

기원 1246년 고종 34년 5월:
독충(毒蟲)의 무리가 비같이 날아들다. 벌레의 몸이 가느다란 망으로 둘어 쌓여 있고 그 몸을 해부하면 흰 털을 자른 듯하다. 음식을 따라 뱃속으로 들어가거나 피부를 빨아먹으면 문득 죽으매, 식인충(食人蟲)이라 했다. 갖가지 약을 써도 죽지 않고 다만 파의 즙을 벌레에게 바르면 죽다.

기원 1254년 고종 42년: 서울에 큰 질병이 돌아 죽은 자가 서로 베개를 벤 듯 하다.

기원 1255년 고종 43년: 12월에 눈이 없고 서울에 큰 질병이 돌다.

기원 1256년 고종 44년: 12월인데도 눈이 없고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시체가 길에 쌓이다.

기원 1258년 고종 46년 4월: 독한 병에 걸려 버림받은 자에게 은과 곡식을 나눠주다.

기원 1258년 고종 46년 7월: 홍복원이 무당으로 하여금 나무인형을 만들어 손을 묶고 머리에 바늘을 꽂아서 땅에 묻거나 우물에 빠뜨려 저주하는 것을 보고 조사한 즉, 아이가 학질을 앓기 때문이라 답하다.

대장도감에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상, 중, 하 3권 1책을 간행하다.

기원 1260년 원종 1년 10월: 서울에 대역(大疫)이 돌다.

기원 1280년 충렬왕 7년 8월: 안찰사를 각 도에 보내 백성의 질고(疾苦)를 위문하다.

기원 1281년 충렬왕 8년 6월: 군대(軍隊)에 큰 질병이 돌아 죽은 자가 3천여 명에 이르다.

기원 1281년 충렬왕 8년 12월: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지방에 질병이 크게 흥하여 죽은 자가 극히 많다.

기원 1325년 충숙왕 13년 10월: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든 노인을 구료하다. 혜민국, 제위보, 동서대비원을 수리하여 질병 치료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하다.

기원 1352년 공민왕 2년: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들어 버림받은 자를 관(官)에서 돌보아 주다.

기원 1363년 공민왕 13년: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들어 버림받은 자를 해당 관사에서 구제하게 하다.

기원 1374년 공민왕 24년 3월: 서울에 대역(大疫)이 돌다.

기원 1384년 우왕 11년: 전라, 충청, 경상도 백성의 질고(疾苦)를 위문하다.

기원 1389년 공양왕 1년: 정도전이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찬술하다.


조선시대

1393년 태조 2년 4월: 의지할 곳 없는 자, 노약자, 병든 자 등은 잡역을 면해 주고 구휼하다.

1393년 태조 2년 11월: 성 쌓는 인부들의 질병을 묻다.

1394년 태조 3년: 도성을 개축한 이래 질병으로 생명을 잃은 자는 3년 기한으로 그 집을 회복케 하다.

1395년 태조 4년 2월: 서울이나 지방의 감옥을 수리하지 않아 더럽고 질병을 많이 일으켜서 일찍 죽는 자가 많으므로 담당관으로 하여금 청결케 하다.

1396년 태조 5년 3월: 성을 쌓다가 질병에 걸린 자는 의사(醫師)를 청해 진맥, 제약, 구료케 하고 음식을 제공하여 쾌유된 자는 양곡을 지급하다.

1396년 태조 5년 4월: 축성(築城)하다가 질병에 걸린 자가 전라도에 많았다.  성을 쌓다가 병을 얻어 사망한 자를 위로하다.

1397년 태조 6년: 성을 쌓떤 무리 중에 상(喪: 죽을상)을 당하거나, 병들고, 늙고, 힘이 약한 자는 방면하다.

1399년 정종 1년: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보물 제1235호(지정일: 1996-01-19))』30권이 완성되다.

1406년 태종 6년: 검교산성윤지제생원사 허도가 부인(婦人)들이 질병이 있을 때 남자(男子)의사가 진찰, 치료하면 혹 수치스러워 그 병을 보이길 꺼려하여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창고(倉庫) 궁사의 소녀 수십 명을 선택하여 맥경(脈經),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쳐 부인의 질병을 진찰, 치료하도록 건의하니, 제생원(濟生院)으로 그 일을 담당하게 하다(의녀(醫女) 제도의 시행).

1407년 태종 7년 3월: 경차관(敬差官)을 각 도에 보내 민간의 질병(疾病)을 묻다.

1407년 태종 7년 5월: 가뭄이 극심하므로 질병에 걸린 백성의 일을 모두 진술하게 하여 숨김이 없게 하다.

1411년 태종 11년: 매월 말에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환자들의 생존 여부를 보고케 하다.

1414년 태종 14년: 시혜소(施惠所)를 귀후소(歸厚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으로 고치다.

1416년 태종 16년 3월: 사천현 제요산 아래 수가 사람이
독초(毒草)를 잘못 먹어 죽은자가 6명인데, 나물을 먹는 순간 황홀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귀, 눈, 입, 코로 피를 줄줄 흘렸다. 이 독초는 분초인데 시골 이름은 대도채(大島菜)라 부르며, 뿌리는 목숙(거여목)과 같고 줄기는 동채(쑥갓)와 같다. 이후로는 동채와 목숙의 진상(進上)을 금하다.

1416년 태종 16년 12월: 서활인원 병막(病幕) 주변에 나무 그늘이 없어서 더울 때 환자들이 모여 있을 곳이 없으므로, 병막(病幕) 앞에 있는 청파역전에 나무를 심어 환자들의 휴식처를 제고토록 하다.

1417년 태종 17년: 의홍군(경북 군위군)에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재간행하다.

1419년 세종 1년 4월: 의지할 곳 없는 자와 병들어 버림받은 자에게 묵은 쌀과 콩 600말을 지급하다.

1419년 세종 1년 5월: 온천에 목욕한 환자에게 쌀 및 소금, 간장을 지급하다. 각도에 질역(疾疫)이 성행하므로 향소산, 십신탕, 승마갈근탕, 소자호탕 등의 약을 각 지방 감사에게 지급하여 구료케 하다.

1419년 세종 1년 7월: 노인환자의 복약(服藥) 및 각 도 관찰사, 절사의 복약(服藥) 외에는 술의 사용을 금하다.

1419년 세종 1년 8월: 묵은 쌀 1,000석을 방출하여 의지할 곳 없는 자, 병들어 버려진 가난한 자에게 지급하다.

1422년 세종 4년 6월: 평안도 곽산군민 김마언의 처가 간질병을 얻었다. 산사람의 뼈를 부셔 복용하면 곧 효험이 있다 하여, 그 딸이 왼손 무명지를 부숴 국에 섞어 바치니 병(病)이 쾌유된 지라 그 대문에 표기(表旗)를 달 게 하다.

1422년 세종 4년 8월: 병에 걸린 자가 한증소에 와서 땀을 내어 병을 쫓고자 하다가 죽는 자가 왕왕 생기므로 한증(汗蒸) 효능의 필요성과 부당함을 널리 물어 무익(無益)하면 파하고, 만일 유익하면 용한 의원(醫院)을 선택하여 매일 보내서 병의 징후를 보고 한증 여부를 진찰하게 하다.

1423년 세종 5년 2월: 의지할 곳 없는 자, 고질병이 들어 버려진 자, 거지 등을 구제하다.

1423년 세종 5년 3월: 약용 오미자(五味子)의 민간 수합(收合)을 없애다.
김해 제석당, 나주 금석당, 삼척 태백당 및 기타 지방의 각 관청 소속 신당을 모두 새로 옮겨 동서활인원과 귀후소에 소속케 하다.

죄수 중 질병을 보고한 자는 죄의 경중(輕重)을 따지고 말고 모두 동서활인원에 옮겨 구료를 가벼이 하지 말도록 하다.

1423년 세종 5년 11월: 의정부참찬사 허도(許道)가 태종조부터 여의(女醫)의 설치로 서울의 부녀자들은 혜택을 많이 입었으나 지방(地方)의 부녀자들은 혜택을 입지 못하니, 각 도의 관노비의 딸 가운데 깨우친 자를 뽑아 서울에 보내 침, 뜸, 약, 음식의 법과 기술을 가르쳐 숙달시킨 뒤 내려 보내면 지방의 부녀자들의 병을 가히 치료할 것이므로 우선 경상도와 전라도에 실시하기를 거듭 건의하다.

1423년 세종 5년 12월: 허도(許道)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의 의녀(醫女)를 우헌 충청, 경상, 전라도 관노비의 어린 소녀를 선발하여 제생원(濟生院)에 보내서 제생원 의녀와 함게 가르쳐 재목이 된 뒤 내려 보내다.

1425년 세종 7년: 감옥을 항상 청결케 하여 질병사(疾病死)하는 죄수들이 없도록 시약과 구료에 특히 힘쓰도록 지시하다.

1427년 세종 9년: 전(前) 나주목사 황자후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인출하여 지방에 나누어 주길 건의하므로, 충청도에서 간행하게 하다.

1428년 세종 10년 2월: 황해도에 담당관을 파견하여 굶주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게 하며, 아울러 굶어 죽은 자와 몸이 붓는 병(病)에 걸린 자를 발견하면 해당 수령(守令)을 문책하도록 지시하다.

1428년 세종 10년 10월: 집안의 어른을 여윈 어린이, 병든자, 임신부는 죄를 물어 벌을 주지 않기로 하다.

1429년 세종 11년 2월: 감옥이 불결(不潔)하므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시하다.

1429년 세종 11년 4월: 각 동리의 민간인 집에 열병이 발생했을 때는 수령(守令)이 의원과 무당으로 하여금 치료하도록 지시하다.

1429년 세종 11년 6월: 동(東) 활인원의 한증목욕실이 협소하므로 대선사 혜일(惠一) 등이 신분 및 남녀를 구별하는 한증목욕실 3곳을 증설 운영하기 위해, 돌(石)목욕탕 제작을 위한 쌀 100석, 면포 100필의 지원을 의뢰하므로 상품(上品) 쌀 100석을 지급하다.

1431년 세종 13년 3월: 죄수 환자는 서울의 경우는 약(藥)을 사서 구료할 자는 구료하게 하며, 가난하여 부양할 사람이 없는 자는 동서 활인원의 예에 따라 제공하던가 혹은 혜민국(惠民局)으로 하여금 약을 지급하여 구제하게 하다.

1431년 세종 13년 4월: 제주도의 의업(醫業)이 정확하지 못해 3읍(邑)의 환자를 쉽게 구료치 못하도록, 수령(守令)이 교수(敎授) 관례에 준해 만 30개월 동안 머물도록 청하다.

1432년 세종 14년 4월: 각 도 감사에게 민간 질병 구료조건을 여러 차례 시행케했으나 이를 잘 지키지 않아 금년에도 질병이 극심하므로 거듭 구료조건을 명심하여 지킬 것을 지시하다.

질병에 걸렸으나 구호가 없는 자는 떠돌이들과 같이 구제케 하다.

1432년 세종 14년 7월: 감옥의 구조가 협소하여 죄인 무리가 추위와 더위를 지날 때마다 병이 생기므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여 널리 구제의 손길을 펴도록 하다.

1433년 세종 15년 6월: 전의(典醫) 제호 황자후의 건의
1, 침구법을 학습하는데 주종소(鑄鐘所)를 시켜 동인(銅人)을 주조하여 경혈(經穴)을 가르친 다음 시험을 보는 것이 확실함.

2, 전에는 환자가 생겨 의원(醫員)을 부를 때에는 말을 지원했었는데, 근래 잘 지켜지지 않으므로 다시 말을 보낼 것.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보물 제1235호(지정일: 1996-01-19))』85권이 완성되다.

1435년 세종 17년 1월: 노약자, 질병으로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자를 구휼하다.

1435년 세종 17년 9월: 평안도민 중 질병을 앓는 자가 많아 약재(藥材)와 의방(醫方)을 청하므로 지급하다.

1437년 세종 19년 1월: 죄수들의 질병, 사망 등에 관해 득병일시, 투약, 증세 등의 상황을 보고케 하다.

1437년 세종 19년 2월: 한성부 보제원(普濟院), 이태원(梨泰院), 진제장(賑濟場)의 굶주린 자 중에서 병에 걸리면 곧바로 동활인원에 보내기로 되어 있어 이들 가운데 사소한 질병만 있어도 활인원(活人院)에 보내 버리니, 활인원(活人院)에서도 환자가 많아 구료에 정성으로 마음을 쓰지 못해 생명을 잃게 되므로 이제부터는 본래의 장소 옆에 잠시 옮겨 무당(巫堂)과 노비(奴婢)로써 구료에 힘쓰게 하다.

1437년 세종 19년 3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내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고 굶주린 자와 사망자의 수를 보고케 하다. 사망자 중 길에서 죽은 자와 병들어 죽은 자를 구분하며, 병사자의 질병 유무를 구분하고, 서울의 경우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질병이 서로 전염되어 사망자가 많게 되므로 활인원에 이송케 하다.

1437년 세종 19년 11월: 감옥에 질병의 기운이 크게 치열하다. 이들의 치료에 필요한 약재를 대개 병의 증후를 기다려 보고 구하기 때문에 시기(時期)를 놓치는 경우가 많으므로, 혜민국(惠民局)에서 약을 미리 타서 치료의 시기를 잃지 말게 하다.

1438년 세종 20년 3월: 황해도에 악질(惡疾)이 크게 유행하다. 황주, 봉산에서 시발하여 재령, 문화, 장연, 신천 등지에 만연하므로 각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여제(유행병이 돌 때 지내는 제사)를 지내게 하다.

1438년 세종 20년 4월: 경기도 근처에 온천(溫泉)이 있는 곳을 발견한 자에게 상을 주기로 하다.

1444년 세종 26년 1월: 황해, 평안도에 여러 종류의 악질(惡疾)이 전염하나 혜민국, 제생원에는 약재가 귀하므로 전의감(典醫監)으로 하여금 의술에 능한 자를 시켜 여러 처방을 고찰하게 하고, 삼의사(三醫司: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 소유의 약재를 신속히 조제하여 보내게 하다.

1444년 세종 26년 7월: 안질(眼疾) 환자 이문은, 김을생 등을 전의(典醫) 초수(椒水)에 보내 눈병 치료를 시험케 하다.

전(前) 경시서령 장택 등을 전의(典醫) 초수(椒水)에 보내 눈병 치료를 시험케 하다.

1445년 세종 27년 3월: 온양의 문을경이 안질약(眼疾藥)을 헌납하다.

1445년 세종 27년 11월: 제주도의 제주, 선의, 대정에 나병(癩病: 문둥병)이 유행하므로 3읍(邑)에 각각 치병소(治病所)를 설치하여 병인(病人)을 모아 의복, 양식, 약물(藥物)을 지급하고 아울러 목욕 도구를 갖추고 의생(醫生), 승려로 하여금 치료를 맡게 함. 이때 나환자 69명 중 45명은 완쾌, 10명은 앓는 중이고, 14명은 사망하다.

1447년 세종 29년 5월: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므로 온신(瘟神: 염병의 신)에게 제사 지내다.

한성부로 하여금 5온신(瘟神)의 제사를 5부(部)로 하여금 지내게 하여 빌다.

당시 동서활인원의 환자수는 천여 명에 이르다.
의금부에 갇혀 있던 죄수 중 병에 걸린 자를 석방하다.

1448년 세종 30년 7월: 죄수들의 목욕과 감옥의 청결을 위한 고찰을 집현전(集賢殿)에 지시하다.

1448년 세종 30년 8월: 죄수들의 질환(疾患)방지법을 각 도 감사(監司)에게 전달하다.

1, 매년 4~8월까지는 새로 냉수를 공급하여 옥중에 자주 갈아 줄 것.
2, 5월부터 7월 10일까지 한차례 자원하는 자에게 목욕 시킬 것.
3, 매월 한차례 자원자에게 머리를 감길 것.

1448년 세종 31년: 병이 있는 부녀자는 불러 올 수 없으니 의녀(醫女) 2, 3인을 그 집에 보내게 하다.

1450년 세종 32년 2월: 승려 50명을 뽑아 구병(救病) 활동을 돕게 하다.

각 의료기관의 위치(『세종실록지리지』권 148.

1, 동활인원: 동대문 밖
2, 서활인원: 서소문 밖[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
3, 여 제 단: 창의문 밖
4, 귀 후 소: 용산 강변

1451년 문종 1년 8월: 황해도에 악질(惡疾)이 유행, 침구(鍼灸)와 의약(醫藥)을 겸비한 자를 보내 치료케 하다.

1451년 문종 1년 9월: 황해도 악질(惡疾) 퇴치에 관해 도승지에게 비밀히 지시하다.

1, 벽사의 약(藥)을 태워 그 기운을 소산(消散)시킬 것.
2, 약(藥)과 불법(佛法),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면 그 기운이 자멸할 것임.
3, 여귀(돌림병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그 기운을 소산시킬 것.

경기도 원평(파주군), 고하(파주군 교하리), 풍덕(개풍군), 황해도 황주, 봉산 등지에 악질이 유행하다. 의약으로 치료하여도 효험이 없어 수륙재를 설치하여 여제를 시행하다.

1451년 문종 1년 10월: 황해도 황주는 중국 사신이 통과하는 지역이나 근래 질병으로 사망한 자가 반이 넘으므로 생환한 자는 5년 동안 복호(復戶: 세금 감면)케 하다.

1451년 문종 1년 11월: 개성에는 악질에 걸리 자가 곳곳에 서로 모여 있으므로 의생(醫生)들이 치료하기에 쉬우나, 경기 지방은 그렇지 못하므로 가옥을 지어 환자를 한데 모아 치료케 하다.

풍덕, 교하, 원평 등지의 악질병자들을 위해 부근에 흙집을 신축하여 모아서 치료하였다.

1452년 문종 2년 3월: 경기도의 주군(州郡)에 악질병 사망자가 많다.

승려(僧侶) 설의를 경기도 주군(州郡)에 보내 악질병 구료를 위한 수륙재를 지내다.

1452년 단종 즉위년 5월: 행(行)부사정 임원이 의학(醫學) 편의를 건의하다.

1, 몇몇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의학 교육을 분담케 함.
2, 각 도에 의국(醫局)을 설치하고 약을 조제하여 발매(발매)할 것.
3, 당약(唐藥: 중국약)을 절제하고 새로운 향약(鄕藥)을 사용할 것.
4, 침구(鍼灸) 전문의 방법을 수립하여 침(鍼)과 약(藥)을 병행 사용할 것.

1452년 단종 즉위년 6월: 부여현의 2, 3 마을에 악질병으로 주민이 거의 사망하므로, 병(病)의 증세와 사망자를 상세히 보고케 하다.

경창부윤 이선제가 황해도에 악질병이 침투하여 전염되는 것은
문화현 구월산(九月山)의 단군사(檀君祠)의 삼성당(三聖堂)을 혁파하여 평양으로 옮겨서 제사지내기 때문에 병(病) 기운이 먼저 구월산 산간 지방의 민간 집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 장연, 재령, 신천 등지로 전염되는 주군(州郡)에는 여제단을 설치하고, 옛 삼성당을 다시 수리(修理)하고 존숭하기를 건의하다.

1452년 단종 즉위년 12월: 경기, 개성, 황해도에 번진 악질을 치료하는 의원(醫員)을 모래도록 교대하지 않으면 오히려 전염될 우려가 있으므로 경질케 하다.

1453년 단종 1년 1월: 황해도의 각 읍(邑)에 악질병 사망자가 많다.

1454년 단종 2년 3월: 강원, 황해도에 기근과 질역(疾疫)으로 떠돌아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다.

1456년 세조 2년: 각 도의 관찰사에 도내의 거주민 중 창진(瘡疹) 혹은 온역(瘟疫)에 걸린 자에게 약을 나눠 주어 치료하도록 하며, 또한 환자가 있는 집에는 잡역(雜役)을 제외시켜 오로지 질병 치료에 전념토록 지시하다.

1459년 세조 5년 11월:
『의방류취(醫方類聚)』를 교정하다.

1463년 세조 9년:『의약론(醫藥論)』을 인출하여 반포하였는데 그 중 8종의(種醫)를 열거하다.

1, 심의(心醫): 병자의 마음을 안심(安心)시켜 동요치 않게 하는 자.
2, 식의(食醫): 입의 단맛을 위주로 보는 자. 입이 달면(밥맛이 좋으면) 기(氣)가 편안하고, 입이 쓰면(밥맛이 쓰면) 몸도 고단하고 약하다.
과식을 금지시키지 못하는 자는 식의가 아니다.
3, 약의(藥醫): 오직 약방문(藥方文)에 의존해 약을 사용할 뿐이다.
위급하고 곤란할 때에도 약을 권하기를 거두지 않는자.
4, 혼의(昏醫): 위급함에 임하면 문득 혼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앉아서 조는 듯 시료할 바를 모르는자.
5, 광의(狂醫): 병자를 상세히 살피지 않고 문득 극약(劇藥)을 사용하는 자.
6, 망의(妄醫): 병자와 상의(相議)도 하지 않고 약을 사용하기를 지시하는 자.
7, 사의(詐醫): 의술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자.
8, 살의(殺醫): 조그마한 총명으로 족하다 생각하고 먼저 말부터 하는 자.

[조선왕조실록 원문]

[○上製《醫藥論》, 以示韓繼禧、盧思愼及兒宗等, 命任元濬出註印頒。 論曰:

“夫治病用藥, 變吉凶, 弄造化, 定禍福, 只在卞寒熱對治而已, 乘盛衰早圖而已, 八種之醫, 所莫窺也。 人之始得病也, 氣猶盛, 藥力易行, 亦可施烈藥, 及其勞困, 藥力不行, 亦不得施烈藥, 則無如之何矣。 故曰乘盛衰而早圖也。 寒則必有熱, 熱則必有寒, 內外中間多少未分, 非深得妙處者難卞。 至如酒痢而泄潟, 以爲冷而報熱藥則痢不止而成他證, 若飮氷水, 愈多愈美。 是知熱極生冷, 冷極生熱。 故曰卞寒熱而對治也。 瘡疹傷寒之劑, 不外是耳。 大抵用藥, 如是而已, 若氣敗心喪, 人理已傾, 則不如勿藥焉。 何謂八種之醫?

一者心醫,

二者食醫,

三者藥醫,

四者昏醫,

五者狂醫,

六者妄醫,

七者詐醫,

八者殺醫。


心醫者, 敎人常使心安, 病者勿動其心, 殆時苟無大害, 必曲從其願。 心安則氣安故也。 有與病者對酒不醒者, 此非心醫也。 食醫者, 以爲口所甘食也。 口甘而氣安, 口苦而已苦, 食有寒熱, 可以對治, 何籍苦辛、枯草、腐根? 有不禁過食者, 此非食醫也。 藥醫者, 只知按方, 循文用藥, 雖至危困, 勸藥不撤者也。 昏醫者, 臨危先迷, 當急便縵, 昏昏如失, 罔知所措, 見事不知某事, 聞言不知其趣, 兀然坐睡, 無所施爲者也。 狂醫者, 無詳審而遽用烈藥針砭等, 亦無忌諱, 自言我見鬼而擊勝焉, 如遇巫祀, 輒入醉舞者也。 妄醫者, 命藥無或當不與議而往參不已者也。 詐醫者, 心欲爲醫, 謬爲醫行, 實專不知者也。 殺醫者, 小有聰明, 自以爲足, 未更世事, 未通人天, 曾無愍惻之心, 固守好勝之志, 東以折西, 先言而後求於心, 求而不得, 附會而莫合其義, 豈不愧於識者? 姑且矜於迷人, 慢忽神人, 種植迷業, 今無現厄, 何時改轍? 是之謂殺醫。 殺醫者, 非愚而自是非他, 陵慢之徒也。 最下無所用, 當殺其一身, 莫殺其他身。 又有無心之醫者, 必爲生本無生。 無生無病, 無病無醫, 無醫無事。
]

[원문 해석]


[임금이 《의약론(醫藥論)》을 지어서 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과 아종(兒宗) 등에게 보이고, 임원준(任元濬)에게 명하여 주해(註解)를 내어서 인쇄 반포(頒布)하게 하였다. 그 논(論)에 이르기를,

“무릇 병(病)을 치료하고, 약(藥)을 사용하여 길흉(吉凶)을 바꾸고, 조화(造化)를 부리고, 화복(禍福)을 정(定)하는 것은 다만 그 차고 더운 것을 분변(分辨)하여 처방 치료하는 데 있을 따름이요, 그 성(盛)하고 쇠(衰)함을 틈타서 일찍 도모하는 데 있을 따름이니, 8종(種)의 의원(醫員)도 그것을 엿보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이 처음으로 병(病)을 얻으면 기운이 오히려 성(盛)하여 약의 효력이 발생하기가 쉽고, 또한 독한 약을 쓸 수도 있을 것이나, 몸이 노곤(勞困)하게 되면 약의 효력도 발생하지 못하고 또한 독한 약도 쓸 수도 없을 것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하고 쇠한 때를 틈타서 일찍 도모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몸이 차면 반드시 열기(熱氣)가 있고 몸이 더우면 반드시 한기(寒氣)가 있는 법이나, 몸의 안팎과 중간에 한열(寒熱)의 많고 적음을 분변하기가 어려우므로, 묘한 곳을 깊이 진맥하는 자가 아니면 분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리(酒痢)의 병으로 설사(泄瀉)를 하는 경우와 같은 때에 냉(冷)하다 하여 열약(熱藥)을 먹으면 주리(酒痢)가 그치지 아니하고 다른 증세를 나타내니, 만약 얼음 물을 마신다면 많이 마실수록 더욱 좋은 것이다. 이것으로써 열(熱)이 극하면 냉(冷)이 생기고, 냉(冷)이 지극하면 열(熱)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열(寒熱)을 분변하여 처방 치료한다.’고 하는 것이다. 창진(瘡疹)과 상한(傷寒)의 약제(藥劑)도 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저 약을 쓰는 것은 이와 같을 따름이니, 만약 기운이 다하고 마음이 상(喪)하여 인리(人理)가 이미 기울어졌을 때에는 약(藥)을 쓰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무엇을 8종(種)의 의원(醫員)이라고 하는가 하면

첫째가 심의(心醫)요,

둘째가 식의(食醫)요,

세째가 약의(藥醫)요,

네째가 혼의(昏醫)요,

다섯째가 광의(狂醫)요,

여섯째가 망의(妄醫)요,

일곱째가 사의(詐醫)요,

여덟째가 살의(殺醫)이다.

1, 심의(心醫)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가르쳐서 병자(病者)가 그 마음을 움직이지 말게 하여 위태할 때에도 진실로 큰 해(害)가 없게 하고, 반드시 그 원하는 것을 곡진히 따르는 자이다.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자와 더불어 술을 같이 마시고 깨어나지 않은 자가 있다면 이것은 심의(心醫)가 아니다.

2, 식의(食醫)라는 것은 입[口]으로 달게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니, 입이 달면 기운이 편안하고, 입이 쓰면 몸이 괴로와지는 것이다. 음식에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처방 치료할 수가 있는데, 어찌 쓰고 시다거나 마른 풀이나 썩은 뿌리라고 핑계하겠는가? 지나치게 먹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식의(食醫)가 아니다.

3, 약의(藥醫)라는 것은 다만 약방문(藥方文)을 따라 약을 쓸 줄만 알고, 비록 위급하고 곤란한 때에 이르러서도 복약(服藥)을 권하시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이다.

4, 혼의(昏醫)라는 것은 위태한 때에 임하여 먼저 당혹하고, 급할 때를 당하여 문득 망연하여 혼혼(昏昏)하기가 실성(失性)한 것 같아서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므로, 일을 보더라도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말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하며, 우두커니 앉아서 잠자코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이다.

5, 광의(狂醫)라는 것은 자상히 살피지 아니하고, 갑자기 열약(烈藥)과 침폄(針砭) 등을 쓰기를 또한 꺼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귀신을 만나도 공격하여 이길 수 있다.’고 하나, 만약 무당의 제사(祭祀)를 만나면 문득 들어가서 술에 취하여 춤을 추는 자이다.

6, 망의(妄醫)라는 것은 목숨을 건질 약(藥)이 없거나 혹은 병자와 같이 의논하지 않아야 마땅한데도 가서 참여하기를 마지 않는 자이다.

7, 사의(詐醫)라는 것은 마음으로는 의원(議員)이 되려고 하나 의술(醫術)을 잘못 행하고, 사실 온전히 의술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8, 살의(殺醫)라는 것은 조금 총명한 점이 있어서 스스로 의술(醫術)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나, 세상의 일을 겪어보지 못하여 인도(人道)와 천도(天道)에 통달하지 못하며, 병자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도 일찍이 가진 적이 없어서 병에 이기기를 좋아하는 뜻을 굳게 지키면서 동쪽을 가지고 서쪽을 꺾으며, 말을 먼저 하고 난 뒤에야 마음에 구(求)하는데, 구하여도 얻지 못하면 억지로 부회(附會)하지만 그 의리(義理)에 합당치 않으니, 어찌 아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아직도 미혹(迷惑)한 사람에게는 자랑을 하며, 거만하여 신인(神人)을 소홀히 여기어 종종 직업에 미혹한 짓을 범하니, 지금 당장 나타난 재액(災厄)은 없다고 할지라도 어느 때에 그 행동을 고치겠는가? 이것을 살의(殺醫)라고 하는 것이다. 살의(殺醫)라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그르다고 여기어 능멸하고 거만하게 구는 무리이다. 최하(最下)의 쓸모 없는 사람이니, 마땅히 자기 한 몸은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무심(無心)한 의원(醫員)이 있으니, 마음은 생(生)이 되나 근본은 생(生)이 없는 것이다. 생(生)이 없다면 병(病)도 없을 것이요, 병(病)이 없다면 의술(醫術)도 없을 것이요, 의술(醫術)이 없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출처: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11책 31권 35장 A면; 영인본 7책 598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의약-의학(醫學)-약학(藥學)]

1469년 예종 1년: 공조판서 양성지의 건의 중 편의(便宜) 28사(事)

1, 각부와 현에 의사를 파견하다.
2, 서울에는 의사(醫師)가 있어 약을 담당하고 의원(醫員)이 있어 병을 진료하나, 외방의 각 관에는 비록 의생도(醫生徒)가 그 수를 갖추고 있고 또한 심약(審藥)이 있은자 궁촌민(窮村民)들이 질병에 걸리면 고생이 심하다. 율학 생도가 매주에 1명씩 있는 것과 비례하여 각 현에는 1명, 군에는 2명, 도호부 이상은 3명씩 전의감에 내속케 하여 1년 혹은 3년 동안 의서(醫書)를 강습하고 의사(醫事)를 학습하여 각각 산관(散官), 권지(權知)를 수여하다.

1470년 성종 1년 6월: 한명회의 건의에, 왜인이 많이 칡을 채취하여 먹고, 우리 백성들도 간혹 채취하여 먹는 자가 있으니 시험하여 혹 먹을 수 있으면 널리 일반에게 알려 구황(救荒)에 대비케 하다.

1471년 성종 2년 6월: 대사헌 한치형 등이 시의(時宜) 17조(條)를 진술하는 중에 무격(巫覡)을 성밖으로 축출케 하는 조항이 있다.

무격이 세상에 행한지 이미 오래다. 가히 하루에 다 버릴 수 없으나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이 조금만 질병이 있어도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을 초청한다. 또한 병자(病者)들을 맞이하므로써 질병을 동리에 퍼트리며, 가무(歌舞)로써 여염을 시끄럽게 하고, 영혼을 불러 백성을 미혹케 할 뿐 아니라 남자로서 화랑(花郞)이라 칭하는 자가 사술(詐術)로써 타인의 재물을 취하는 등의 일을 금지케 하다.

1472년 성종 3년 2월: 황해도에 근자 악질(惡疾)이 크게 유행하므로 관찰사 이예가 노인들을 초빙하여 질병(疾病)의 원인을 물으니 아래와 같은 소견을 말하다.

1, 악질은 전에 비하면 가볍고 뜸하나 황주, 봉산, 재령, 문화, 강령, 옹진, 장연, 풍천, 강음, 평산, 백천이 가장 심하다.
2, 악질의 증상은 전신불수, 전간, 골증(骨蒸: 뼈가 몹시 쑤시는 병), 청맥, 해수(咳嗽: 기침), 천식 등이 가장 많다.
3, 악질이 일어나는 원인은 모두 자성의 옛 전장(戰場)으로부터 이거나 혹은 문화의 삼성당(三聖堂)으로부터 일어난다.
4, 악질에 걸린 자는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다. 남자는 필시 굶주림과 추위와 풍상에 저촉되어 고생의 극에 이른 소치로 처음에 현훈(
眩暈: 어지러움)이 일어나고, 점차 청맹과니(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가 되며 황홀하여 간질이일어나다가 전시노채(傳尸勞瘵: 말기 결핵 환자, 전염성 결핵 환자)에 이르거나 뼈가 시리면서 점점 전염된다.
5, 송화에 사는 72세 노인 최득호가 말하기를 봉산인 전영의 말을 빌어, 옛날 명나라 사신 황씨가 올 때 황주 월봉사의 재목으로 관사를 수리하고, 또한 성황당의 고목을 잘라서 흑교(黑橋)을 만든 후부터 생긴 것이라 하다. 또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자성의 전쟁터에서 죽은 해골의 도깨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다.

황해도에 악질이 크게 치열하다. 문화현 구월산(九月山) 삼성당에 제를 행하고 화주, 자성 및 문화에서는 여제단을 신설하여 제사케 하는 한편 악질 구료의 절목을 정하다.

1474년 성종 5년 5월: 예조(禮曹)가 한성부로 하여금 서울 안팎에 질병이 성행하여 사망자가 많으므로 의무(醫巫)로 하여금 약을 준비하여 구휼케하다.

1474년 성종 5년 6월: 여염에 질병이 성행하여 의무(醫巫)로서 약을 내려 구료케하였으나 관리들이 태만하여 사망자가 심히 많으니 서인(庶人), 천민, 노예의 구료자는 동서활인성 모두 옮겨 함께 치료케 하다. 사망자는 곧 매장하고 성(城) 근처에는 시체를 버리지 말 게 하다.

1477년 성종 8년 5월:
『의방류취(醫方類聚)』30질을 인출하다.

1478년 성종 9년 2월: 예조가 의녀(醫女) 권과(勸課)의 조(條)를 다음과 같이 아뢰다.

1, 예문관원 및 유명(有名) 문신 2명을 교수로 겸임시켜 도령가면서 가르칠 것.
2, 의녀로서 읽을 책은
『직지맥』,『동인경』,『가감 13방』,『화제부인문』,『산서』로 할 것.
3, 의녀는 3등급으로 나누어 내의(內醫) 2명은 매 초하루 급료를 지급하고, 간병의(看病醫) 20명은 지난달의 강서(講書)가 많은 4명을 뽑아 급료하고, 나머지는 초학의(初學醫)로 한다.
4, 제조(提調)가 매월 산순에 진맥, 명약(命藥)하고 하순에 점혈(點穴: 침이나 뜸 뜰 자리에 점을 찍는 것)한다.
연초에 의사(醫司) 제조가 방서, 진맥, 명약, 점혈을 강의하되 1년 뒤 시험을 보아 통과하지 않은 것이 많으면 첫해에는 봉족(奉足: 평민이나 천민이 출역하였을 때 출역치 않은 여정(餘丁)을 한두 사람 정정(正丁)의 집에 주어 집안 일을 돌보게 함) 1명, 이듬해에는 2명, 3년째에는 본역에 돌려 보내다.
5, 초학의는 병을 보는 것을 정하지 말고 악업에만 전념케 하고 1년에 만 40방 중에 1방도 불통하거나 별다른 기술이 없으면 본역으로 돌려 보내다.

1479년 성종 10년 7월: 노인병의 복용약과 혼인 및 제사 그리고 병(甁)술을 가진 자 외에는 술을 금하다.

1481년 성종 12년 5월: 호조가 경기 및 하삼동(충청, 전라, 경상도)의 가뭄에 구황(救荒)의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다.

1, 소금이 구황에 가장 긴요하다.
2, 장(醬)이 구황에 긴요하다.
3, 황각나물, 세모(細毛: 참가사리), 해초, 산삼, 질경이, 현채(비름), 상수리 등과 목매(메밀) 줄기와 잎새는 가히 먹을 수 있다.
4, 구황에 응할 긴요한 초식(草食)을 많이 예비할 것.
5, 매년 구황 및 종자용으로 양맥(보리와 밀)을 경작할 것.
6, 청근(무)이 구황에 긴요하다.

1482년 성종 13년 4월: 황해도에 질병이 심하여 사람이 많이 죽다.

1484년 성종 15년 6월:
양(羊)의 간이 특히 안질(眼疾)을 치료하는데 효험하다고 알려지다.

1485년 성종 16년 7월: 혼인, 제사, 헌수, 노인병, 복약, 병술을 가진 자 외에는 술을 금하다.

1488년 성종 19년 9월: 황해도에 악질(惡疾)이 있으므로 올 가을 강무(講武)는 강원도에서 시행케 하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실린 약을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판별하여 사용케 하기 위해, 노의(老醫)로 하여금 항상 사용해 보게 하여 효과가 있는 것을 뽑아 언문으로 번역한 뒤 인출하여민간에 보급케 하다.

1488년 성종 19년 10월: 황해도 황주, 봉산, 문화, 장연, 풍천 등지에 악질이 매우 심하다.

1489년 성종 20년 4월: 장연 사람, 하언 등이 이 지역에 악병(惡病)이 널리 퍼져 숨을 거둔 자를 알 수 없을 정도이므로 관사를 옛 터로 이전하기를 청하다.

1489년 성종 20년 5월: 윤호 등이
『신찬구급간이방(新纂救急簡易方: '신찬구급방' 또는 '구급간이방언해'라고도 함: 보물 제1236-1호(지정일: 1996-01-19))』9권을 지어 바치다. 

1492년 성종 23년 3월:
금주령(禁酒令)을 내리다.

1494년 성종 25년 12월: 배꼽 밑에 작은 덩어리가 쌓인 듯 아플 때,
수철(水鐵: 무쇠)이나 천년 묵은 기와를 불에 달구어 뜸을 뜬 기록이 보이다.

1497년 연산군 3년 1월: 정승충이란 자가 그 하녀를 시켜서, 그 아내가 문경에서 실행(失行)하여 임신하였으므로, 하녀의 남편으로 하여금 낙태약을 사오게 하여 먹였더니, 처의 젖이 까맣게 되고 배가 커진다고 보고하다. 사헌부에서 의녀(醫女)를 모내 진찰해 본즉 효험이 없는 지라, 이는 승충이 처를 버리려고 무고하게 고한 것이라 하다.

1500년 연산군 6년 1월: 인가(人家)에 돌림병이 점점 전염되다.

1502년 연산군 8년 3월: 혼인, 제사, 노인의 질병에 쓸 복용약 외에는 비록 병술이라도 술을 금하다.

1502년 연산군 8년 6월: 사헌부에서 근래 부자, 사족들의 혼수가 극히 사치하므로 혼인 납채일에 의녀(醫女)를 보내 검찰하기를 주청하다.

1503년 연산군 9년 4월: 요승 허웅이 스스로 생불(生佛)이라 칭하며 모든 사람들의 독질(篤疾), 폐질(癈疾), 창종(瘡腫) 등 질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화복설(禍福說)로써 우매한 백성들을 유혹하다.

심지어는 인근 읍의 군수들도 병을 치료하는 예가 있으므로 허웅을 극형에 처하고 수령으로서 병을 치료한 자를 국문하다.

1505년 연산군 11년 11월: 질병이 있는 집에 혜민서, 전의감에서 의술이 정통한 자 4명을 선발하여 돌보게 하니, 부르기를 사활(司活)이라고 하다.

1506년 연산군 12년 1월: 금후 매년 계춘(季春), 중추(仲秋), 계동(季冬)에 질병을 쫓다. 임금이 질병을 두려워하여 행차하는 지역에 먼저 우분(牛糞: 쇠똥)을 태워서 빌다.  
뇌영원에서 쇠똥을 소각하다.

1506년 연산군 12년 6월: 내인(內人) 중에 불법으로 잉태한 자는 함방원(含芳院)에 들이지 않고, 연방원(聯芳院) 혹은 질병가(疾病家)에 강등 배치하고 그 지아비에게 벌을 주며, 아이는 낳은 뒤 매장케 하다.

1513년 중종 8년 8월: 평양에 돌림병이 크게 흥하다.

1516년 중종 11년 6월: 소격서와 성황당의 폐지 건의가 있었으나 불허하다.

1517년 중종 12년 12월: 제주도에 질병이 유행하다.

1519년 중종 14년 3월: 황해도 봉산, 재령, 문화 3읍에 돌림병이 흥행하다.

1522년 중종 17년 8월: 수로를 통해 요동에
인삼(人蔘) 등을 밀매하는 경상(京商) 및 안악인 13명을 선천에서 붙잡다.

1524년 중종 19년 7월: 평안도 용천 경내에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자가 706명에 이르다. 의주와 철산읍에서도 병(病)이 돌아 3월 이후 돌림병으로 사망한 자가 의주 687명, 철산 169명, 곽산 40명에 이르다.
평안도에 입주민은 돌림병이 잠잠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다.

1524년 중종 19년 8월: 평안도에 돌림병 사망자가 계속적으로 늘어나 1,700명여명에 이르다.

1524년 중종 19년 10월: 평안도 귀주에 질병 사망자가 21명에 이르다.

1524년 중종 19년 11월: 평안도에 돌림병으로 사망한 자가 선천 18명, 곽산 30명, 정주 19명, 철산 10명이고, 7월 이후로는 귀성 107명, 삭주 19명에 이르다.
이 지역에 득병(得病), 와병자가 많은 것을 백성들은 강변의 옛 무덤의 석축(石築)을 모두 파므로써 일어났다고 하다.

1524년 중종 19년 12월: 평안도에 돌림병이 계속 돌아 10월 이후의 돌림병 사망자가 220명이나 되다.
평안도에 여역(전염성 열병) 제문(祭文)을 보내 귀신을 위로하고 유행병이 잠들기를 빌다. 평안도 전후 사망 통계가 3,880여명에 이르다.

1525년 중종 20년 1월: 평안도에 전염성 열병이 그치지 않고 계속 번져 종묘(宗廟), 명산, 대천에 기도하다. 보통의 전염병은 봄, 가을에 많고 날씨가 차면 잠드는 법인데 이번 것은 겨울에도 오히려 치열하니 괴상하다. 방어군졸의 전염 사망자 수도 4,800여 명이나 되어 방비가 염려되다. 처음에는 모두 노약자들이 주로 질병에 걸렸었으나 이제는 장년도 걸리고 또한 병을 앓았던 자가 다시 앓기도 하므로, 병을 피해 황해도로 이주하는 자가 많다.

고을마다 사망자가 많아 평양 128명, 의주 94명, 중산 47명, 양덕 14명, 강계 106명, 가산 49명, 철산 27명, 함종 44명, 용강 23명, 선천 57명, 정주 74명, 영변 85명, 성천 22명, 운산 11명이다.

1525년 중종 20년 2월: 평안도 돌림병 사망자가 합계 7,724명이나 되다.

1525년 중종 20년 3월: 평안도의 돌림병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12,915명에 이르다.

1525년 중종 20년 7월: 평안도의 돌림병이 그치지 않아 사망자 통계가 22,349명이나 되다.

1525년 중종 20년 10월: 평안도 숙천 23명, 함종 16명, 양덕 17명, 가산 3명이 7월 이후 돌림병으로 사망하다.

1526년 중종 21년 2월: 충청도의 돌림병 사망자가 460명에 이르다.
함경도 경성 경내에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한집에 7, 8명이 죽거나 혹은
전 가족이 몰사하기도 하여 사망자가 438명에 이르다.

1526년 중종 21년 3월: 충청도 돌림병 사망자가 686명, 함경도 976명, 강원도 124명, 경기도 21명, 전라도 928명에 이르다.

1526년 중종 21년 4월: 경상도의 유행성 열병 사망자 1,290명, 함경도 680명에 이르다.
염병 사망자가 경상도 237명, 염병 사망자가 전라도 560명을 기록하다.

1526년 중종 21년 5월: 전라도 돌림병 사망 142명, 함경도는 3월 이후부터 580명이 사망하다.

1526년 중종 21년 6월: 함경도 돌림병 사망자 312명, 경상도 223명, 강원도 111명에 이르다.

1526년 중종 21년 7월: 전라도에 돌림병이 그치다.
함경도 돌림병 사망이 이 달에 326명이나 되다.

1526년 중종 21년 12월: 함경도와 강원도에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다.

1527년 중종 22년 1월: 강원도 삼척, 강릉에 돌림병 사망이 95명이나 되다.

1527년 중종 22년 2월: 함경도에 돌림병이 유행하다.

1527년 중종 22년 5월: 충청, 경상도에 돌림병이 번지다.

1528년 중종 23년 10월: 길을 가다 말발굽에 채여 다치는 자가 빈번하므로 이들을 즉시 치료케 하다.

1532년 중종 27년 3월: 근래 악질(惡疾)이 있는 자가 산사람의 간담(肝膽: 간, 쓸개)이나 손가락을 먹으면 즉효가 있다고 하여, 오작인(
仵作人: 시체 사역인, 시체 임검하던 하인)이나 게걸인(거지)에게 비싼 값을 지급하고 그것을 사는 풍습이 유행하다.

심지어는 관찰사 집의 10여 살 날 어린애를 산중에 유괴하여 손가락을 자르고 그 흔적을 줄이려고 온몸을 칼로 찔렀으나 요행히 목숨은 건지 바 있다. 형조 당상 및 좌우 포도대장에게 명하여 범인 체포를 독촉하다.

1534년 중종 29년 5월: 경상도에 돌림병이 있어 영해부에 질병으로 사망한 자가 190여 명이고, 안동부에 911여 명이다.

1534년 중종 29년 6월: 근래 형관이 죄수들을 신중히 다루지 않아 2, 3차례의 형문(刑問)에도 사망하므로 형조 관리, 전옥 관원, 월령의원(月令醫員)들에게 모두 죄를 묻다.

1535년 중종 30년 3월: 강원도 울진현의 촌민, 관속이 돌림병으로 죽은 자 190여 명에 이르다.

1538년 중종 33년 6월: 평안도 의주, 용천, 철산 등지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전염되어 사망한 자가 거의 150여 명이 되다.

1539년 중종 34년 12월: 국가의 제생(濟生)의 도(道)는 의약(醫藥)이 소중한데, 근래 인심이 해이하고 의약의 폐가 심함을 사헌부가 고하다.

전에는 약재의 소출은 각 관이 의생(醫生)을 시켜 해당되는 달에 채취하여 약방문에 따라 바르게 갈려서 상납하였기에 약재가 많고 정결하였으나, 근자에는 수령이 의생(醫生)을 정하지 않고 채취하므로 생산되는 약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약재(藥材)로 수납하지 않고 포물(布物)로 양의사(兩醫司)에 수납하면 이곳의 노비 등이 약고(藥庫)의 약을 훔쳐 다시 환납하고 약값을 받는 경우가 있으므로 약재가 날로 궁핍해지므로 이 관습을 고치게 하다.

1540년 중종 35년 6월: 전라도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민간인이 많이 죽다.

1541년 중종 36년 1월: 서울 뿐 아니라 충청도 천안, 목천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200여 명에 이르다.

평안도에
소의 돌림병(구제역)이 크게 퍼져 죽은 소가 3,515마리나 되다.

1541년 중종 36년 3월: 지난 겨울부터 금년 봄까지 비가 오지 않고, 돌림병이 심해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다.

1542년 중종 37년 2월: 함경도 회령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200여 명이고, 덕원, 함흥, 홍천에는 돌림병이 치열하여 사람이 많이 죽다.

1542년 중종 37년 3월: 경상도에 돌림병이 크게 번지다.
함경도 경성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700여 명이나 되다.

1542년 중종 37년 5월: 함경도 각 읍에 돌림병이 치열하다.

1542년 중종 37년 7월: 전라도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나주 419명, 영암 308명, 강진 232명이 죽다.

1544년 중종 39년 2월: 부평에 돌림병이 돌고, 강화도에는 온역(瘟疫: 봄철 전염병)으로 80여 명이 죽다.

1544년 중종 39년 3월: 앞서 강화도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의원을 보냈으나, 이 의원이 염병(장티푸스)으로 의심하여 두려워 스스로 여염집을 드나들며 치료를 하지 않아 55명 사망에 앓고 있는 자 56명이나 되므로 그 의원을 체포하고 다른 의원을 보내다.

경상도 고성에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100여 명이 되다.

1544년 중종 39년 4월: 충청도에 전염성 열벼잉 치열하여 아산현은 40여 명 사망에 131명이 앓고 있으며, 보은은 13명 사망에 앓고 있는 자 166명, 청주는 163명이 죽고 177명이 앓다. 

1545년 인종 1년 3월: 충청도 임천, 공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6년 명종 1년 4월: 함경도에 전염성 열병이 극심하여 사망자가 갑산 28명, 삼수 73명, 홍원 26명, 길주 127명, 명천 80명, 경성 79명, 부령 38명, 회령 92명, 온성 197명, 경원 134명, 경흥 67명 등 도합 1,331명이나 되다.

경기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가평 170명, 김포 32명, 영평 180명이 죽다.

경상도 비안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6년 명종 1년 5월: 충청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남녀 사망자 261명, 누워 앓는 자 253명에 이르고, 경기도 부평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44명 병사, 169명이 앓고 있다.

1546년 명종 1년 6월: 전라도 임실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많다.

1546년 명종 1년 7월: 경상도 청송, 비안에 돌림병 사망자가 60여 명에 이르다.

1546년 명종 1년 10월: 경기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7년 명종 2년 1월: 충청도 청산, 영춘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다.
강원도 춘천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7년 명종 2년 3월: 평안도 용강, 충청도 한산 등지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일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심하므로 노인병에 쓸 복용약을 제외하고는 일절 금주(禁酒)하다.

1547년 명종 2년 5월: 성안에 전염병으로 60여 명이 앓고 있고, 또한 길에 거지와 성밖에 시체가 즐비하므로 활인서 및 오작인을 벌하다.

1547년 명종 2년 6월: 충청도 청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75명이 사망하다.

1547년 명종 2년 7월: 전라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맹렬하다.

1547년 명종 2년 11월: 강원도 통천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많다.

1548년 명종 3년 1월: 한성부의 5부(部)에 전염성 열병 사망자가 많아, 각 방(坊)에 별도로 의무(醫巫)를 보내 구료하게 하다.

1548년 명종 3년 3월: 충청도 황간에 전염성 열병으로 남녀 184명이 죽다. 공주, 서산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청주는 정월 이후 사망자가 31명, 현재 앓고 있는 자가 19명이고, 온양은 사망자가 70명에 앓고 있는 자가 93명, 진천은 사망자가 560명에 현재 와병중인 자가 989명, 회인은 10명이 죽다.

황해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548년 명종 3년 4월: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경상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각각 140명, 359명, 158명, 1,683명이 사망하다.

1548년 명종 3년 5월: 충청도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187명이 죽다.
평안도 평양, 중화, 자산, 삼등, 순안 등지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438명이 죽다.

황해도 황주, 해주, 서흥, 신천, 봉산, 수안, 백천, 재령, 강음, 송화, 은율, 장연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많고, 경기도에는 421명이 죽다.

1548년 명종 3년 6월: 경상도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630명이 사망, 충청도에는 사망자가 530명, 와병중인 자 760명 가운데 448명, 강원도 229명, 평안도 129명이 죽다. 이때 석웅황(石雄黃)을 사용하면 서로 전염치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1549년 명종 4년 3월: 경기도 여주에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600여 명에 이르다.

1549년 명종 4년 4월: 경기, 강원도에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많다.

1549년 명종 4년 6월: 청홍도(충청도)에 전염성 열병으로 남녀 150여 명이 사망하다.

1549년 명종 4년 12월: 북도의 겨울 추위가 다른 도(道)보다 심한데, 금년 겨울은 봄같이 따뜻하여 전염성 열병이 점점 날로 번져 사망자가 11명이 발생하다.

1550년 명종 5년 5월: 충청도 청주, 청양, 음성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발하다.

1550년 명종 5년 6월: 대궐 내의 군사들 가운데 와병자가 많이 발생하므로 구료소의 양식물을 활인서에서 지급케 하다.

평안도 정주, 귀성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와병자가 400여 명, 사망자가 90여 명이 되다.

1550년 명종 5년 11월: 황달, 학질 치료방을 각 도 주, 부, 군, 현의 첨사, 만호 등에 인쇄케 하여 경내의 인민들에게 나눠주게 하다.

1551년 명종 6년 2월: 경기도 고양, 안산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3년 명종 8년 12월: 전라도 두도에 꽃이 만발하고, 양맥(보리와 밀)의 이삭이 패고, 오얏(자두)과 매화가 열매를 맺다.

황달, 학질 전염병 사망자가 전국에 걸쳐 심히 많다.

1554년 명종 9년 2월: 경상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4년 명종 9년 3월: 전라도에도 돌림병이 치열하다.

1554년 명종 9년 4월: 경상도 안동 거주 생원 이포가 민간질고(民間疾苦)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바치다.

1554년 명종 9년 5월: 충청도 홍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 444명, 와병자 621명이다.  강원도에는 대략 1,100여 명이 죽고, 전라도에는 1,550여 명이 죽다.

1557년 명종 12년 2월: 경기도 이천, 교동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7년 명종 12년 3월: 경기도 부평 경내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춘궁기를 맞아 노병(老病) 복용약 외에 술을 일체 금하다.

1557년 명종 12년 5월: 단양 군수 황준량이 건의한 민폐(民弊) 10조 중 약재(藥材)의 폐(弊)에 대해서 웅담, 사향, 백급(대왕풀), 인삼, 복령, 지황 등의 세공(稅貢)은 100필의 포(布)에 미치지 못하고 구하기 또한 어려우므로 감면해 줄 것을 의뢰하다.

1557년 명종 12년 6월: 경기도 인천, 부평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62년 명종 17년 4월: 충청도 진천현에 전염성 열병으로 남녀 70여 명이 사망하고, 제천에도 20여 명이 죽고 138명이 와병중이다.

1562년 명종 17년 6월: 원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백성이 많이 요절하다.

1562년 명종 18년 6월: 충청도 해미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66년 명종 21년 2월: 서울에 사람을 죽이고 쓸개를 탈취하는 자가 빈번하다. 간혹 체포되어 죄를 받는 자도 있다. 이즈음 사서(士庶)들이 음식을 숭상하고 색(色)을 좋아하여 음창(淫瘡: 성병)을 많이 얻다. 어느 의관(醫官)이 가르쳐 주길, 만약 사람의 쓸개를 얻어 치료하면 그 질병이 치유된다 하여 비싼 값으로 사람을 모집하여, 사람을 죽이고 그 쓸개를 빼내다.

서울의 동활인서, 보제원, 인제원, 종루 등지에 거지들이 많이 모였으나, 최근 4, 5년간 1명도 보이지 아니하니 대개가 쓸개를 탈취하기 위해 모두 살해된 것이다.

거지가 없어지자 이제는 평민에게까지 미치는 고로 여염집에서 아이를 잃은 자가 빈번히 많다.

1566년 명종 21년 4월: 충청도 신창에 물이 넘치고, 홍주의 민가에는 돌림병이 치열하다.

1576년 선조 9년 6월: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케 하다. 이때 서울 안팎의 사람들이 창질(瘡疾)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간과 쓸개(肝, 膽)로써 약을 하다.

흉악한 무리들이 어린이를 사람없는 곳에 유괴하며, 비록 건강한 남녀라 할지라도 혼자서 길을 가면 겁탈하여 배를 가르고 쓸개를 탈취하여 비싼 값에 팔려지므로, 나무숲에 결박되어 배 갈라진 자가 산골에 서로 마주 볼 지경이다.

1577년 선조 10년 봄: 8도(道)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민간에 와전되어 독역신(毒疫神)이 내려왔기 때문이라 하여, 잡곡밥으로써 역귀를 물리치다.

1577년 선조 10년 1월: 충청도 천안군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많으며 인근으로 퍼지다.

1577년 선조 10년 2월: 평안도, 황해도에 돌림병이 치열하다.

1577년 선조 10년 3월: 양계(兩界: 평안, 함경도)에 돌림병이 치열하다.

1577년 선조 10년 4월: 평안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6,000여 명에 이르다.

1577년 선조 10년 7월: 8도에 홍수가 나고, 전염성 열병이 성하다.
관서 지방의 백성들이 질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매우 많아 호인(胡人)들이 변경을 넘볼 수 있을 지경이다.

1577년 선조 10년 12월: 양남(영호남)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므로 제사를 지내다.

1578년 선조 11년 6월: 큰 비로 강이 범람하고, 산이 무너지고 집이 떠내려가다.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에는 전염성 열병이 아직 치열하여 죽은 백성이 많다.

1580년 선조 13년 3월: 전라도에 전염성 열병이 만연하다.

1587년 선조 20년 6월: 황해도가 크게 가물고,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많다.
굶주린 자와 질병 사망자가 5,570명이나 되다.

1588년 선조 21년 12월: 황해도, 평안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제(祭)를 지내다.

1589년 선조 22년 4월: 각 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경기, 함경도, 충청도에서 제(祭)를 지내다.

1589년 선조 22년 7월: 강원도 금화, 홍천, 안협, 횡성, 영월, 회양, 인제, 양구, 평해, 간성 등 읍에서 질병으로 누워 앓거나 죽은 자가 많다.

황해도 곡산, 안악, 우봉, 강령, 강음, 토산 등 읍에 누워 앓는 자와 죽은 자가 많다.

비변사에서 중국인들이 강을 건너와 인삼(人蔘)을 캐 가는 폐단을 논하다.

1596년 선조 29년 1월: 전염성 열병이 잠들고, 대신 학질이 치열하다. 이를 당학이라 불렀는데 어린이와 노인이 많이 죽다.

1596년 선조 29년 2월: 영남 지방에 돌림병과 학질이 크게 치열하여 10집 중 7, 8집에 아픈 자가 있으며, 겨울 이래 죽은 자가 많다.

1599년 선조 32년 4월: 강원도 평해에 서자(庶子) 안응진이 그 부모를 일찍 여위고, 당학을 앓는지 2년이나 되어 숨이 끊어질 듯 약해지다. 응준이 7살에 자기 왼손 무명지 한마디를 스스로 잘라 피를 받아 약에 섞어 바치니 어머니의 병이 즉시 쾌유하였고, 그 후에 다시 다음 마디를 잘라 술에 타서 어머니의 병에 바치니 또한 그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하다.

1603년 선조 36년 2월: 전라도 나주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간혹 한 집안 모두가 몰살하다.

1603년 선조 36년 3월: 전라도 내에 전염성, 열병 및 대소역(大小疫: 두창과 홍역), 대두온(大頭瘟)으로 죽는 자가 없는 날이 없다. 특히 장성읍에는 가문이 전멸한 사례가 있다. 성황 등 절에서 제사를 고하다.

병을 얻으면 처음에는 면종(面腫: 얼굴에 나는 부스럼)과 같이 목안이 부어 아프나 약이 효과가 없다.  한집에 5, 6명이 서로 전염되어 누워 앓다가 5일이 못되어 문득 죽으니 극히 참혹하다.

1604년 선조 37년 1월: 전라도 영암, 부안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이 지난 가을 이후부터 전염성 열병으로 죽은 자가 많다.

1610년 광해군 2년 8월:
『동의보감(東醫寶鑑: 보물 제1085호(지정일: 1991-09-30))』 25권이 완성되다.

1610년 광해군 2년 12월: 평상시 양의사(兩醫司)가 모두 전매(典賣)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전란 후에는 다만 혜민성 겨우 다시 설치되었다. 약재가 늘 부족하고 품절되어 모든 백성들에게 능히 지급하지 못하다. 도하 높고 낮은 사람들이 질병이 있을 때 약을 지어 치료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혜민서의 안(安)경기란 자가 평소부터 약재를 사구(私鳩: 개인적으로 모음)하여 지금까지 그만두지 않고 판매를 업으로 하니 사람들이 많이 의뢰하고 있다. 다만 그가 의국(醫局)에 몸담고 있어 한가한 짬이 없으며, 약을 갈라서 파는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살 우려가 있어 이를 널리 펴지 못하는 바이다.

이제 본청에서 사용하는 여분의 쌀 몇 가마를 빌리면 이것으로 약재를 사고 파는 자금으로 삼고, 명년 가을 추수시 반환하고 나머지로 이익을 취해 다시 약재를 구입하는 자금으로 쓰면 공가(公家)에 서로 손실이 없고 다만 약을 널리 쓸 수 있을 것이라 건의하다.

1612년 광해군 4년 1월: 함경동 기근의 뒹 전염성 열병이 다시 치열하고 경흥 등 읍에 사망자가 줄을 잇다.

1612년 광해군 4년 3월: 죄인들이 연일 죽으므로 이는 구료를 잘못한 소치라 하여 월령의원(月令醫員)을 문책하다.

1612년 광해군 4년 4월: 대풍창(大風瘡: 나병, 문둥병)은 천하의 악질인데 경상좌도의 사람이 이 증세가 있는 자가 많다. 근래 많은 사람이 서로 전염하다. 혹 물에 들어가 창(瘡)을 씻어 물고기가 먹거나 집에서 가려워 긁어 헌데 껍질을 만약 닭이 먹은 뒤, 이 물고기와 닭을 사람이 잡아 먹으면 곧 그 병을 앓는다 하다.

점차 이곳만이 아니라 충남, 강원도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1612년 광해군 4년 11월: 함경도에 전염성 열병이 가을 이후로 치열해져 점점 만연하니 사상자가 많다. 북에서 오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각 읍 여염집의 전염병 환자의수가 수백, 수천에 이른다고 전하다.

1612년 광해군 4년 12월: 강원도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여 어느 곳이나 모두 그렇다. 목하 전염성 열병이 함경도, 강원도 뿐만 아니라 서울과 각 도가 다 치열하다. 함경도가 특히 심해 돌림병 사망자가 2,900여 명에 이르다.

1613년 광해군 5년 2월: 허준이 지은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보물 1087 호(지정일: 1991-09-30)1권을 간행하다.

1613년 광해군 5년 9월: 전염병에 단을 쌓고 제(祭)를 빌었으나 병기(病氣)가 쉬지 않아 다시 제를 지내다.

1613년 광해군 5년 10월: 가을부터 반진(斑疹: 마진, 성홍열 같은 몸 전체가 붉은 반점이 생기는 병)이 치열하여 여염의 사람을 많이 구하지 못하다.

이는 전에 없던 희한한 증세다.  세속에서 이 병을 일러 당홍역(唐紅疫)이라 칭하다. 동쪽 성밖에 죽은 시체가 서로 베개를 삼을 정도이니, 사람들이 살육하여 생긴 강혼(强魂)의 소치라 하다.

1613년 광해군 5년 12월: 허준이 지은
『벽역신방(辟疫神方: 보물 1086 호(지정일: 1991-09-30)1권을 내의원에서 간행하다.

1614년 광해군 6년 4월: 근자 도성 내외에 살인을 하고 쓸개를 탈취하는 도적이 자행하다.

1615년 광해군 7년 1월:
상기생(桑寄生: 뽕나무겨우살이)은 얻기 어려운 요긴한 약이다. 8도에는 산지가 없고 다만 백령도에 있었는데, 첨사 김기명이 관(棺)의 재목으로 쓰기 위해 벌채하여 멸종되다.

1615년 광해군 7년 12월: 날씨가 극히 차므로 금부와 전옥의 죄인을 각별히 구료케하고, 긴하지 않은 죄수 등은 신속히 판결하여 석방케 하다.

1617년 광해군 9년 2월: 질병이 있는 죄인은 일일이 심찰케 하다.

1620년 광해군 12년 3월: 만포 등지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병(士兵)의 사망자가 10여 명에 이르다.

1620년 광해군 12년 12월: 일기가 순조롭지 않고 성안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여제사를 다시 설치케 하다.

1621년 광해군 13년 1월: 성안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중신을 보내 종묘사직과 명산대천에 경건하게 기도케 하다.
죄인들의 구료 일을 착실하게 이행토록 지시하다. 전염성 열병이 여전히 치열하므로 다시 중신을 보내 종묘사직과 산천에 기도케 하다.

1621년 광해군 13년 3월: 근래에 돌림병이 다시 치열하여 급히 기도케 하고, 성안과 궐내의 돌림병자들을 일일이 동서활인서로 이송케하다. 경덕궁(경복궁과 덕수궁) 근처의 병자(病者) 역시 이송시키다.

1624년 인조 2년 11월: 가도의 사상(私商)을 금하다. 이때 모문룡이 오래 가도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 상인들과 몰래 서로 판매하여, 인삼 가격이 날로 뛰기 때문이다. 진상(進上) 인삼 600g의 값이 매우 많은데, 강원도에선 여러 날 양식을 가지고 입산하면 가히 600g을 채취하기도 한다. 자고로 임토작공(任土作貢)의 법이 있으니 이 법을 준수하여 행하면 폐될 것이 없을 것이라 하다.

1625년 인조 3년 1월: 전라도 장수현에서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한 읍에 사망자가 200여 명이나 되다.
변방에 주둔하는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죽은 자가 줄을 잇다.

1625년 인조 3년 3월: 평안도 창성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병졸들이 맣이 죽다.
충청도 충주, 홍주, 보령, 황간 등지에도 전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70여 명이 되다.

1626년 인조 4년 6월: 내의원 관원의 요청으로 당재(唐材)인 감초를 배양하여 키워 심기를 각 도 감사에게 시행케 하다.

1626년 인조 4년 7월: 채삼(採蔘)하는 당인(唐人: 중국인)을 엄하게 금지 단속할 것을 개진하다.

1627년 인조 5년 3월: 각 진의 군중(軍中)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627년 인조 5년 5월: 각 도에 염병이 크게 돌아 열 명에 한 명도 일어나지 못하다.

1627년 인조 5년 11월: 안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628년 인조 6년 12월: 장단과 개성부에 두창(痘瘡: 손님마마,
두창은 두창바이러스 (smallpox virus or variola virus)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흔히 “천연두”, “마마” 로도 불리는 병이다. 두창바이러스 (variola virus)는 Poxviridae과의 Orthopoxvirus속에 속하는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double-stranded DNA virus)이며 백시니아바이러스 (vaccinia virus) 등으로 생물학적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병원체이다.)이 유행하다.

1638년 인조 16년 6월: 함경도 경성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900여명에 이르다.

※ 1638년 인조 16년 8월:
우리 나라 사람이 몰래 남운초(南雲草: 담배)를 심양으로부터 들여왔는데, 청나라 장수가 알고 힐책하다. 남운초는 일본국 소산이다. 광해군 8, 9년간에 들여와 광해군 13, 14년 이래로 크게 유행되어 사람이 흡용하지 않는 자가 없다. 손님을 맞으면 곧 차(茶)를 마시는 것처럼 연차(煙茶), 연주(煙酒)라 칭하다. 종자를 채종하여 서로 교역하기에 이르다. 그 잎사귀가 큰 것은 7, 8촌쯤 되는데, 가늘게 썰어 죽통(竹筒: 대나무통)이나 혹은 은(銀), 주석으로 통(筒)을 만들어 피웠다. 맛은 시고 매우며, 담을 삭히고 음식을 소화시키나 오래 피우면 왕왕 간의 기운을 상하고, 사람의 눈을 침침하게 한다. 해로운 것은 있어도 이로운 것은 없으므로 타파하고자 하나 여의치 못하다.

1638년 인조 16년 9월: 함경도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4,300여 명이나 되다.

1639년 인조 17년 1월: 공주에 전염성 열병을 사망한 자가 108명이나 되다.

1639년 인조 17년 2월: 함경도민이 국경을 넘어 채삼하다 발각되었으므로, 곤장을 치고 먼 도(道)에 유배 보내다.

1640년 인조 18년 12월: 경상도 울산, 봉화 등지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다. 향과 축문을 보내 제단을 설치하고 기도하다.

1641년 인조 19년 11월: 청(靑)의 범문정 등이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한 자 60여 명을 나포하여 심양의 소현세자 관소에 데려와서, 이는 남조(明)와 몰래 통하지 않고서는 사용처가 없을 것이라고 항의하매, 세자는 왜관(倭館)에 전매하면 이익이 많으므로 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익을 탐해 금기사항을 어긴 것이라 답하다. 이들 월경 채삼인들을 국경에서 효시(梟示: 베어 높은 매달뭇사람에게 보임)하다.

1642년 인조 20년 12월: 서울 내외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다.

1643년 인조 21년 4월: 이때 동활인서에 병자 483명, 서활인서에 환자 569명, 합계 1,052명이다. 그리고 여염의 환자가 날로 늘다.

1643년 인조 21년 10월: 금주(錦州) 변방의 병졸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자가 서로 잇다.

1643년 인조 21년 11월: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고, 큰 질병으로 죽은 자가 많다.

1643년 인조 21년 12월: 전라도에 전염성 열병이 매우 치열하여 사망자가 만여명에 달하다.

1644년 인조 22년 1월: 강원도내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10집에 9명은 아프고, 죽은 자를 미처 매장하지 못할 정도이다.

1644년 인조 22년 2월: 8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함경도 자성에 특히 치열하여 사람이 많이 죽은지라 문묘(文廟)에 친히 제사를 지내다. 제사를 마치다 전염병도 잠잠해지다.

또한 대황(大黃)은 전염병 열병에 있어 참으로 좋은 대중 양약(良藥)이다.

1644년 인조 22년 11월: 경상도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645년 인조 23년 2월: 향과 축문을 지리산의 금성산 남해당에 보내 돌림병 제사를 지내다.

전라도에 지난 겨울부터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이 잇달아서 도내에 병에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향과 축문을 강원도에 보내 제단을 설치하고, 어곽(
魚藿: 해산물)의 세금을 감면하다.

1645년 인조 23년 3월: 경성에 돌림병이 계속 번져 동서활인서의 출막(出幕: 집안 사람들에게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움막을 지어 집밖에서 치료함) 전염병자 696명 중에 사망자가 8명, 영차자(永差者) 271명, 현재 입원중인 자는 413명인데 이들 중 대부분은 사대부집의 종들이다.

1645년 인조 23년 4월: 황해도에 올 봄이래 각 읍의 병사자(病死者)가 큰 읍은 100여명, 작은 읍은 6, 70명에 이르고, 굶주리고 병든 자는 헤아힐 수 없을 정도다.

평안도의 전염병 사망자는 1,400여 명에 이르다.

1645년 인조 23년 7월: 황해도에 전염병 사망자가 10명에 이르다.

1645년 인조 23년 11월: 이때 전염성 열병이 크게 치열하다.

1647년 인조 25년 1월: 동서활인서의 입원 환자 92명, 사망자 3명, 임시 입원 환자 65명이다.

1647년 인조 25년 3월: 동서활인서의 병자 수가 늘 수백 명에 이르다.

1648년 인조 26년 1월: 함경도에 큰 질병이 돌다.

1648년 인조 26년 3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다.

1650년 효종 1년 1월: 황해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650년 효종 1년 2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51년 효종 2년 4월: 전옥(典獄)에 전염병이 크게 돌다. 죄수를 검열하여 그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다.

1653년 효종 4년 2월: 개성부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람이 많이 죽다.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므로 제사를 지내다. 경기, 장단, 파주, 풍덕 등 읍에서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제단을 설치하고 기도하다. 강원도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654년 효종 5년 3월: 전라도 순천, 광양 등 읍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654년 효종 5년 5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고, 제주도에는 기근이 들다. 황해도에도 질병이 크게 번지고, 호남의 해안 지방에도 크게 번지다. 근래 전옥에서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죄수가 서로 이어 병들다. 경범죄인은 석방하다.

호남 지방에 기근과 질병이 심한 중에도 강진, 해남이 더욱 치열하다.

1655년 효종 6년 3월: 전라, 경상도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자가 심히 많다. 제단을 양도의 중앙에 각각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다.

함경도 북청 등지에서 급성 지령으로 백성이 많이 사망하다. 돌림병 제사를 지내다.

1655년 효종 6년 4월: 함경도, 황해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55년 효종 6년 5월: 함경도에 큰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나릴고 돌이 구르다.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200여 명이다. 경기도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황해도 및 함경도에 우박이 쏟아지다.

1655년 효종 6년 6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55년 효종 6년 10월: 함경도 북청에 이질 사망자가 150여 명에 이르다.

1656년 효종 7년 1월: 서울에 큰 질병이 돌다.

1656년 효종 7년 4월: 충청도, 경상도에 전염병이 돌다.

1659년 효종 10년 3월: 평안도 이산군민 중 배아픈 병(病)으로 죽은 자가 70여 명이다.

1661년 현종 2년 5월: 영남에 굶주린 백성이 17,500여 명이고, 병을 만난 자가 18,090여 명, 사망자가 38명에 이르다.

1661년 현종 2년 8월: 강릉에 독한 안개가 바다로부터 내습하여 병을 얻어 사망한 자가 5명이나 되다.

1661년 현종 2년 9월: 용천군민 3명이 몰래 강을 건너 인삼(人蔘)을 캐다가 청국인에게 잡힌 바 되어 의주로 압송되다.

1662년 현종 3년 1월: 각 지방에 전염성 열병이 점차 치열하다.

1662년 현종 3년 2월: 경상도에 기근과 전염병이 치열하여 기근자 22,629명, 환자 3,642명에 사망자가 53명이다.  호남, 영남 양남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62년 현종 3년 3월: 모든 도에 질병이 치열하다.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호남 지방에 전염병이 가장 치열하여 사망자가 1,400여명에 이르다.

1662년 현종 3년 4월: 전라도 각 읍의 전염병자가 16,500여 명, 사망자 467명, 길에 버려진 자 45명에 이르다.
서울 내외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서울 북부에서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1662년 현종 3년 5월: 동서활인서 환자 수가 1,900여 명에 이르다.
전염병이 8도에 치열하여 금년 농사가 모두 피폐하다. 각도의 전염 병자(病者)와 군병(軍兵)의 종류를 가려 당번과 가포(價布)를 형편에 따라 감면하다.

1662년 현종 3년 6월: 함경도 안변 등 9읍에 황충(
蝗蟲: 누리, 메뚜기 종류)이 크게 발생하고, 전염병이 오래도록 치열하여 환자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근해 전염병이 치열하게 돌고 장마비가 또한 이같으며, 동서활인서에 전염병자가 2,000여 명에 이르다.

1663년 현종 4년 2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심히 많다.

1663년 현종 4년 3월: 서울 외곽에서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663년 현종 4년 6월: 강원도 영서 지방에는 홍수가, 전라도에는 전염병이 치열하다.

1663년 현종 4년 7월: 동서활인서의 염병 환자에게 양식을 지급하다.

1663년 현종 4년 10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270여 명에 이르다. 성안의 노약자 중에 질병 사망자가 많다. 혹 동서의 길가에 버리거나 솔잎으로 덮어놓고 묻지 않는 사례가 많아 4부(部)에서 나누어 이를 묻어 주다.

1664년 현종 5년 2월: 경상도와 강원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환자가 각각 871명, 883명이나 되다.

이즈음 전염병이 또한 치열하고, 동서활인서의 병자가 심히 많아, 개인적으로 출막(出幕: 집안 사람들에게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움막을 지어 집밖에서 치료함)을 치고 앓는 자가 많다. 두창과 전염병이 사방에 치열하다.
함경도 단천에 전염병 사망자 38명, 환자가 14명에 이르다.

1664년 현종 5년 3월: 황해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심히 많다.
경상도 각 읍의 기근든 백성의 통계가 113,428명에 이르다. 전염병 환자 4,284명은 별도로 마른 양식을 지급하고 이웃과 친족에게 각별히 구활케 하다.  
평안도에 장티푸스가 치열하게 발생하여 병자가 350명에 사망이 23명에 이르다.

1664년 현종 5년 4월: 충청도에 장티푸스 환자가 586명이 발생하여 사망이 78명에 이르다.
근래에 염병(장티푸스)질환이 극심하다. 경기도에 1,043명이 발생하여 그중 52명이 죽다. 강원도에는 1,548명이 발생하여 87명이 사망하다. 경상도에는 5,207명이 발생, 평안도에는 636명이 발생하여 32명이 죽다. 황해도에도 염병이 날로 치열하여 1,629명이 앓다가 177명이 죽다.

1664년 현종 5년 5월: 강원도에 염병 사망자가 65명에 이르다.
강화도에도 염병 사망자가 많아 미쳐 매장하지 못할 정도다. 전라도 염병 사망자가 75명에 이르다. 경상도에는 기근자 170,064명에 염병 걸린 자가 1,617명에 이르다.
개성부에 염병환자가 많아 625명 중에 사망이 40여 명이다.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경원, 안변, 정평, 단천 등 읍에서 사망이 37명이나 되다.

1664년 현종 5년 6월: 경성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강원도 강릉 등 읍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평안도, 충청도에 돌림병이 치발하다.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망이 174명에 이르고, 송도에도 돌림병이 치열하다.

거제현(巨濟縣)을 읍의 서쪽 20리에 위치한 명진촌으로 이주케하다. 수토(水土)가 매우 험악하여 관리들 중에 병사자가 많기 때문이다.  

1664년 현종 5년 9월: 평안도 중화, 평양 등 11읍에 염병이 치열히 발생하고 우역(牛疫) 또한 심하다.

1664년 현종 5년 11월: 개성부에 장티푸스가 치열하고, 우역(牛疫)역시 심하다.

1665년 현종 6년 2월: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65년 현종 6년 3월: 전라도, 충청도에 전염병이 번성하다.

1665년 현종 6년 6월: 충청도에 장티푸스가 치열하다.

1665년 현종 6년 7월: 강화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40여 명이 되다.

1665년 현종 6년 8월: 평안도에 장티푸스가 치열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다.

1665년 현종 6년 9월: 평안도 가산군, 귀성부, 태천, 박천, 안주, 의주 등 각 읍에서 장티푸스가 크게 치열하여 사망이 서로 잇다.

1666년 현종 7년 1월: 전라도 돌림병이 사방에 치열하다.

1666년 현종 7년 3월: 충청도내에 전염병이 치열히 발생하여 사망자가 50여명이다.

1666년 현종 7년 12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열하고, 소의 질병이 또한 심해 사람과 소의 사망이 많다.

1667년 현종 8년 4월: 질병이 크게 유행하여 도하 백성이 성밖에 출막(出幕)을 하고, 동서활인서 부근에 피막(避幕)을 설치한 자가 거의 수천에 이르다. 양식을 지급하여 구료케 하다.

1668년 현종 9년 2월: 경기, 해동, 호서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다.

1668년 현종 9년 3월: 산천과 성황에서 제사를 지내고, 북쪽 근교에서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또한 쌍령, 금화, 토산, 강화의 전몰장병에게 제사를 지내다.  이때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기 때문이다.  

경사도에 장티푸스가 치열하여 사망자가 230명이다.

1668년 현종 9년 4월: 8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서로 이어지는데 마마(두창, 천연두)와 홍역으로 사망한 자가 많다.

1668년 현종 9년 6월: 평안도 철산에서 해일이 크게 일고,
전국 곳곳에 지진이 발생하다.
해괴제(解怪祭)를 행하다.

1669년 현종 10년 3월: 황해도에 두창(痘瘡: 마마, 천연두) 사망자가 900여 명이다.

1669년 현종 10년 7월: 호서, 황해도에 전염병이 심히 일다.

1669년 현종 10년 9월: 평안도에 장티푸스 사망이 47명이 되다.

1670년 현종 11년 2월: 충청도에 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80여 명이 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전염된 자가 1,300여 명에 이르다.

1670년 현종 11년 3월: 경상도에 전염병이 걸린 자가 1,000여 명이나 되다.

1670년 현종 11년 4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서로 잇다.
제주에서 전염병이 크게 일다.

1670년 현종 11년 12월: 충청도 홍산 등 읍에서 전염병이 크게 일다. 경기도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20여 명, 충청도에는 220여 명이나 되다.

1671년 현종 12년 1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모두 554명이다.
황해도에는 전염병과 우역(牛疫, 소전염병, 구제역)이 병행해 발생하다.
경상도에 전염병 사망자가 200여 명이다.
전라도에 동사한 자가 겨울 동안 250여 명, 전염병으로 죽은 자는 이비 670여 명에 이르다.
경기도에는 전염병 사망자가 170여 명, 강원도에는 67명, 충청도 정산 등지에는 굶주림과 얼어 죽은 자가 43명이나 되다.
함경도에 전염병으로 죽는 경우가 빈번하다.

1671년 현종 12년 2월: 전라도에 기근과 동사로 죽은 자가 239명,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753명이나 되다.
경기도에 전염병 사망이 147명에 이르다.
제주도에 동사, 아사, 질벼 사망자가 437명이나 되다.
강원도 전염병 사망자 116명, 강화부 50여 명, 경상도 200여 명, 황해도 5,000여 명이나 되다.
8도의 백성들이 기근, 두창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가운데 특히 삼남(三南) 지방이 심하다.

1671년 현종 12년 3월: 전라도에 전염병 사망자가 1,730명에 이르고, 굶주린 백성이 133,590여 명, 길에서 사망한 자가 140여 명이다.
겨울 동안 죄수들의 동사, 아사자만도 130여 명이나 되다.
경기도는 겨울 이후 질병 사망자가 80여 명, 강원도 70여 명에 이르다.

1671년 현종 12년 5월: 경상도에 병사자 590여 명, 전라도 2,080여 병에 이르다.

1671년 현종 12년 6월: 경기도에 이질이 갑자기 발생하여 사망자가 많다.
서울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550여 명, 각 도를 합하여 6,400여 명에 이르다.

1671년 현종 12년 7월: 경상도에 이질이 갑자기 발생하여 사망자가 많다.
서울에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550여 명, 각 도를 합하여 6,400여 명에 이르다.

1671년 현종 12년 8월: 강원도에 기근 병사자가 137명, 함경도 염병 사망자는 94명에 이르다.
강원도에 장티푸스 사망자가 336명, 황해도에 환자 1,609명, 전라도 환자 11,281명에 이르다.

1671년 현종 12년 9월: 서울에 병사자가 40여 명에 이르다.
삼남, 경기, 강원, 황해도에 우역(牛疫: 소병, 구제역)이 극심하다.

1671년 현종 12년 10월: 서울에 전염병이 그치지 않아 사망 10여 명이고, 각도의 사망 보고가 540여 명에 이르다.

1671년 현종 12년 11월: 전국의 염병 사망자가 모두 1,470여 명이다.

1672년 현종 13년 1월: 각 도의 전염병 사망자가 2,090여 명에 이르다.

1672년 현종 13년 2월: 함경도에 전염병 사망자 690여 명에 이르다.

1672년 현종 13년 3월: 지난해부터 금년 봄까지 전국에 전염병 사망이 많다.
함경도 700여 명, 황해도 470여 명, 평안도 400여 명, 전라도 430여 명, 경기 300여 명, 충청 260여 명, 경상도 500여 명, 강원도 100여 명이다.

1672년 현종 13년 6월: 전국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다.  서울 12명, 관북 1,260명, 영남 220명, 호남 270명, 관서 480여 명이다.

1672년 현종 13년 12월: 질병 사망자가 2,000여 명에 이르다.

1673년 현종 14년 4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200여 명이 사망하다.

1677년 숙종 3년 2월: 경사도 울산에서 졸지에 심하게 아프지도 않고 취한 듯한 괴질이 돌아 3, 4일이 못되어 죽다.  일순간에 죽은자 34명이나 되다.

1680년 숙종 6년 2월: 강원도 울진에 괴질이 돌아 연말부터 사망이 77명에 이르다.

1680년 숙종 6년 9월: 도하에 두진(마마)이 크게 치열하다.

1683년 숙종 9년 1월: 함경도에 전염병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죽은 자가 300여명에 이르고, 우마 또한 100여 마리가 병들어 죽다.

1683년 숙종 9년 6월: 함경북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평안도 순안 등지에 전염병이 돌아 백성이 많이 죽다.

1684년 숙종 10년 2월: 함경도 안변 등 5읍에서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전염병에 걸려 않는 자가 160여 명에 이르다.
양남(호남, 영남)에 질병이 치열하다. 경상도 영천 등 5읍에 전염된 자 100여 명에 가깝고, 전라도 각 읍에는 앓는 자가 500여 명에 이르다.

1684년 숙종 10년 3월: 공홍도(충남) 홍산 등 14읍에서 전염병이 점점 치열하다.

1684년 숙종 10년 4월: 평안도 강서 등 8읍에 전염병에 걸린 자가 169명이다.
전라도에 충재(蟲災)가 심하고, 질병에 전염된 자 600여 명에 이르다.

1684년 숙종 10년 7월: 함경도에 전염병으로 앓고 있는 자가 147명이다.

1685년 숙종 11년 1월: 황해도 문화, 악악 등 읍에 전염병이 돌다.

1686년 숙종 12년 1월: 함경도에 전염병으로 앓는 자 80명에 이르다.

1686년 숙종 12년 3월: 공홍도(충남)에서 전염병으로 앓는 자가 209명, 전라도 319명이나 되다.

1687년 숙종 13년 1월: 전라도 각 읍에 전염병에 걸린 자 183명 중 죽은 자 52명이다.

1688년 숙종 14년 3월: 변방의 읍에
채삼(採蔘)에 관한 범금(犯禁)의 법(法)을 정하다. 효수 등 극형으로 다스리게 제정하다.
강원도에 괴질이 치열히 발생하여 여러 읍민의 죽은 자가 1,200명에 이르다.

1688년 숙종 14년 4월: 전라도 고부에 괴질이 돌아 사망자 6,000여 명이고, 안변에도 괴질로 죽은 자가 많다.  제사를 지내다.  충남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90여 명이다.

1688년 숙종 14년 5월: 전라도 전염병 사망자가 800여 명이나 되다. 

1689년 숙종 15년 2월: 강화도에 크게 질병이 돌다.

1690년 숙종 16년 3월: 황해도 옹진, 재령, 봉산 등 3읍에서 독한 질병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사망이 서로 이어져 여러 달 동안 그치지 않다.

1690년 숙종 16년 11월: 강원, 전라 양도에서 질병 사망자가 많다.

1690년 숙종 16년 12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등에서 전염병이 치열하다.

1693년 숙종 19년 2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693년 숙종 19년 3월: 관북 지방에 전염병 사망자가 30여 명이다.

1693년 숙종 19년 4월: 관북, 호서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693년 숙종 19년 5월: 호남에 전염병이 돌다.

1693년 숙종 19년 8월: 제주도에 대소두(대소두) 괴질 환자가 1,950명이나 되어 기도를 행하게 하다.

1693년 숙종 19년 12월:
함경북도에서 채삼(採蔘)하다 30여 명이 붙잡혔으나, 이 지역 백성들의 명맥이 오로지 채삼에 의존하고 있어 인삼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는 것과 같은 지라 다시 상의하여 선처하다.

1695년 숙종 21년 12월: 유기한 어린아이를 거둬 기르는 법을 8도에 반포하다.

1696년 숙종 22년 1월: 활인서에 돌림병 기운이 만연하다. 진국소를 홍제원에 이설하다.

1696년 숙종 22년 2월: 설국소를 동대문에도 가설하다.

1696년 숙종 22년 10월: 이때 굶주린 자, 질병에 걸려 죽는 자가 심히 많다.
평안 도민 중에 전염병을 만나 죽은 자가 605명이나 되다.

1697년 숙종 23년 2월: 평안도 성천 등 16읍에서 전염병 사망자가 4천여 명이나 되다.

1697년 숙종 23년 5월: 덕원 등 7읍민이 급병으로 급사한 자가 160여 명에 이르다.
율도의 굶주린 자를 방면하다. 국을 얻어 먹는 자가 남녀 875명인데 그 중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가 700여 명에 달하다.

1697년 숙종 23년 7월: 함경도, 평안도 등지의 전염병 사망자 수가 5월 이후 거의 1천여 명에 이르다.

1698년 숙종 24년 4월: 도하 전염병이 점점 치열하여 사망자가 심히 많다.

1698년 숙종 24년 10월: 왕이 친히 제문을 짓고, 전염병 제사를 남쪽 근교에서 행하다.

1698년 숙종 24년 12월: 혜민서(惠民署)의 본디 설치 목적은 서민의 구활(救活)을 위한 것이나 작금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으므로 약을 가지고 구료할 것을 명하였으나 거행하지 않은 지라 해당 의관(醫官)을 벌하다.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의 설치 목적은 병자(病者)를 구하는데 있다. 근래 전염병에 걸려 출막(出幕: 집안 사람들에게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움막을 지어 집밖에서 치료함)의 예를 해당 관서의 관원이 이를 방치, 도외시하고 돌보지 않는지라 해당 관원을 구금하고 죄를 묻다.

이때 도성의 시체가 1,587명, 지방은 21,546명인데 보고(報告)는 10중 2, 3명에 지나지 않으니 실제로는 이보다 많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이같은 참상은 일찍이 없는 바이다.

1699년 숙종 25년 11월: 병자년(1636년) 장적(帳籍)을 흉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가 다시 시작하다.

경외(京外)의 호수가 1,293,083호(戶), 인구는 5,772,300명인데, 계유년(1693년)에 비하여 줄어든 집이 253,391호(戶)이고, 사람은 1,416,274명이 줄다.

1699년 숙종 25년 12월: 이때 전염병이 오히려 더욱 치열하다. 서울에 죽은 자 3,900명, 각 도에는 250,700여 명이나 되다.

1701년 숙종 27년 11월: 평안도에 장티푸스와 소의 질병이 매우 치열하여 죽는자가 줄을 잇다.

1703년 숙종 29년 7월: 함경도 안변 등 9읍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704년 숙종 30년 3월: 경기도내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자가 수백 명에 이르다.

1705년 숙종 31년 2월: 경상도내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28명이다.

1705년 숙종 31년 3월: 함경도내에 전염병에 걸린 자 1,391명, 죽은 자 73명에 이르다.

1706년 숙종 32년 11월: 황해도내에 장티푸스가 크게 만연하다.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한 자가 심히 많다.

1707년 숙종 33년 4월: 평안도에 홍역(紅疫)으로 사망한 자의 총수가 1만 수천명에 이르다. 서울 안팎도 대략 이와 같으니 가히 전에 없던 해로운 재앙이다.

1707년 숙종 33년 11월: 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홍역이 치열하여 추수철을 잊을 정도다.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퍼졌는데 특히, 유아 사망이 높아 어린이가 희소할 지경에 이르다.
북쪽 근교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행하다.

1708년 숙종 34년 2월: 3남에 전염성 홍역이 치열하게 번지는 데 특히 호남이 더 심하다.

1708년 숙종 34년 3월: 전국에 홍역 사망자가 거의 수만 명에 이르다.

1708년 숙종 34년 4월: 전염병이 점점 치열한 가운데 호남이 그 중 사망자가 제일 많다.

1711년 숙종 37년 3월: 함경, 평안, 황해, 경상 등지에서 이달부터 6, 7월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이 치열하다.

1714년 숙종 40년 3월: 제주도에서 큰 질병이 돌아 사망자가 1천여 명에 이르다.

1714년 숙종 40년 7월: 충청도 공주 등 9읍이 3월에 지진이 일고, 홍산 등 7읍 및 전라도 전주 등 13읍, 평안도 정주 등 12읍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다.

1714년 숙종 40년 8월: 제주도에 전염병이 돌아 5천여 명이 사망하다.

1717년 숙종 43년 2월: 평안도 전염병자 313명, 사망이 10명, 전라도는 920명중 110명 사망, 충청도는 360명 중 100여 명 사망, 경상도는 150여 명이 사망하다.

1717년 숙종 43년 3월: 경상도 각 읍의 전염병에 걸린 자 2,279명 중 240명 사망하다.
전라도 500명 중 130명 사망하다.

1717년 숙종 43년 4월: 충청도 홍산 등 26읍에 전염병자 3,400명 중 1,422명이 죽다.

1717년 숙종 43년 5월: 도하 전염병이 치열하게 만연하여 4교외 근처의 출막자가 근 천여 명에 이르다. 의원을 선정하여 약을 가지고 각별히 구료케 하고, 많은 환자를 구한 자는 공을 논하게 하다.

충청도 각 읍에 염병으로 앓는 자가 7,234명 중 사망이 1,219명에 이르고, 집안이 몰사한 곳도 9집이나 되다.

1717년 숙종 43년 6월: 경기도 각 읍에 염병으로 앓는 자 7,234명, 전라도 2,250명 중 사망 652명, 충청도 1,100명 중 230명 사망, 경상도 4,700명 중 사망 675명, 황해도에는 320명이 앓고 있다.

출막(出幕: 집안 사람들에게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움막을 지어 집밖에서 치료함)하여 황해도에는 320명에 이르다.

1717년 숙종 43년 8월: 경상도 각 읍의 염병에 걸린 자 960여 명에 사망이 915명이나 되다.

황해도 각 읍의 염병환자는 220여 명이고 그중 44명이 죽다.

1717년 숙종 43년 12월: 평안도 각 읍의 전염병자는 1,975명이고 사망은 413명이다.

1718년 숙종 44년 1월: 충청도에 염병환자 1,975명 중 413명이 죽다. 황해도 각 읍의 염병환자는 530여 명이나 그 중 17명이 죽다.

1718년 숙종 44년 2월: 충청도에 염병환자 1,485명 중 1,454명이 죽다.
경상도는 2,424명 중 297명 사망, 평안도는 환자 25,160명, 황해도 360명, 전라도 650명 중 240명이 사망하다.

1718년 숙종 44년 4월: 충청도에는 전염병에 걸린 자가 3,068명, 경상도 2,387명, 전라도에는 사망자만도 460여 명이나 되다.

1718년 숙종 44년 5월: 훈련도감 소속 군병의 전염병자가 460여 명이나 되다.

1718년 숙종 44년 9월: 함경도의 염병환자 1,478명 중 230명이 사망하다.
경기도는 2,750명 중 1,384명 사망, 평안도는 1,770명 중 400여 명이 죽다.

1718년 숙종 44년 10월: 강원도는 380여 명이 죽고 온 가족이 몰사한 곳도 22집이나 되다.
평한도 2,314명 중 사망 540명, 황해도 1,700명 중 128명 사망하다.

1718년 숙종 44년 11월: 함경도는 염병환자 6,000여 명 중 사망히 1천여 명에 이르다.
강원도엔 염병환자가 1,030여 명이고, 전라도에 염병이 점차 잠들어 가면서도 사망자가 오히려 100여 명이나 되다.

1718년 숙종 44년 12월: 황해도 2,300여 명 중 사망이 300여 명이나 되다.
평안도 염병환자 4,550명 중 사망 83명, 강화도는 561명 중 96명, 개성 445명 중 71명, 충청도 1,480명 중 260명, 경상도 1,301명 중 346명이나 되다.

1719년 숙종 45년 1월: 충청도 염병환자 1,643명 중 24명 사망에 전 가족 몰사도 4가구나 된다.
평안도 8,348명 중 1,380명, 경기도 3,111명 중 370명, 황해도 3,200명 중 370여 명, 경상도 3,173명 중 348명 사망하다.

1719년 숙종 45년 2월: 강화도 1,101명 중 607명, 황해도 1,381명 중 321명, 전라도 3,628명 중 948명, 개성부 147명 중 65명 사망, 함경도 2,661명이 전염병(傳染病) 환자다.

1719년 숙종 45년 3월: 황해도 1,600여 명 중 180여 명, 평안도 4,350여 명 중 928명, 평안도 6,860명 중 770명이 병사(病死)하다.

1719년 숙종 45년 7월: 4월 이후부터 전염병이 점차 수그러들다. 그러나 4월이래 전염병 사망이 합계 7,400여 명에 이르렀다.

1730년 영조 6년 12월: 약료(藥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삼(人蔘)이다.  근래 법령이 해이해진 틈을 타 간교한 자가 다른 물건으로 삼(蔘)을 제조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다.  이는 은전(銀錢)을 주도하는 죄와 같다.  서북 채삼처와 지방 관리에게 엄금케 하다.

1731년 영조 7년 6월: 영남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1,915명 중 325명이 사망하다. 안동 지방에만도 100여 명이 죽다.  호서 지방은 1,050명 중 378명이 사망하다.

1732년 영조 8년 2월: 경상도 각 읍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다.

1732년 영조 8년 4월: 삼남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성하다. 해당 도의 중앙에 단을 설치하고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다.
경상도 각 읍에서 전염병과 마마가 아울러 치열하다. 영덕현에 괴질이 있어 일시에 죽은 자 64명이다.

1732년 영조 8년 5월: 도하 전염병이 날로 치열하여 병자가 1,500명에 이르고 죽는 자가 서로 계속 잇는 고로 환자에게 양식 쌀을 지급하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 백성이 많이 죽다.
제주도에 황충(누리)과 전염병이 치열하다.

1732년 영조 8년 6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백성이 많이 죽다.

1732년 영조 8년 9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733년 영조 9년 3월: 경상도 칠원, 곤양 등 24읍에서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800여 명에 이르다.

1733년 영조 9년 4월: 경기도에 전염병 사망이 300여 명에 이르다.
전라도에서 전염병이 다시 치열하여, 흥양 1읍의 사망자가 147명이고, 경상도 26읍에 사망자가 800여 명이다.
경상도의 전염병 사망자가 모두 3,399명이다.

1733년 영조 9년 5월: 강원도에 우박이 커서 새알 만하고, 전염병 사망이 268명이다.
경상도가 오래 가물고 전염병이 더욱 치열하다.
곤홍도(충남)의 유민(流民) 사망이 7,540여 명이다.
전라도의 전염병 사망이 1,084명이다.

1733년 영조 9년 6월: 경상도의 전염병 사망이 1,711명이다.

1733년 영조 9년 7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2,081명에 이르다.

1735년 영조 11년 5월: 북도의 국경을 넘어 채삼을 범한 자들을 어사를 보내서 등급을 나눠 벌을 주거나 훈방하다.

1740년 영조 16년 2월: 평안도에 전염병 기운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다.

1741년 영조 17년 5월: 관서 지방에서 큰 질병으로 죽은 자 1천여 명으로 집계되다.

1741년 영조 17년 7월: 관서 지방에서 큰 질병으로 사망한 자가 3,700여 명이나 되다.

1742년 영조 18년 1월: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일어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1742년 영조 18년 4월: 서울 안팎의 전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몇 만 명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1742년 영조 18년 6월: 이때 전염병 기운이 크게 치열하여 비록 집문을 닫고 방에 앉아 있을지라도 전염될까 염려하다.

1742년 영조 18년 7월: 이즈음 군인(軍人)과 민간인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고로, 각 도의 수조(水操: 수군:水軍의 훈련)를 정지하다.

1742년 영조 18년 10월: 전염병이 다시 치열하여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경기, 해서, 영남에서 전염병이 9월부터 다시 치열하여 사망자가 서로 이어져 셀 수 없을 정도다.

1742년 영조 18년 11월: 겨울이 따뜻하기가 봄과 같아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사망자가 많아 8도에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1742년 영조 18년 11~12월: 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서, 북도 및 송도(개성)에 전염병이 다시 일어 사망자가 수만 명이다.

1743년 영조 19년 3월: 죄수가 질병에 거릴면 옥관(獄官)을 옥문 밖에서 지키게 하다.

1743년 영조 19년 6월: 함경도 명천에서 비, 눈, 모진 바람이 연 3일 동안 크게 불고 전염병이 하루가 다르게 치열하다.

1743년 영조 19년 12월: 각 도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이 6, 7만 명을 넘다.

1746년 영조 22년 4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크게 일어 금산 등 21읍의 죽은 자가 949명이나 되다. 경상도에선 687명이 죽다.

1746년 영조 22년 5월: 서울 외에 전염병이 점차 치열하여 8도에 전염병 제사를 설치하다.

1746년 영조 22년 6월: 전염병이 심히 치열하여 충청도에 사망, 1,657명, 경상도 1,614명이 되다.

1746년 영조 22년 7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1,385명이다.

1746년 영조 22년 12월: 평안도 성천인이 계집아이 쌍둥이를 낳다. 이마로부터 배꼽에 이르기까지 서로 붙어 한 몸이고 4팔 4다리의 모양이 서로 안고 누운 것과 같다.


1747년 영조 23년 5월: 평안도 내에 전염병과 소의 질병이 함께 번성하여 사망이 심히 많다.

1750년 영조 26년 1월: 전라도에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8도에 전염병이 크게 일다.

1750년 영조 26년 2월: 이 달에 전염병 사망이 경기 3,487명, 강화도 347명, 영남 1,933명, 해서 지방이 464명이다.

1750년 영조 26년 3월: 전염병이 크게 일어 전염병 제사를 8도에 설치하다. 각도 전염병 사망이 37,581명이나 되다.

1750년 영조 26년 5월: 전염병 사망이 124,000여 명인데, 호적 외의 유리민까지 합하면 30여만 명에 이를 것이다.

1750년 영조 26년 6월: 이 달의 전국의 전염병 사망은 무려 30,300여 명이다.

1750년 영조 26년 7월: 이 달의 전염병 사망은 22,361명이다.

1750년 영조 26년 8월: 이 달의 각 도 전염병 사망은 2,246명이다.

1750년 영조 26년 9월: 이 달의 각 도의 전염병 사망은 경기 3,382명, 관동 572명, 호서 6,266명, 호남 16,752명, 영남 10,739명, 해서 11,371명, 관서 1,853명, 관북 12,141명, 강화도 2,391명, 개성 1,520명, 제주도가 882명에 이르다. 사망자의 총계는 67,869명이다.

1756년 영조 32년 5월: 서울과 지방에서 전염병이 치열하다. 서울은 복일(卜日)을 가리지 말고 전염병 제사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과 축문을 보내 청결하게 거행케 하다.

1756년 영조 32년 6월: 경기 등 5도의 전염병 사망이 18,000여 명이다.

1757년 영조 33년 8월: 제주 3읍에 큰 질병이 돌아 사망자가 500여 명이며 경기, 함경 양도가 더욱 치열하여 죽은 자를 셀 수 없을 정도다.

1763년 영조 39년 12월: 호남에 소의 질병으로 만여 마리가 앓다. 각 도에 명하여 도살을 금하다.

1764년 영조 40년 4월: 왕이 가래가 뭉치는 증상이 있자 의사(醫師)가 고양이 가죽이 양약(良藥)이라 하다.  왕이 만일 이를 따르면 온 나라에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어 민폐를 끼칠 것이므로 따르지 않다.

1765년 영조 41년 12월: 왕이 여염집의 병자(病者)가 의약(醫藥)을 사용하지 않고 걸핏하면 무당을 이용하는 폐단을 논하다.

1770년 영조 46년 1월: 탐라의 백성에게 질병의 고초를 물은 즉, 전염병의 극성으로 사망자가 많아 농사 거둘 일을 잊을 정도라 답하다.  

1770년 영조 46년 2월: 전염병이 점차 치열하여 진주 등 31읍에서 사망이 2,290명, 흥양 등 13읍에서 430명, 수원, 남양 등의 읍에서 올 겨울에만도 580여 명이나 죽다. 안변 등 27읍의 전염병 사망이 816명이다.

1770년 영조 46년 3월:
거제도 고현면의 여인 37명이 독있는 해물(海物)을 먹고 죽다. 이즈음 바다 고기, 게, 전복, 조개를 먹고 죽는 자가 간간이 발생하다.

1771년 영조 47년 6월: 수의(首醫) 허추
(許礈)의 아들 허관(許寬)을 경상우도 병사가 효시케 하다. 일이 발각되자 처음에는 남해현(南海縣)에다 충군(充軍)하도록 명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이런 명령이 있었다.
허관의 집에서 주린강감(朱璘綱鑑:
주린이 지은 강감회찬(綱鑑會纂)의 책속에, 조선조 태조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명(明)나라 태조실록과 《명조회전(明朝會典)》에 잘못 기재되어 그 정정을 요구한 일로 종계 변무(宗系辨誣)라고 일컬어짐, 이책을 소유한자는 왕명으로 극형에 다스림)을 둔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1777년 정조 1년 7월: 강릉 부사가 민박 4조(條)를 논하다.
1, 인삼 산지를 화삼전(火蔘田)으로 하는 것.
2, 인삼 값을 보충하는 전결(田結)의 수가 많은 것.
3, 강릉 공삼(貢蔘)이 지나치게 많아 타도(他道)에서 오히려 널리 교역하는 것.
4, 이 때문에 인삼 값이 오르는 것.

1777년 정조 1년 9월: 성안의 무격(巫覡)을 축출케 하다.

1785년 정조 9년 7월: 진휼청에서 병든 백성 256명에게 쌀을 지급하다.

1786년 정조 10년 4월: 근래에 반진(
斑疹: 마진:痲疹: 온몸에 좁쌀 모양의 붉은 점이 돋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서울 안팎으로 두루 치열하다.
상하 귀천 구별없이 가난하여 약을 구하기 어려운 자에게 질병의 증상을 진찰하여 약을 지급하다.

1788년 정조 12년 6월: 의탁할 곳이 없는 백성에게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양식을 지급하다.
현재 5부의 병자(病者)가 1,800여 명, 출막(出幕)이 700여 곳에 이르다.

1788년 정조 12년 9월: 호서 지방에서 돌림병이 돌다.  영남 지방도 그러하다.
탐라에 전염병으로 백성이 많이 죽다.  질병으로 인해 농사와 어업을 못하는 자는 세금을 감해 주다.

1789년 정조 13년 5월: 해서, 영남 지방에 유행병이 많다.

1790년 정조 14년 3월: 평안도 삼등 등 읍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790년 정조 14년 4월: 북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환자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라, 향과 축문을 보내 제를 지내다.

1790년 정조 14년 6월: 북도에 두창이 돌다.

1791년 정조 15년 3월:
『무원록언해(無寃錄諺解)』를 간행하다.

1791년 정조 15년 5월: 해서 지방에 큰 질병이 돌다.  금위신번 해서군(海西軍)은 귀향시켜 농사일을 돌보게 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유배(流配) 죄인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다.

1792년 정조 16년 2월: 재령인 김경화가 가난한 자와 전염병에 걸린 자를 거의 천여 명이나 구한 공이 있어 상(賞)을 내리다.

1793년 정조 17년 4월: 호서, 영남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1793년 정조 17년 5월: 죄수 중 질병에 걸린 자에게 약을 나눠주고 구료하다.

1793년 정조 17년 6월: 호서, 호남, 영남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한 자가 많다.

1794년 정조 18년 1월: 삼수, 갑산 양읍의 녹용, 사향 공물을 심약(審藥)이 그 값을 임의 조종하다.  녹용과 사향의 값을 북청의 부상(富商)에게 내주면, 이 부자 상인은 헐값으로 사향과 녹용을 삼수 갑산으로 취하여 그 폐해가 아주 심하므로 거주민 태반이 다른 곳으로 유망하다.

매년 10월에 함흥 부상(富商)이 삼수 갑산 백성에게 물자를 나눠주고, 대신 바다표범 등을 수취하여 그 이익을 도모하다. 

1799년 정조 23년 1월: 이때 돌림병이 돌아 서울과 지방에 사망자가 무릇 128,000여 명이다.
전염병이 아닌 평범한 이름없는 질병이라 할지라도 모두 별도로 성황과 산천에 전염병 제사를 설치케 하여 사상자를 위무하다.

서울은 북쪽 교외에서 별려제(別勵祭)을 행하고, 동, 서, 남, 3교외에선 위제(慰祭)을 지내며, 양서(兩西)는 여제, 위제(慰祭)을 병행 설치하고, 기타 각 도에서도 제(祭)를 시행하다.

1799년 정조 23년 12월:
『제중신편(濟衆新編)』이 이루어지다.

1808년 순조 8년 2월: 강원도 삼호권채(蔘戶勸採)의 폐해가 심하므로, 아무나 마음대로 삼(蔘)을 캐기 위해 입산(入山)함을 금하다.

1808년 순조 8년 7월: 호서에 전염병이 더욱 심하므로 19읍에 비변랑을 보내 각 읍민들을 위무하다.

1809년 순조 9년 1월: 100살 노인 43명에게 응자노인(應資老人)을 임명하다.

1810년 순조 10년 1월: 100살 노인 51명에게 응자노인(應資老人)을 임명하다.

1812년 순조 12년 4월: 해서 지방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별여제를 도내 중앙읍에 설치하고 행하다.
도하 돌림병이 점점 만연하다.

1812년 순조 12년 9월: 관서 병란(兵亂)에 기근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사망이 많은지라 신구환곡(新舊還穀)을 탕감하다.

1816년 순조 16년 1월: 100세 응자노인 11명을 임명하다.

1821년 순조 21년 1월: 100세 응자노인 42명을 임명하다.

1821년 순조 21년 8월: 평양성 내외에 지난달 그믐께 홀연히 괴질 돌림병이 돌아 토사 관격하여 경각에 죽다.  10일 동안 천(千)여 가구지의 약이 효과가 없고, 구제하는 기술이 없다. 기도를 행하여도 잠드는 기미가 없고, 점점 각 읍과 동리로 퍼지다.

이 질병(疾病)을 만난 자는 먼저 반드시 통주(洞注)하며 이어 궐역(厥逆: 찬 기운이 머릿골을 범하여 머리와 이가 아픈 증세)의 기운이 다리로부터 배 안으로 침입하여 경각의 사이에 살아남는 자 10명 중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서쪽 변방에서 시작하여 도하 각 도의 집집에 전염하는 것이 불이 번지는 것과 같고 치료의 방법이 없다. 재상 이상 사망이 10여 명, 일반 서민은 십만여 명에 이르다. 그 중 평안도가 더욱 심하다. 대개 중국(中國) 동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 하다. 

도하, 괴질, 돌림병이 평안, 황해 양도에서 더욱 치열하므로 전염병 제사 및 위안제를 지내다.

평안부에는 전염병 제단을, 모란봉과 대동강(大洞江)에서는 양재제(穰災祭)를 설행하다.

돌림병이 심히 괴이하므로 경범 죄수를 석방하다.
이 돌림병으로 산해관 이남으로 바다를 연한 지역의 수천리 사이의 인민이 손상하였는데, 병(病)의 근원에 대해서는 남만의 백련교를 배운 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물을 긷는 우물과 오이밭에 독약(毒藥)을 살포하므로 생긴 것이라 한다. 이 오이를 먹거나 우물물을 마신 자가 대개 죽게 되었다. 월초에 중국 란주부(府)로부터 여러 명을 나포하여 조사하였다. 이제 나머지 무리를 체포토록 하다.
괴질 돌림병이 잠들지 않고 날로 심하다.  산천 양재제를 별도 날을 잡지 않고 설치 시행하다.

1821년 순조 21년 9월: 영남의 여러 읍에 병여제를 행하다.

1822년 순조 22년 4월: 성내외에 잡병(雜病)에 걸린 유민(流民)이 길에 쓰러져 죽은 시체가 즐비하다.

진휼청(
廳: 조선시대 물가조절과 기민구제를 담당하였던 관청)으로 하여금 병자를 일일이 점검하고, 막사를 설치하여 양식을 급여하다. 사망자는 성밖으로 운반하여 즉시 매장케 하다. 

1822년 순조 22년 7월: 호남에 돌림병이 치열하므로 별여제를 성행하다.

1822년 순조 22년 8월: 함경도에 돌림병 사망자가 이미 10,500여 명에 이르렀다.
관동에 별여제를 설행하다.

1822년 순조 22년 10월: 제주도에 진기(疹氣)가 치열히 성행하여 인명의 손실이 수천에 달하므로 위안제를 지내다.

1825년 순조 25년 1월: 100세 응자노인(應資老人) 46명을 임명하다.

1827년 순조 27년 1월: 100세 응자노인(應資老人) 55명을 임명하다.

1830년 순조 30년 1월: 100세 응자노인(應資老人) 50명을 임명하다.

1832년 순조 31년 8월: 갑오식 의과 초시부터
『의학입문(醫學入門)』『찬도(纂圖)』와 함께 배강(背講)하고, 『동인경()』은 면강(面講)하고, 강론책은 9책(冊)을 정식으로 하다.
의서(醫書) 중에 소위
『의학입문(醫學入門)』은 실로 의가(醫家)의 집성이요.  후학의 지남(指南)이다.

1832년 순조 32년 1월: 100세 응자노인(應資老人) 25명을 임명하다.

1833년 순조 33년 5월: 한성부 내에 돌림병이 성행하므로 각 부의 관리로 하여금 무의탁자 중 병든 자는 성밖으로 내보내 활인서와 혜민서로 하여금 구료케 하다.

1834년 순조 34년 1월: 100세 응자노인(應資老人) 49명을 임명하다.
전염병으로 도로에 쓰러져 죽은 시체 1,005구가 어지럽게 쌓였으므로 수습하여 매장하다.

1834년 순조 34년 5월: 도하 전염병이 아직까지 잠들지 않으므로 별여제를 별도의 날을 잡지 않고 설행케 하다.

1850년 철종 1년 1월: 개성부 주민이 아직 전혀 인삼(人蔘) 농사를 짓지 않다. 근년 이래로 점점 그 이익을 잃어 촌민이 더욱 허로병이 들다. 그래서 근래 몰래 제조한 인삼을 압수한 것이 11,000여 근에 이르다.

1850년 철종 1년 9월: 개성부에 포삼(包蔘)을 몰래 제조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모든 삼포(蔘圃)에 신칙(
申飭: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 신신 당부함)하여 홍삼(紅蔘) 20,000근을 만들고 나머지는 백삼(白蔘)을 만들게 하다. 각 인삼 재배인들이 일치 단결하여 몰래 제조하는 것을 금하는 일에 앞장서 서로 규찰하여 몰래 제조하는 간사한 폐단이 스스로 사라졌으나, 홍삼 값은 앙등이 심하다. 상인배들이 이익을 많이 잃기 때문에 공공연히 이를 저지하므로 결국 개성이 조삼포소로를 서울의 시장으로 이전 설치하자는 의견이 나오다. 그러나 개성유수의 반대와 대황대비의 지시로 개성에 그대로 조삼포소를 두게 되다.  

1858년 철종 9년 6월: 근래에 인삼 생산이 심히 적으므로 값이 뛰고 희귀하다. 포삼(包蔘)은 금년 15,000근으로 감소 생산되다.

1859년 철종 10년 9월: 근래 괴진(乖疹)이 더욱 치열하여 사망이 많으므로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1860년 철종 11년 6월: 근래 도하에 여기(해로운 기운)가 크게 치열하여 사망이 심히 많아 별여제를 행하다.

1861년 철종 11년 7월: 도하 악질이 더욱 성행하여, 금년 가을에 실시하려는 소학 초시(初試)를 명년 봄으로 물리다.
요즘 악질 돌림병이 더욱 치열하므로 별여제를 지내다.

1879년 고종 16년 6월: 앞서 진질(疹疾: 호열자병)이 일본으로부터 부산에 전파되다.

1879년 고종 16년 7월: 진질(疹疾: 호열자병)이 서울 안팎에 유행하여 사망 환자가 많으므로 별도로 점쳐서 날을 잡지 않고 별여제를 설행하다.

1879년 고종 16년 8월: 동래 등 10읍과 호남에 별여제를 성행하다.

1880년 고종 17년: 지석영(池錫永)이 일본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외무 대신의 소개로 우두법(牛痘法)을 일본 우두종계소 의사 국지강암(菊池康庵)에게 학습하다.

1885년 고종 22년 2월: 한성 북구 잿골(재동)에 광혜원(廣惠院)을 설치하고 통리교섭통상시무아문으로 하여금 전담케 하다.

1885년 고종 22년 3월: 광혜원(廣惠院)의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이라 개칭하다.

1885년 고종 22년 4월: 지석영이
『우두신설(牛痘新設)』을 저작하다.

1886년 고종 23년 3월: 제중원에서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실시하다.

1886년 고종 23년 4월: 최초의 선교 여의사 앨리스(Annie J. Ellers)가 내한하여, 제중원엣 부인과를 담당하다.

1886년 고종 23년 8월: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하다.

1887년 고종 24년 3월: 제중원을 구리개(구름개, 현 을지로 입구)의 홍영식의 주택으로 이전하다.

1887년 고종 24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이화여대병원 전신)을 설치하다.

1888년 고종 25년 3월: 제중원에 미국 여의사 홀톤(Lillias S.Horton)이 부임하다.

1890년 고종 27년 10월: 부산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상설 피병사(避病舍)를 설치하다.
인천에도 콜레라가 적게 나마 유행하다.

1893년 고종 30년 봄: 지석영이 교동에 우두(牛痘) 보영당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종두법을 실시하다.

1895년 고종 32년 3월: 청일전쟁 중 만주(滿洲)의 콜레라가 우리 나라에서도 대유행하다.

1895년 고종 32년 6월: 서울과 지방에 질병이 크게 돌다. 호열자병 소독규칙과 소독집행 규칙을 공포하다.
인천에 호열자 사망자가 40명에 이르다.
의주(義州)에 호열자 사망자가 40명에 달하다. 처음부터 누계하면 4,883명이다. 평양에도 환자 1,346명중 501명이 사망하다.
괴질(怪疾)이 치열하게 성행하다.

1895년 고종 32년 7월: 서울에 호열
자(虎列刺: 레라) 환자 234명 중 사망자가 11명이다.

1895년 고종 32년 10월: 함흥부의 안변, 영흥, 함흥 등 8읍에 악질이 돌아 6월 이후부터 사망자가 2,722명에 이르다.

종두규칙(種痘規則)을 반포하다.


1896년 고종 33년 4월: 서재필이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의사자격을 획득하다.

1896년 고종 33년 11월: 독립신문에 처음으로 의약품(醫藥品) 광고 - 금계랍이 등장하다.

1896년 고종 34년 9월: 민병호, 평양에서 국내 첫 근대적인 제약기업이라 할 수 있는 동화약품을 설립하고 활명수를 제조하다.

대한제국(1897.10.12~1910.8.29까지)

1897년 고종 34년 11월: 종두의양성소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종두의상 18명을 배출하다.

1899년 고종 36년 5월: 칙령 제 14호 병원(病院) 관제를 제정하다.
제 6조: 빈한한 자가 병이 위중하여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에 오기를 호소하면 의사가 몸소 행하되, 인력거 비용은 받지 말 것.

1900년 고종 37년 10월: 우리 나라 최초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의사 박(朴)에스터(본명 김(金)점동)가 미국 죤 홉킨스 의과대학 졸업후 귀국하다.

1901년 고종 38년 1월: 지난해 한성종두사의 추계 종두 시술이 도합 1,114명인데, 남자 748명, 여자 366명이다.

1901년 고종 38년 2월: 지난해 서울, 제주 및 11도의 종두 시술은 총계 46,026명이다.

1902년 고종 39년 1월: 함북 간도의 거주민들이 종두 위원을 초청하여 수만 명을 위생케 하다.

1902년 고종 39년 2월: 광혜원의 지난해 환자 진찰 및 시약인 수가 도합 18,393명이다.

1902년 고종 39년 7월: 대한의학교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다.  졸업생은 28명이다.

1902년 고종 39년 8월: 삼화항에 괴질 사망자가 많다. 
부산항에 호열자(虎列刺: 콜레라의 음역, 괴질)가 크게 치열하다.

1902년 고종 39년 11월: 지석영이 양매창(
楊梅瘡: 매독)의 만연을 막기 위해 황성신문에 「양매창론」을 기고하다.

1903년 고종 40년 8월: 여성 2명에게 처음으로 간호(看護)교육을 실시하다.

1904년 고종 41년 5월: 한성에서 위생청결법을 실시하다.

1904년 고종 41년 6월: 서울에 첫 공중변소를 설치하다.

1904년 고종 41년 11월: 한성 내에 성홍열이 유행하여 병에 걸린 자 3,329명 중 10명이 사망하다. 남대문 밖에 미국인 세브란스의 자금으로 제중원(濟衆院)을 신축 낙성하다.

1904년 고종 41년 12월: 대한적십자사가 발족되다.

1906년 고종 43년 4월: 광제원(廣濟院)에서 매음녀 검사 수가 95명인데, 그 중 유독자(보균자)가 2명이다.

1906년 고종 43년 6월: 광제원에서 일반 창기(娼妓)에게 매독병 유무를 검사하였는데, 남북촌 기녀(妓女)들 중에 보균자가 많아 치료한 수가 100명에 달하다.

1906년 고종 43년 8월: 서서국(스위스)에서 만국적십자대회를 개최할 때 우리나라가 이에 처음으로 가맹하다.

1907년 순종 1년 7월: 치과업자 최승룡,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종로에 「치과전문」을 개업하다.

1907년 순종 1년 9월: 한성 내외 지방에 간혹
호열자(虎列刺: 콜레라, 괴질)가 있으므로, 창의문 밖에 피병원(避病院)을 설치하다.

1907년 순종 1년 10월: 황성신문에 호열자의 역사 및 예방법이 소개되었는데, 동양은 인도로부터 중국을 경유,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하다. 경시청에서 호열자 예방 주의서를 반포하다.

1908년 순종 2년 3월: 각 지방에 천연두가 유행하므로 종두를 강제로 시행하다.

1908년 순종 2년 6월: 세브란스병원부속의학교 제 1회 졸업식 거행, 7명이 졸업하다.

1908년 순종 3년 5월: 한성부와 각 관찰도의 금년 전염병 환자수 2.267명 중 431명이 죽다.

1909년 순종 3년 7월: 금년 1월부터 5월까지 각 도에서 발생한 전염병자 4,161명 중 사망자는 888명이다.
두창 병자 3,796명 중 사망 803명, 장질부사 병자 263명 중 사망 55명, 적리 병자 46명 중 사망 9명, 디프테리아병자 28명 중 6명 사망, 성홍열 환자 15명 중 사망 9명, 발진티푸스 환자 3명 중 1명 사망, 호열자 환자 15명 중 9명 사망하다.

이 당시 위생국 조사에 의하면 한인(韓人) 의사 2,659명, 약제사 143명, 산파 33명, 간호부 33명, 약종업자 3,265명, 매춘부 1,480명(일본인 2,830명, 구미인 십수명) 등이다.

1909년 순종 3년 9월: 호열자가 유행하다.
호열자(虎列刺: 콜레라, 괴질) 예방을 위해 한성(漢城)에 방역본부 설치하다.

경시청 제 5호: 경성과 용산에서 유출하거나 통과하는 개울물에 채소와 기타 음식물을 씻지 말 것.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8.29~1945.8.15: 35년간)

1911년 4월: 유세환, 한국인 약사로서는 처음으로 종로 3가에 「인수당약국」을 개설하다.

1912년 3월: 약품 및 약품영업 취체령을 공포하다. 시행규칙으로 약제사, 제약업자, 약종상, 매약업자의 업무 범위를 정하다.

1913년 6월: 이석모, 우리 나라 최초의 법인체 제약회사인 「조선매약」을 설립하다.

1917년 4월: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개설하다.

1917년 5월: 미국 여의사 로세타 홀(본명: R. Sherwood)이 조선여의사 강습소를 개설하다.

1919년 9월: 전국에 콜레라가 만연하다.  조선 아편 취체령을 제정하다.

1920년 6월: 최초의 공설 목욕탕이 평양에 개설되다.

1920년 11월: 조선약학교 제 1회 졸업생 배출하다. 처음으로 약제사 자격 시험을 실시하여 이호벽, 신경휴가 1, 2위를 차지하다.

1932년 10월: 조선나병예방협회가 발족되다(초대 회장은 박계양).

미국.소련점령기(1945.8.15~1948.8.15)

1946년 3월: 본건후생국을 보건후생부로 승격하다. 부장에 이용설이 취임하다.

1946년 6월: 부산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전국에 만연하다.

1947년 5월: 해방후 첫 약화사고인 금강제약의 후루덱신 사건이 발생하다.

대한민국(1948.8.15~현재까지)

1954년 3월: 보건부, 의사면허시험을 실시하다.

1954년 4월: 전염병 예방법이 제정되다.

1955년 4월: 제 1회 약사국가고시를 시행하다. 「눈의 날」에 제정되다.

1956년 8월: 첫 나이팅게일 기장(記章)을 이효정이 받다.

1957년 1월:「약(藥)의 날」이 제정되다.

1958년 4월: 동양제약, 최초로 항생제(抗生劑)를 제조 판매하다.

1958년 8월: 뇌염으로 전국 초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다(31일 현재 사망 635명).

1960년 10월:
맹인 약 200여 명이 침술사, 안마사 면허를 요구하며 보사부에 연좌 데모하다.

1961년 11월: 녹용 수입을 금지하다.

1961년 12월: 엉터리 제약회사 203개소의 폐쇄를 단행하다.

1962년 2월: 서울에 독감(A-2형)이 만연하여 3월초까지 55개 학교가 휴교하다.

1962년 3월: 보사부, 전국 183개 보건소에 가족계획 상담실을 설치하다.
국민의료법을 전면 폐지하고, 의료법(전문 12장 70조 부칙)을 제정 공포하다.

1962년 5월: 보사부, 연장(年長)고아 가정입양책을 수립하다.

1962년 6월: 각급 학교에 순회 교의제(校醫制)를 실시하다.

1962년 7월: 무의촌(無醫村) 부임을 기피한 의사 5명의 면허(免許)를 취소하다.

1962년 12월: 전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불화물 도포를 위한 사업비를 각 시, 도에 배정하다.

1963년 1월: 보사부, 무의촌 일소에 한의사도 동원키로 하다.

1963년 6월: 전라남도, 북도 일대에 트리포스병(病)이 만연하다.
결핵퇴치 이동 검진차(檢診車)를 시동하다.

1963년 8월: 콜레라 경보, 공항, 항만에 특별 검역을 실시하다.

1963년 9월: 마장동에 집단 장티푸스 발생하여 1명 사망, 30여 명 중태, 부산에 콜레라가 침투하여 10명 사망, 세계보건기구에 통고하다.

1963년 12월: 법률 제 1623호로 의료보험법을 공포하다.

1964년 3월: 울산 농담초등학교, 나병미감아의 입학을 반대하여 전교생의 80%가 등교를 거부하다.

1964년 4월: 무면허(無免許) 의사, 약사를 단속하여 처음으로 11명을 구속하다.

1965년 1월: 전국 37개 시, 읍, 면을 공해방지구역으로 지정하다.

1965년 2월: 부정 혈액(血液) 매매를 전면 수사하다.

1965년 5월: 합성 마약 메사돈 암매(暗賣) 루트를 전면 판명하다.

1965년 6월: 보사부, 부산 감천화력발전소에 대해 공해방지법 제 1호를 발동하다.

1966년 3월: 보사부 감기, 설사약 등 부정약품 226건을 적발하다.

1966년 5월: 결핵협회, 세계보건기구와의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다(환자 124만명).

1966년 8월: B형 뇌염이 각처에서 발생하여 10월 9일까지 921명이 사망하다.

1967년 1월: 결핵예방법을 공포하다.

1967년 12월: A-2형 인푸루엔자 경보령을 내리다.

1968년 9월: 사회복지법안을 마련하다.

1969년 1월: 보사부, 루프 및 정관 절제 시술을 무료 시술제로 전환하다.

1969년 5월: 서울 대황초동학교생, 나병미감아와 함께 공부할 수 없다고 등교를 거부하다. 서울시교육위원회에서는 미감아를 분리하지 않기로 방침을 결정하였으나, 보사부에서는 미감아 상설교육기관을 설립키로 하고 초등학교생 미감아 5명을 메디칼센터에 입원시키다.

1969년 9월: 전북 옥구군에 유사 콜레라가 발생하여 전국에 경보하다.  그러나 비브리오균 중독으로 고쳐 발표하였다가, 신종 콜레라로 정정 발표하고 방역대책을 강화하다.

1970년 4월: 전염병의 발생 신고를 의무화하는 예방법을 발동키로 결정하다.

1970년 7월: 진주 시내 6개 초등학교생 4,700명이 장티푸스 예방주사 부작용으로 집단 결석하다.

1970년 8월: 전국에 콜레라 방역령, 창녕 중심 100km 내 교통차단, 해수욕장을 폐쇄하다.

1970년 11월: 마약밀조 및 흡연방지를 목적으로 한 습관성 의약품관리법을 발효하다.
보사부, 전국의 정신질환자를 약 35만명으로 추산하다.
국민의 4.2%가 구호대상이라고 실태조사 후 지적하다.

1971년 4월: 전국 1,342리(里) 가운데 총 630개로 집계되다.

1971년 5월: 농협, 무의(無醫)지역에 공제후생의원을 설립하다.

1971년 6월: 보사부, 항생제 등 치료제 약품의 대중광고 금지조치를 취하다.

1972년 3월: 전국 공항과 항만 등에 천연두 경계령을 내리다.

1972년 7월: 가짜 한의사 29명을 구속하고 412명을 수배하다.

1972년 8월: 응급치료 거부 의사에 대해 의사자격 정지 등을 골자로 한 행정명령 세칙을 발표하다.

1973년 5월: 보사부, 내년부터 여고생에게 가족계획교육 실시키로 결정하다.

1973년 7월: 문교부, 2,708개 농어촌학교에 학교의사(學校醫師)를 배치키로하다.

1973년 12월: 원폭피해자 진료소를 경남 합천에서 국내 첫 개원하다.

1974년 3월: 영국형 인플루엔자가 국내에 첫 상륙했다고 발표하다.

1975년 6월: 시판 혈액(血液) 불결 혐의로 병리사(病理士) 6명을 구속하다.

1976년 1월: 의협, 의료봉사일(매월 15일)을 설정하고 영세민들에게 무료(無料) 진료키로 결정하다.

1976년 4월: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모자보건법이 마련되다.

1976년 5월: 기생충 박멸협회, 우리나라의 초등학생 39.5%가 요충에 감염된 것으로 발표하다.

1976년 6월: 강원도 정선에 질병 발생. 7월에 전남, 북에도 같은 증세가 발생하자 보사부에서는 이를
「집단전환반응증」이라고 발표하다.

1976년 8월: 서해 낙도 순히 병원선(病院船) 백련호가 첫 취항하다.

1976년 9월: 무의촌 해소를 위한 공중 보건 장학특례법안을 국회에서 의결하다.
저소득층의 의료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국민의료 시혜확대방안을 확정하고 내년부터 시행키로 하다.

1977년 1월: 우리나라 처음으로 남성(男性)이 간호학과(서울대)에 입학하다.

1977년 7월: 500명 이상 종업원을 가진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하다.

1977년 8월: 모든 의약품에 유효기간(有效期間)을 표시토록 하다.
전국에 뇌염경보령, 제주에 진성(眞性) 뇌염 환자 발생하다.

1978년 1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텍사스 A형 인플루엔자」가 전국에 유행하다.

1978년 3월: 소련형 독감이 상륙하다.  부산에서 첫 환자가 발생하다.

1978년 8월: 무의촌 일소를 위해 군의관(군의관)에 입대하지 못하고 대기 중인 의사시험 합격자들을 위한 국민보건의료 특별조치법안을 마련하다.

1979년 11월: 전국에 치사율이 높은 괴피부병이 발생하다.

1980년 1월: 환경청이 신설되다.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후천성면역결핍증 [後天性免疫缺乏症,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체내의 세포면역 기능이 뚜렷하게 떨어져서 보통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각종 감염증이 발생하고, 이것이 전신에 퍼지는 질환.

에이즈(AIDS)라고도 한다.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세포성 면역기능에 이상이 발생하여, 감기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급성 감염기, 무증세 감염기, 발열, 오한, 설사, 심한 피로감 등 전신적 증세를 보이는 시기를 거쳐 피부증세, 신경증세, 심장질환, 전신성 소모증후군 등의 다양한 증세가 나타난다.

에이즈는 1970년대 말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1950년대 말 중앙아프리카의 녹색 원숭이에서 유래되어 미국과 유럽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즈 환자는 1981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원인균은 바이러스의 일종으로서 과거에는 HTLV-Ⅲ, LAV, ARV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되어 왔으나, 현재는 HIV-1(Human Immunodeficiency Virus-1:에이즈 바이러스)로 통일하여 사용한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주된 공격목표는 면역기능을 조절하는 T세포 중의 보조 T세포(helper T cell)이다. 보조 T세포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괴사를 일으키면, 인체의 면역기능이 파괴되어 면역결핍상태에 이르며, 이로 인해 기회감염(2차감염:정상 조건에서는 감염되지 않다가 면역 기능이 저하되어 감염되는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질병에 쉽게 걸리게 된다.

2001년 현재 에이즈 보균자는 4000만 명이다. 대륙별로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2800만 명으로 가장 많고, 아시아·태평양 제도 710만 명, 동유럽 100만 명, 북미 94만 명, 서유럽 56만 명, 남미 140만 명, 북아프리카 44만 명,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1만 5000명, 카리브해 42만 명 등이다. 2001년 한 해에만 500만 명이 발생하였으며, 300만 명이 에이즈로 인해 사망하였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1981년 2월: 각종 신체 부자유자의 자격제한 규정을 완화하다.
「방콕 A형 독감」이 전국에 유행하여, 대구 등 일부 지방학교에서는 휴교 사태가 발생하다.

1981년 6월: 전국에 옴 주의보가 내려지다.

1981년 9월: 농어촌 벽지에 진료센터 257개소를 설치, 간호대학 출신 보건진료원을 배치하다.

1981년 12월: 경로우대제를 확대 실시키로 결정하다.

1982년 1월: 민간병원에서도 결핵을 무료치료토록 권장하다.

1982년 6월: 결핵예방접종을 받은 서울 경희국교생 50명이 결핵에 감염되다.

1983년 4월: 의료보험인구가 전국민의 42.3%로 집계되다.

1983년 7월: 제 7회 외국인(外國人) 치과의사, 약사 면허시험을 실시하다.

1983년 9월: 보험진료시 항생제 사용을 규제하다.

1984년 3월: 국내 첫 체외인공수정 모체(母體) 이식을 성공하다.

1984년 12월: KGMP 적격여부 심사에 착수하다.

1985년 6월: 국내 첫
AIDS 환자(주한 미국인)를 발견하다.

1985년 10월: 국내 첫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다.

1986년 6월: 국내 첫 냉동정자(冷凍精子)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다.

1987년 2월: 보사부, AIDS를 전염병예방법에 따른 지정전염병을 고시하고, 제 2종 전염병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하다.  렙토스피라(제 2종 전염병준용)와 만성 B형 간염(제 3종 전염병준용)도 지정 전염병으로 포함하다.

1988년 1월: 국립의료원, 서울 상봉동 삼표연탄 부근에 8년 거주자를 진폐증으로 진단하다.

1989년 9월: 보사부, 10월 1일부터 각 보건소에서 AIDS 검사를 무료로 실시하여 비밀을 보장한다고 발표하다.

1990년 2월: 보사부, 한의사의 공중보건의(公衆保健醫) 참여 방안을 마련하여 90년 3월부터 92년 2월까지 2년간 3개 보건소에서 시범사업으로 결정하다.

1990년 3월: 1981~1989년까지 헌혈자가 100만명을 돌파하다.

1990년 9월: 이호왕 교수팀의 10년 연구의 결실에 의한 세계 최초로 유행성 출혈열 백신이 (주) 녹십자에서 개발되다.

1991년 5월: 국립의료원에 처음으로 한방진료부가 설치되어 진료에 착수하다.

1991년 6월: 5월말까지 AIDS 감염환자는 146명, 사망 13명을 제외한 133명이라 발표하다.

1992년 2월: (주)럭키 연구팀, 만성간염, 간암, 간경화 등 간질환의 주요인자인 C형 간염 진단시약을 개발하다.

1993년 2월: 농어촌 지역에서만 실시되던 통합보건사업을 도시 서민이 밀집해 있는 지역까지 확대실시키로 하다.

1993년 3월: 대한의사협회,
「뇌사(腦死)에 관한 선언」선포식을 갖다.
보사연구원, 미혼여성의 85%가 낙태수술을 받고 있다고 연구발표하다.


1993년 8월: 현행 종합병원을 80개 병상 기준에서 100개로 상한, 노인 등 만성병 환자를 위한 요양 병원의 설립 등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다.

1993년 9월: 대한약사회, 22일부터 무기한 약국 휴업을 결의하였으나 사회적 여론에 밀려 하루만에 철회하다.

1993년 11월: 대한약사회, 매년 11월 11일을
「기생충 박멸의 날」로 지정하고, 이날을 전 국민에 무료(無料) 투약키로 결의하다.

1993년 12월: 최근 10년간 사망자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자가 1위라고 발표하다.

1994년 5월: 보사부, 제약업체 중 KGMP 적격업체가 아니면 일체의 생산활동을 중지시키다.

1994년 12월: 보건사회부(保健社會部)를 보건복지부(保健福祉部)로 개칭하다.

1995년 제 8회 국제동양의학 학술대회 서울 개최

1996년

1997년: 한의학발전연구지원사업 실시.

1997년 10월: 한국한의학연구소 원(院)으로 승격.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4월 16일:
사스 바이러스는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사스)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이다. 사스가 아시아에서 출현한 후 세계 보건 기구는 2003년 4월 16일, 여러 실험실에서 발견했던 코로나바이러스의 한 종류가 사스의 원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2003년 12월~2004년 3월: AI는 모두 10개 시.군에서 19건이 발생했고, 닭, 오리 약 530만 마리 매몰돼 살처분 보상금과 생계안정비용 등으로 1천531억원이 투입됐다.

2004년

2005년

2006년
11월~2007년: AI 모두 5개 시. 군에서 7건이었다.  닭, 오리 280만 마리가 매몰돼 살처분 보상금과 생계안정비용 등으로 582억원의 재정이 소요됐다.

2007년

2008년 4/1~5/12:
전북 김제를 시작으로 번지기 시작한 AI는 5월 12일 경북 경산 및 경남 양산 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11개 시.도, 19개 시.군,구에서 33건이 발생했다. 닭.오리 846만마리가 살처분됐고 이에 따른 보상금과 닭.오리 수매자금, 경영안정 융자 등에 모두 2천637억원이 투입됐다.

2009년 4월: 신종 인플루엔자란? (Novel H1N1 Flu)

H1N1 (이전에 돼지 독감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은 사람에게 질병을 유발하는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입니다.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2009년 4월에 최초로 미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멕시코와 캐나다를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도 이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환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람간에 전염이 되는 일반적인 계절성 인플루엔자의 전염과 같은 양태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왜 최초에 신종 플루를 돼지 독감이라고 불렀을까?

최초에 이 바이러스는 "돼지 독감"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실험 결과 이 신종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북미 지역의 돼지에서 쉽게 발생하는 바이러스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이 바이러스와 북미 지역의 돼지 바이러스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신종 바이러스는 두 가지의 돼지 인플루엔자 유전자와 조류 인플루엔자 유전자, 사람 인플루엔자 유전자가 합쳐서 변이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이를 두고 "quadruple reassortant"이라고 부릅니다.

※ 참조:
신종플루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자료는 이곳을 클릭:
< 신종인플루엔자 무엇인가? >

2015년 5월: <시사상식사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中東呼吸器症候群 ,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2012년 4월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감염자가 발생한 급성 호흡기 감염병으로, 2015년 5월부터 대한민국 전역에서 100명이 넘는 감염자가 발생한 바이러스 질환 약어 MERS-CoV

[목차]

█ 메르스 감염 경로와 증상 █ 메르스 발생 현황 █ 2015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메르스 █ 질병관리본부, 메르스 환자 분석한 역학보고서 출간 █ 보건당국, 메르스 종식 선언(2015년 12월 23일 자정)

메르스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에 의한 바이러스 질환. 2012년 4월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감염자가 발생한 급성호흡기감염병이다. 메르스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는 이전까지 사람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로, 명확한 감염원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박쥐나 낙타 등 동물에 있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이종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메르스 감염 경로와 증상:

전염은 환자가 기침 · 재채기를 하거나 말할 때 나오는 침에 바이러스가 묻어 나와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비말 감염으로 알려졌다. 보통 환자와 접촉한 후 2~14일 정도의 잠복기를 거치는데, 잠복기 기간에는 아무 증상도 없고 전염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메르스의 증상으로는 38℃ 이상의 고열, 기침, 호흡 곤란 등이 있으며, 만성 질환 혹은 면역 기능이 저하된 환자들의 경우 폐렴, 급성 호흡 부전, 급성 신부전 등의 합병증이 동반되어 예후가 좋지 않다. 전염성은 낮다고 알려졌으나 국내의 경우 기존 유형과 달리 전염력이 빠른 편으로, 아직 예방 백신이나 치료약(항바이러스제)이 개발되지 않아 증상을 완화하는 대증 요법이 사용되고 있다.

█ 메르스 발생 현황:

유럽질병통제센터(ECDC) 자료(2015. 5. 29. 기준)에 따르면 2012년 메르스가 처음 발생한 뒤 전 세계 25개 국가에서 1,167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479명이 사망했다. 환자와 사망자 대다수는 사우디아라비아(1,010명 감염 · 442명 사망)에서 발생했으며 이외에 UAE(76명 감염 · 10명 사망), 요르단(19명 감염 · 6명 사망), 카타르(13명 감염 · 4명 사망) 등 대부분 중동 지역에서 발생했다. 중동 이외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발생한 환자 수는 27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15년 5월 20일 바레인에서 입국한 68세의 남성이 첫 확진자로 확인된 이후 186명의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메르스 환자가 두 번째로 많이 발생한 국가라는 오명을 썼다.

█ 2015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메르스:

2015년 5월 20일 바레인에서 입국한 한국인 A 씨가 중동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 환자로 확인되면서 국내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A 씨는 2015년 4월 18일부터 바레인에 머물면서 농작물 재배 관련 일을 하다 5월 3일 카타르를 경유해 귀국했다. A 씨는 입국 당시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으나 일주일쯤 지난 5월 11일부터 발열, 기침 등의 증상이 나타나 병원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차도가 없어 세 차례 병원을 옮긴 A 씨는 결국 5월 19일 확진 판정을 받아 국가 지정 입원 치료 병상으로 옮겨졌다.

이후 보건 당국은 메르스의 감염률이 높지 않다고 밝혔으나, 2015년 5월 20일 메르스 첫 확진자가 나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감염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여기에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가 계속 나온 것은 물론 3차에 이은 4차 감염까지 속출하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10대 환자와 임신부 감염자까지 발생했다. 이와 같은 메르스의 확산에도 감염자가 경유하거나 확진됐던 병원명 비공개 방침을 고수하던 정부는 결국 병원명 공개를 촉구하는 여론과 일부 지자체의 움직임이 일자 뒤늦게 24개 병원의 명단을 공개해 비난을 샀다. 한국 - 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은 한국 정부가 정보 공개를 늦춘 탓에 초기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방역 정책의 실패를 불러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메르스의 급격한 감염 확산과 3차에 이은 4차 감염자까지 등장하면서 메르스의 지역 사회 감염 우려까지 일기도 했다. 그러나 보건 당국과 국내 메르스 전파 원인과 양상 등을 규명해 왔던 세계보건기구(WHO)는 2015년 6월 13일 발표한 합동 조사 결과를 통해 한국의 메르스는 바이러스 변이 가능성이 없고 지역 사회 전파에 대해서도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 질병관리본부, 메르스 환자 분석한 역학보고서 출간:

질병관리본부가 2015년 10월 25일 발표한 <2015 대한민국의 메르스 코로나 바이러스 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대한민국의 메르스 사태에서 확인된 슈퍼전파자는 모두 5명으로, 이들 5명이 전체 메르스 환자 186명 중 82.3%인 153명의 감염자를 발생시켰다. 질본은 혼자서 4명 이상에게 메르스를 전파한 감염자를 슈퍼전파자로 정의했다. 특히 이들 슈퍼전파자 모두 확진 당시 수백 명 이상을 접촉한 것으로 드러나 정부의 뒤늦은 환자 파악이 한국의 메르스 사태를 키운 원인으로 지적됐다.

이 밖에 메르스 바이러스의 평균 잠복기는 6.83일로 확인됐으며, 감염자의 95%는 접촉 후 13.48일 내에 메르스 증상이 나타났다.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은 총 16곳이었으며 전체 186명 환자 가운데 남성이 111명, 여성이 75명이었다.

█ 보건당국, 메르스 종식 선언(2015년 12월 23일 자정):

보건당국이 2015년 12월 23일 자정을 기해 메르스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지난 5월 20일 국내에서 첫 번째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지 217일 만이다. 정부는 지난 7월 28일 더 이상의 메르스 감염 우려가 없다며 사실상 종식을 선언했고 12월 1일에는 위기단계를 '관심'으로 낮춘 바 있다.

한편, 2015년 5월 20일 국내에서 첫 번째 메르스 환자가 확진된 뒤 그간 총 186명이 감염됐으며 이중 38명이 사망해 국내 메르스 치사율은 20.4%로 나타났다."

※ 참조:
메르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자료는 이곳을 클릭:
http://jdm0777.com/jilbyeong/mers.htm

(역대 한국의료역사 자료 모음/ 약초연구가 & 동아대 & 신라대 대체의학 외래교수 전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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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고문헌]

1,
동의학(東醫學) 어떻게 배울 것인가[한상모 외 10인, 여강출판사, 1993년]
2,
동의학사전(東醫學辭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년, 남한 재편집 1990년 까치, 2001년 동방의학사]
3,
민간의약(民間醫藥)[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 도서출판 신유, 1997년]
4,
약의 역사(藥의歷史)[이동석 김신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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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약(醫藥)의 역사[정민성, 학민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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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의학리용안내[최태섭, 세계보건기구전통의학협동연구중심, 2005년]
7,
전통한의학의 뿌리를 찾아서[강병수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2년]
8,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국보 제151호, 세계기록유산, 2,077책(冊), 조선 태조~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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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학기술사(의학편)[廖育群 傳芳 鄭金生, 일중사, 박현국 김기욱 이병욱 번역, 2003년
10,
중국의학사(中國醫學史)[홍원식, 일중사,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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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약사(韓國醫藥事)[김신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년]
12,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김두종, 탐구당, 1981년]

▦▩ 참고 문헌(參考 文獻)

아래의 내용도 함께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1. 간이벽온방 무엇인가?
  2. 광제비급 무엇인가?
  3. 구급간이방 무엇인가?
  4. 급유방 무엇인가?
  5. 대한민국 의료역사 무엇인가?
  6. 동의보감 무엇인가?
  7. 수세보원 무엇인가?
  8. 동의치료경험집성 무엇인가?
  9. 동인경험방 무엇인가?
  10. 두창경험방 무엇인가?
  11. 마과회통 무엇인가?
  12. 마방통휘 무엇인가?
  13. 마진방 무엇인가?
  14. 방약합편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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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사고전서 무엇인가?
  17. 사의경험방 무엇인가?
  18. 삼화자향약방 무엇인가?
  19. 상한잡병론 무엇인가?
  20. 소아의방 무엇인가?
  21. 수세보원 무엇인가?
  22. 시종통편 무엇인가?
  23. 신농본초경 무엇인가?
  24. 신라법사방 무엇인가?
  25. 신찬벽온방 무엇인가?
  26. 어의촬요방 무엇인가?
  27. 언해두창집요 무엇인가?
  28. 유유일심 무엇인가?
  29. 의림촬요 무엇인가?
  30. 의문보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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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의방신감 무엇인가?
  33. 의방활투 무엇인가?
  34. 의종손익 무엇인가?
  35. 제중신편 무엇인가?
  36. 제중입효방 무엇인가?
  37. 중국의학대계 무엇인가?
  38. 중약대사전 무엇인가?
  39. 증수무원록 무엇인가?
  40. 증수무원록언해 무엇인가?
  41. 진맥도결 무엇인가?
  42. 촌가구급방 무엇인가?
  43. 치종비방 무엇인가?
  44. 치종지남 무엇인가?
  45. 침구경험방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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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한국의학대계 무엇인가?
  48. 향약간이방 무엇인가?
  49. 향약고방 무엇인가?
  50. 향약구급방 무엇인가?
  51. 향약제생집성방 무엇인가?
  52. 향약집성방 무엇인가?
  53. 향약채취월령 무엇인가?
  54. 향약혜민경험방 무엇인가?
  55. 황제내경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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