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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관찰여행
제
126부 기념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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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로 숫자 번호를 누르면 아래에 있는 사진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동대대체의학 제 7기
및 총동문회 2010제천국제한방Bio엑스포, 청풍호 및 청풍문화재, 단양팔경,
고수동굴 기념사진 >
 151 갈아놓은
논바닥의 흙덩이를 부수거나 바닥을 판판하게 고를 때 사용하는 기구인
"써래"
왼쪽은 걸려있는 것은 소가 곡식을 함부로 뜯지 못하도록 소의 입에
쒸우는 망이다.
 152 대에
눈금이 새겨져 있고 추가 매달려 있는 저울인 "대저울"
 153 짚이나
싸리 등으로엮어 만들어 물건을 넣고 어깨에 메고 다니는 바구니들인
"다래끼"
 154 옛날
시골집 마루에 앉아서
 155 큰
행사나 소의 여물을 끓일 때 사용했던 무쇠솥인 "쇠죽솥"
 156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인 "디딜방아",
안쪽 오른쪽은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도구인
"키"
이에는 한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서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의 옛 고구려 무덤의
그림으로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며, 이 방아는 근래까지 전남의 해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디딜방아의 분포지역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대륙, 인도네시아 등지의 도서 지역, 일본 ·네팔 ·인도
등이지만, 양다리방아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외다리방아를 나란히 설치하여
쓸지언정 한국처럼 양다리방아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양다리방아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공이로는 나무, 돌을 쓰지만 나무 공이 끝에 겉을 우툴두툴하게
만든 쇠통을 끼우기도 한다. 확으로는 작은 돌절구를 땅에 묻으며 천장에서
늘인 새끼줄을 쥐고 방아를 찧는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157 짐을
얹어 등에 지는 운반도구인 추억의 "지게"
그 당시 우리 민족이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 중의 하나이다.
 158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수공업적인 도구인
"물레"
 159 추억의
장독대 앞에서
 160 장독대를
보면 옛날 구수한 된장국과 매운 고추장으로 햇쌀밥을 비벼서 먹던 생각이
들 게 한다.
 161 큰
두렛상 위에 사기그릇인 종지와 밥그릇들이 올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 반 잘린 사진은 물동이나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얹는 기구인
"또아리"
 162 이
부엌은 박을 쪼개서 만든 "바가지"가
걸려있고, 석유나 식물기름으로 불을 밝혔던 유리 사각형의 "호롱불"
 163 옛날
마루에 쌀을 담아두는 "두지"와
곡식을 양을 측정하는 "말"
여러가지 음식물, 그밖의 것을 담거나
음식을 버무리는 등에 쓰는 "함지박" 휴대용 병으로서 물,
술, 약 등을 넣어서 사용하던 "호리병"
 164 말이나
소의 먹이인 여물을 담아 먹이던 구유 그릇인 "소여물통(구유)"
 165 양쪽의
양철통을 매달아 물을 길어 나르는데 쓰는 추억의
"물지게"
 166 초가지붕위에
박넝쿨이 올라가 자라고 흰 박꽃이 피고, 아직 작은 어린 박이 매달려
자라고 있다.
 167 초가지붕
뒤쪽에는 둥근박이 영글어 음식 그릇을 만들 정도의 크기로 자랐다.
 168 석불앞에서
 169 좀더
근접한 석불앞에서 기념촬영
 170 도호부(都護府)로
들어가는 제아문(制衙門)
 171 옛
고가를 관람하면서
 172 안내인의
해설을 듣고 있다.
 173 옛날
사또가 죄인을 벌하기 위한 장면을 형상화한 모습
"청풍 금병헌(淸風錦屛軒)"
해설:
1976년 12월 21일 충북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명월정(明月亭)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청풍부의 동헌(東軒)으로 부사(府使)가 집무하던 곳이라
하나 확실치는 않다. 부속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조선 말에 붕괴되어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 본래 청풍면 읍리에 있던 건물이다.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吳道一)이 창건하였다. 그후 숙종 31년(1705)
부사 이희조(李喜朝)가 중건하였으며,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朴弼文)이
다시 옮겨 개축하고 당(堂)의 이름을 금병헌으로 바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고, 1983년 충주댐으로 인한 수몰을 피해
청풍문화재단지 내에 이건하였다. 건물 내부에 청풍관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현판 글씨는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이 썼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목조기와집이다.
전면 1칸은 마루를 깔고 뒤로 들여앉혀 방을 들였는데, 왼쪽 2칸은 마루에
난간을 둘러 마치 누각처럼 꾸몄다. 총건평 40평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였다.
이 지역 관아건축 중 유일하게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로
당시 행정관의 검소한 생활 단면을 보여준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174 한벽루와
동헌 사이에 있는 터인 "의청각(義淸閣)"
고을을
찾아 온 손님을 맞이하던 곳이라고 한다.
 175 보물
제 528호 "한벽루(寒碧樓)"
1971년
1월 8일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4칸. 1317년(고려
충숙왕 4)에 건립되었으며 석축토단(石築土壇)의 덤벙주초(柱礎) 위에
엔타시스를 사용한 층하주(層下柱)를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다. 팔작지붕으로
주심이익공(柱心二翼工) 보 머리 끝에 봉황머리를 별조(別彫)하고 중설(重舌)은
길고, 앙설(仰舌)도 길게 빼내고 연화(蓮華)를 얹었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형 익랑(翼廊)을 달고 익랑의
주초는 덤벙주초 위에 4각 석주를 얹고 그 위에 8각 기둥을 받쳤다.
누각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편액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淸風寒碧樓’라 명(銘)한 액자가
있고 창석(蒼石) 이준(李晙)의 중수기가 있다. 중수기에는 ‘崇禎甲戌郡守權璥刱’이라
적혀 있는데 이 해는 1634년(인조 12)에 해당한다. 한벽루는 이보다
앞서 1397년(조선 태조 6)에도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였고, 그
후 1870년(고종 7)과 1900년(광무 4) 중수되었다.
1872년 대홍수로
도괴되었던 것을 1875년 원래대로 복원하였고,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어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놓았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176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내려다 본 모습 하늘높이 솟아오르는 수경 분수대
 177 뒷배경에
국화꽃이 만발한 모습이 아릅답다.
 178 국화꽃길
언덕을 걸으면서
 179 언덕위에
높이 솟아오른 "관수정(觀水亭)"
 180 국화꽃동산을
배경으로
 181 국화꽃이
핀 동산에서
 182 국화꽃이
만발한 산기슭에서
 183 가을의
전령 국화꽃밭에서
 184 국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185 가을의
국화꽃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186 청풍문화재단지
정상 망월루에서
 187 청풍문화재단지
주차장에서
 188 청풍호
유람선 선착장인 "청풍나루휴게소"
 189 유람선을
타기 위해 내려오는 모습
 190 유람선
선착장에서 청풍현수교를 뒤로 하고 기념촬영
 191 유람선에
드디어 승선하여 갑판위에서
 192 한참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청풍현수교"
 193 배가
드디어 떠나면서
 194 좌우의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195 청풍현수교를
지나서 배가 떠나고 있다.
 196 아름다운
바위와 소나무의 조화
 197 시원한
청풍호의 바람을 맞으며
 198 유람선
갑판위에 다리에 걸릴 위험 때문에 배의 철탑 안테나를 반쯤 뉘인곳에서
 199 멀리
보이는 붉은색의 철로 만든 아름다운 "옥순대교"
 200 옥순교를
유람선을 타고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사진
충북
제천시 청풍면과 단양군 단성면을 잇는 다리이다.
201~25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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