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로 숫자 번호를 누르면 아래에 있는 사진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고려장골【골짜기】 석포 마을 남쪽 과수원 뒤편 골짜기로 고려장이 행하여진 곳으 로 전해진다. 현재 그 흔적은 별로 찾을 수 없는 대신 어린아이를 매장한 흔적이 많 이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전덕근 증언) ◇ 고치거리골【골짜기】큰골의 동북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도깨비골【골짜기】큰골 마을 앞 들녘의 건너편에 있는 골짜기로 본래 이 곳에 몇 채의 가옥이 있었으나 도깨비들이 밤마다 솥에다 모래를 붓기도 하고, 솥에 솥뚜껑을 집어넣고, 밤에 도깨비들이 시끄럽게 굴다 가도 아침이면 별 일이 없는 것처럼 도깨비 들의 장난이 계속되자 사람들이 집을 버리 고 떠남에 따라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고 전하여 진다. (전홍승 55세 이장) 제3장대곡리(大谷里) 665 벌터 서당골 석포 소류지 ◇ 돌팩이【마을】석포를 가리키는 말이다. ◇ 둥구럭배미【들】경지 정리 이전의 큰골 마을 앞의 논을 부르던 말로 논이 둥그렇 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매봉재 【산】큰골 남쪽의 큰 산을 말한다 ◇ 매화자리 【들】큰골의 동북에 있는 논으로 본래 밭이었는데 경지 정리하여 논이 되었다. 토질이 좋아 소출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문앞들 【들】큰골의 앞들을 말한다. ◇ 뱀논 【들】큰골마을 앞의 농경지가 정리되 기전, 마치 뱀처럼 길고 좁은 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벌터【들】큰골 남쪽 마을이다. ◇ 복대골【골짜기】석포 앞의 작은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로 곳간이 있었지만 석포가 신니면에서 주덕읍 대곡리로 편입되면서 원 대곡의 곳간으로 상여를 옮겼다. 그러나 현 재는 전부 소각하고 1회용 상여나 장의차를 이용하고 있다. ◇ 서낭고개【고개】벌터 남쪽 소이면 비산리 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 서당골【골짜기】천안전씨 재실 뒤쪽의 긴 골짜기로 재실에서 약 100m 정도 거리에 서당이 있어 많은 후학이 공부한 곳이라 한다. (전덕근 제보) ◇ 석새미【샘】벌터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샘이 3개 있다고 해서 “석샘”이라 고 하던 것이 “석새미”로 음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 석포【마을】신니면 화안리에서 행정구역 개편으로 주덕읍 대곡리로 편입된 마을이다. ◇ 석포소류지【못】석포 마을 남쪽의 소류지다. ◇ 순후재【고개】큰골 남동에서 국도 36번 도로로 나가는 고개를 말한다. ◇ 순후골【골짜기】매봉산의 동쪽 골짜기를 말한다. ◇ 유박골【골짜기】석포마을의 뒷 골짜기를 말한다. ◇ 응골【골짜기】참샘골의 우측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자주막골【골짜기】석포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의 이름이다. ◇ 장자들【들】석포의 남쪽들로 석포 소류지가 있다. ◇ 진골【골짜기】황술재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를 말한다. 모양을 나타내는 “긴골”이 음운변화로 “진골”로 변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참샘골【골짜기】석포 마을의 건너편 골짜기로 찬 샘이 있어 마을에서 음용수로 사 666 석포 큰골 용하였으며, 땀띠가 없어질 정 도로 물이 차가웠다고 전하여 진다. (전덕근 64세) ◇ 큰골【마을】원대곡의 중심 마 을이다. ◇ 황술재(黃戌)【고개】큰골 뒷산에 있는 고개 이다. 황술재 에는 달바위(月岩)가 있는데 이 바위의 기운으로 월암 마을은 번 성하고 큰골은 쇠퇴하는 모습이 계속됨에 따라 당시 대성인 천안 전씨들이 이 바위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파묻었다. 그랬더니 큰골이 기운이 성하여 전씨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후 전해지는 말로 바위가 흙속에 묻혀 안보이 면 큰골이 잘되고 바위가 흙 밖으 로 나오면 월암이 번성한다는 설 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바위가 어디에 묻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전해진다. (전홍 승 55세 이장) 또 다른 일설에는 달바위로 인하여 마을 처녀들의 음기가 성하여 바람나기에 매장하 였다고도 한다. 8. 전설 1) 강우에 관한 이야기 ‘큰골 앞산인 비득재서부터 비가 오면 비가 많이 내릴 것이고 개앞산(음성 가엽산을 지칭하는 말이다) 서부터 비가 오면 그 것은 오나마나한 비이다’ (전홍승. 55) 2) 옻샘(충주대학교 한종구 교수 채집 - 주덕읍 대곡리 보성파워텍 제2공장 확장 사업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인용) 원대곡 석포 마을 논 가운데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을 옻샘이라 부른다. 이 물은 약 수로 옻이 오른 사람이 이 물을 먹거나 이 물로 옻이 오른 부위를 씻으면 옻이 나았다 고 한다. 이 샘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 지 않고 장마가 져도 물이 넘치지를 않는다고 한다.
본관은 천안이다. 영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으로 있다가 통정대부로 거창도호부사 겸 진주진 관병마첨절제사를 지내고 수안, 제주부에도 있었 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낸 효자 라 하였다. 그는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목 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하니 이상하게도 효험 이 있었다. 또한 어버이가 자라탕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때마침 겨울이어서 얼음이 얼었으므로 냇가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빌었더니 갑 자기 자라가 냇물에서 튀어나와 이를 잡아다가 달여 드렸다. 그의 정성스런 봉양으로 부모가 90세를 누리며 장수를 하였다. 이 소문이 왕에게 들어가 철종 1년(1850)에 정려를 세우도록 명했다. 3) 전오석 정려각 위치 : 주덕읍 대곡리 원대곡 석포마을 시대 : 1850년 내용 : 조선 철종 1년(1850)에 명정된 정려로 영조 때 무과로 거창부사를 지낸 전오석(全五錫)의 효성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려이다. 석포 마을로 들 어가는 어귀의 작은 언덕에 세워진 정려각 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 와집으로 남향하였다. 홍살을 하부까지 내려 설치하고 있는 개방된 구조를 보이는데 이러한 구조는 정려를 통해 충효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개방되면서 보호와 기념의 성 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교적 검소한 형식을 하고 있으며 절제된 형식을 보이고 있으 나 건물이 훼손되고 관리가 부실함에 따라 쇠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려 내부에는 마룻대에 ‘孝子通政大夫行居昌都護府使晋州鎭管兵馬僉節制使全 五錫之門 上之二年庚戌五月 日 命旌閭’라 쓰인 홍판장의 편액과 그 하부에 ‘天安全 公諱五錫號杏雲孝子旌閭重修記 歡禎三癸巳仲春 日 偈’이 걸려 있다. 후면에는 ‘杏 塘窩 崇禎三癸巳仲春 日 偈’, ‘天安全公諱五錫號杏雲孝子旌閭重修記 歡城君紀元 一千九百九十二年甲寅四月
李鎬昌 撰 崔奎煥 書’라 쓰여진 현판이
붙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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